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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1964년 겨울

작품명
서울, 1964년 겨울
저자
김승옥(金承鈺)
구분
1960년대
작품소개
개요 1965년 6월 <사상계>에 발표된 김승옥의 단편소설. 제10회 동인문학상 수상작이다. 이 작품은 구청 병사계 직원인 ‘나’와 대학원생 ‘안’과 아내의 죽음을 대가로 돈을 받아 든 ‘서른대여섯 살짜리 사내’가 우연히 만나서 보내게 되는 하루 저녁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이 세 인물은 각기 다른 양태의 삶을 살고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는데, 문명사회(혹은 도시)의 거대한 질서로부터 소외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소외로부터 짙은 절망감과 권태를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세 인물은 모두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고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지만, 기능적 합리성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는 인간의 삶을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으로 분할해 버린 상태여서 이들의 열망은 실현될 수가 없다.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복이나 명예 혹은 이름을 버린 익명적인 존재나 기호화된 존재여야 하며, 개인의 창의성이나 개성을 실현하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기호이기를 거부해야 한다. 이 이율배반적인 상황 속에서 세 인물은 절망과 권태를 견디는 것 외의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없다. 이들은 이 절망과 권태를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놀이를 통해 넘어서고자 한다. <서울, 1964년 겨울>은 세 명의 등장인물이 벌이는 하룻밤의 놀이를 통하여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이 분리되어 사회의 한 기계부품처럼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의 비극적인 삶을 냉정하게 묘파하고 있다. 내용 ‘나’와 ‘안’은 포장마차 선술집에서 우연히 만났다. 육사시험에 실패하고 구청 병사계에서 근무하는 스물다섯 살의 ‘나’는 시골출신으로 소외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나’와 동갑내기인 ‘안’은 부잣집 장남이며 대학원생으로 상실과 좌절을 경험해본 인물이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지만 대화는 겉돌기만 한다. 자리를 옮기려는데 한 ‘사내’가 동행을 제안한다. 그는 장례 비용이 없어 급성뇌막염으로 죽은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고 4천원을 받았다. 셋은 거리를 헤매다 여관에 가기로 한다. 사내는 같은 방에 들자고 했지만 ‘안’의 거절로 셋은 각각 다른 방에 투숙한다. 다음 날 아침 사내는 죽어 있었고, ‘나’와 ‘안’은 서둘러 여관을 나온다. 두 사람은 스물다섯이지만 너무 많이 늙었음에 동의하며 헤어진다.
저자
김승옥(金承鈺, 1941~) 1941년 12월 23일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출생. 1945년 귀국하여 전남 순천에서 성장하였고 순천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했다. 1962년 단편 <생명연습>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같은 해 김현·최하림 등과 더불어 동인지 <산문시대>를 창간하고 이 동인지에 <건>, <환상수첩> 등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1964년 <역사>, <무진기행> 등을 발표하며 전후세대 작가를 넘어선 것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1965년 미시적인 사물에 광적으로 탐닉하는 인물들을 통하여 거대한 문명사회로부터 소외되고 꿈과 생명력을 상실한 현대인의 삶을 조망한 <서울, 1964년 겨울>로 제10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에로스적 측면에서 인간의 생명력 회복을 염원하는 소설인 <60년대식>, <다산성>, <야행>, <강변부인> 등을 발표하였고, 1977년 현대인의 충일한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소통불능의 상태를 에로스로 넘어서고자 하는 소설 <서울의 달빛 0장>으로 제1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66년 창문사에서 창작집 <서울, 1964년 겨울>을 발간하였고, 1976년 서음출판사에서 장편소설 <60년대식>과 1977년 한진출판사에서 장편소설 <강변부인>을 간행하였다. <환상수첩>, <확인해 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생명연습> 등의 초기 소설은 환각이나 환상을 좇는 삶 혹은 현실을 초월한 삶에 대한 강렬한 동경이 두드러진다. 그의 소설은 <무진기행> 이후 현실의 엄정한 법칙성을 인정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며, 후기 소설은 초기의 아웃사이더를 향한 열정 대신에 꿈이나 환상을 잃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한 환멸과 허무의지로 차 있다. <서울, 1964년 겨울>, <야행>, <차나 한잔>, <염소는 힘이 세다>, <1960년대식>, <서울 달빛 0장> 등 후기 소설은 산업사회의 한 기호로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상실감을 주로 형상화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로스적 열정으로 기성의 질서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의도를 담은 <보통여자>, <강변부인> 등에서는 김승옥 소설이 지녔던 문제적인 성격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김승옥의 소설은 감각적인 문체, 언어의 조응력, 배경과 인물의 적절한 배치, 소설적 완결성 등 소설의 구성원리 면에서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4·19혁명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문학적 언어로 환치시키면서 전후세대 문학의 무기력증을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높다.
리뷰
작가 김승옥의 문학적 성가는 대체로 1966년에 나온 단편집 <서울, 1964년 겨울>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신춘문예 당선작인 <생명연습>을 비롯하여 11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이 한 권으로 김승옥은 단편작가로서의 역량을 현란하게 보여 주면서 누구도 부인할 길 없는 뚜렷한 흔적을 우리의 현대문학사에 남겨 놓았다. 단편집 발간 이후에도 그는 <다산성>, <내가 훔친 여름>과 같은 중장편을 발표한 바 있다. 이런 작품들이 작가 특유의 재기발랄한 개성을 보여주는 매력있는 작품임에는 틀림없지만 첫 단편집이 보여 준 작품세계를 크게 수정하거나 뛰어넘는 것은 아니다. (……) 어쨌거나 김승옥은 단편집 <서울, 1964년 겨울>과 몇몇 후속 단편의 작가로 기억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 성취는 너무나 섬세하고 휘황하여 작가 자신마저도 숨가쁘게 할 정도였다. 흔히 한 세대로 가늠하는 3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우리는 한결 차분하고 정돈된 눈으로 그 문학적 성취를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30년 전 하나의 경이로 다가왔던 그의 문체와 그것을 낳게 했던 풋풋한 감수성은 오늘날 얼마쯤 바래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문체는 후속 세대들에게 문체의 위엄과 위력을 보여 줌으로써 한국 소설 일반의 문체를 더욱 섬세하게 할 수 있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정작 김승옥 문체의 눈부심을 삭감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렇지만 문학의 역사가 한편으로 ‘낯설게 하기’의 교체현상이라는 일면이 있기 때문에 김승옥 문체는 여전히 평면적 사실주의에 대한 대조이자 해독제로서 매력있는 사례가 되어 주고 있다. 비속한 재치나 개그가 문학 내부를 혼란시키고 있는 오늘 그의 신선하고 섬세한 문체는 문학 고유의 자신과 위엄의 모범 사례이기도 하다. 문학에서는 문체가 전부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문학의 고유성이 거기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서울, 1964년 겨울>이란 표제는 계시적이다. <파름의 승원> 제1장에 붙인 ‘미라노 1796년’을 상기시키는 이 표제는 김승옥이 자기가 살고 있던 시대와 장소에 대해서 충실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도록 상기시켜 준다. 스탕달은 소설을 한길에 세워 둔 거울이란 뜻으로 말한 적이 있지만 근대소설은 사회현실과 밀착된 근친성을 어떤 문학 장르보다도 진하게 가지고 있다. 그것이 소설의 특징이며 단편도 느슨하긴 하지만 매한가지다. 근대소설은 대체로 당대 사회의 객관적 묘사를 지향했는데 이때 시간과 장소는 그 특정성으로 해서 객관적 묘사에 있어 필수적 요인이 된다. 특정 시간과 장소의 구체적 명시야말로 신화나 로맨스와 구별되는 소설의 특징이다. 표제에 명시되어 있듯이 김승옥이 꼼꼼하고 정감 있게 다루고 있는 것은 1960년대 서울에서의 사람살이이다. (물론 <건>, <수술>과 같은 시골 삶이나 다른 연대의 세상을 다룬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만큼 그것은 주류에서 벗어나 있다. <무진 기행>은 지방이 무대이지만 화자이자 주인공의 서울 이탈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도시생활자의 시점에 선 작품이다.) 1960년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라는 우리 역사상 유례없을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 속도가 이례적이리만큼 빨랐던 거대변화가 시작되던 연대이다. 그 거대변화는 그 속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도 뒷날에 가서야 그 의미를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던 변화의 논리와 궤적을 가지고 있었다. 비근하고 일상적인 것에 매몰되는 신문 기사와 신문의 시사해설에 향도받아 눈에 뜨이는 정치적 사건에 사람들이 일희일비하는 사이 거대변화의 수레바퀴는 소리 없이 마력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김승옥의 뛰어난 단편들은 산업화, 도시화,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거대변화의 징후를 섬세하고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 변화의 징후가 현저하게 드러나는 것은 도시이고 그의 주요작품이 도시 거주자로 채워져 있다는 것은 따라서 당연하다. 전봇대에 붙은 약광고판 속에서는 이쁜 여자가 ‘춥지만 할 수 있느냐’는 듯한 쓸쓸한 미소를 띠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어떤 빌딩의 옥상에서는 소주광고의 네온사인이 열심히 명멸하고 있었고, 소주광고 곁에서는 약광고의 네온사인이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다는 듯이 황급히 꺼졌다간 다시 켜져서 오랫동안 빛나고 있었고, 이젠 완전히 얼어붙은 길 위에는 거지가 돌덩이처럼 여기저기 엎드려 있었고, 그 돌덩이 앞을 사람들은 힘껏 웅크리고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종이 한 장이 바람에 휙 날리어 거리의 저쪽에서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 종잇조각은 내 발 밑에 떨어졌다. 나는 그 종잇조각을 집어 들었는데 그것은 '美姬 서비스, 특별염가'라는 것을 강조한 어느 비어 홀의 광고지였다. (<서울, 1964년 겨울> 중에서) ‘모든 욕망의 집결지’라고 한 작중 인물의 입을 통해 정의되어 있는 서울의 밤풍경을 재현한 약광고와 술광고와 유흥가의 선전지가 고작인 이 대목은 산업화가 시동단계에 있던 서울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1990년대 지금의 서울 거리와 다르고 이태준이나 박태원이나 이상이 보여 주던 1930년대 서울 거리와도 다르다. 절대빈곤을 시사하는 겨울밤의 거지들이 수두룩하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거리의 포장 친 선술집에서 대학원생과, 육사에 낙방한 후 입대했다가 지금은 구청 병사계 직원이 되어 있는 화자, 그리고 아내 시체를 판 후 자살하게 되는 서적 외판원이 만나게 된다. 아니 부딪치게 된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우연히 마주쳤고 그 중의 하나가 두 사람의 대화에 자청하여 끼어들었다는 것밖에는 아무런 연줄도 공동관심사도 공통의 과거도 없다. 익명과 익명의 우연한 부딪침이라는 도회의 항상적 경험을 작품은 취급하고 있다. 대학원생 안과 병사계 직원 김은 동년배라는 것과 선술지에 비슷한 시각에 들어섰다는 우연 때문에 대화를 주고받지만 그것은 피차간에 의미 있는 경험의 교환이 되어 주지 못한다. 피차간에 인적사항을 얘기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건성일 뿐이다. "시골에서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온 청년들의 눈에 가장 부럽고 신기하게 비치는 게 무언지 아십니까? 부러운 건, 뭐니뭐니 해도, 밤이 되면 빌딩들의 창에 켜지는 불빛, 아니 그 불빛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고, 신기한 건 버스칸 속에서 일 센티미터도 안 되는 간격을 두고 자기 곁에 이쁜 아가씨가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아가씨들과 팔목의 살을 대고 있기도 하고 허벅다리를 비비고 서 있을 수도 있어서 그것 때문에 나는 하루 종일을 시내 버스를 이것저것 갈아타면서 보낸 적도 있습니다. 물론 그날 밤엔 너무 피로해서 토했습니다만." (<서울, 1964년 겨울> 중에서) 고향 탈출에 성공한 병사계 직원은 무직자 시절의 절실했던 체험을 이렇게 털어놓지만 도수 높은 안경을 쓴 대학원생은 무슨 얘기를 하자는 거냐며 말참견을 한다. 그들 사이에는 의미 있는 경험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미 있는 것에 대한 암묵의 동의가 처음부터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관심사가 없기 때문이다. 또 그들이 의미 있는 경험 교환에 대한 지향이나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어서 계속되는 그들의 대화는 엄밀한 의미에서 대화가 아니다. 그것은 독백의 교체일 뿐이다. 그들의 초점 없는 요설은 그들의 권태와 무위의 시간 소비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우연한 익명의 부딪침 속에서 의미 있는 경험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도회적 삶의 국면을 드러낸다. 이들은 선의의 인간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연한 타자의 마주침이라는 도회적 경험의 근본적인 서먹서먹함을 가셔 주지 않는다. 인간관계에는 어떤 냉랭함이 끼어든다. 그것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의미 있게 하는 친화력을 마련해주지 못한다. 두 20대 청년 사이로 끼어든 30대 후반의 아저씨는 사실은 말벗이 없어서 끼어든 것이다. 한참 뒤 그는 실토한다.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들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오늘 낮에 제 아내가 죽었습니다.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우리는 아들의 죽음을 얘기할 상대가 없어서 결국 부리는 말을 향해 하소연하는 체호프 단편 속의 마부를 상기하게 된다. 아내를 잃은 이 서적 외판원은 우연히 알게 되어 2년 전에 결혼했지만 처갓집이 어딘지도 모른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다. 사람살이의 우연성과 사람관계의 익명성은 그의 등장으로 더욱 강조된다. 사람 사이에서 가장 가까운 것으로 파악되는 부부 사이에서 사람관계의 우연성과 황당함은 더욱 두드려져 보인다. 결국 상처한 아저씨는 시체 판매대금을 선술집에서 만난 청년들과 함께 낭비하고 마치 속죄라고 하듯이 자살하고 만다. (자살을 결심하고 그 돈은 다 없애 버리지만 죽는 사람에게 있어 그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두 청년은 도망치듯이 자살장소인 여관을 나와 눈 내리는 아침에 헤어진다. 20대 중반의 청년들은 마지막 순간에도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저마다의 독백을 교환하는 것뿐이다. 너무 늙어버린 것 같다는 대학원생과 겨우 스물다섯 살이라고 말하는 구청 직원의 독백의 교환은 <서울, 1964년 겨울>이 보여주는 도시적 인간관계의 축도이다.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도시화라는 거대변화 속의 인간관계를 뚜렷하고 생생하게 재경험하고 그것이 옛 농촌공동체와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하게 된다. 도시적 인간관계의 전형적인 국면을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두 청년이 나누는 대화의 세목을 축어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서대문 버스 정거장에는 사람이 서른 두 명 있는데 그 중 여자가 열일곱 명이었고, 어린애는 다섯 명, 젊은이는 스물한 명, 노인이 여섯 명입니다." "그건 언제 일이지요?" "오늘 저녁 일곱시 십오분 현재입니다." (<서울, 1964년 겨울> 중에서) 주고 받는 말의 세목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젊디젊은 유위한 청년들이 의미 있는 경험 교환을 할 수 없는 상황의 재현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이렇게 저마다의 고독과 우수와 방황을 허비하는 것이다. 그들의 대화는 그들의 삶처럼 공허하고 비어 있다. 그러면서 눈에 띄는 것은 청년들도 30대 아저씨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후속 문학을 채워주고 있는 분노와 전투적 증오는 낌새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작가의 사회의식의 박약 탓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분노와 전투적 증오가 노출되어 있는 작품들에 식상한 눈으로 볼 때 <서울, 1964년 겨울>이 보여주고 있는 비정적 초월은 신선하고 기능적이다. 비정적 초월을 통해 세상살이의 객관적 묘사는 더욱 견고한 것이 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의 인간의 고립과 소외라는 큰 주제가 이 작품에서 짤막하면서도 섬세한 구체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3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 '슬픈 도회의 어법', 유종호, <무진기행 外>, 동아출판사, 1995
작가의 말
한 학기 등록금을 마련할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면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생명연습>이 당선된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사회적 신분에 대한 나의 포부를 바꾸게 해버린 것은 전연 뜻밖의 일이었다. 허기야, 당선된 이후 그러니까 대학 3학년 이후부터의 내 생활이 나로 하여금 소설 쓰는 일에나 재미를 붙일 수밖에 없도록 나를 몰아세우지 않았더라면 신춘문예쯤 당선됐다고 계속해서 원고용지 앞에 엎드려 있지는 않았을 것을 생각하면 엉터리 소설 <생명연습> 또는 한 학기 등록금을 원망할 이유는 없다. 이젠, 한국 문단의 계관(桂冠)이라는 ‘동인문학상’까지 받아 놓았으니 끝장이 날 때까지 ‘쇼’를 계속해야 할 모양이다. 그러나 손님들이 웃지 않는 때가 오면 언제든지 집어치워버릴 각오를 하고 있다. 나의 이 얘기가 너무 무례하고 너무 무책임해 보일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세상에는 타인에 의해서 자기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바로 거기에 속해 있는 것이다. 좀 용기를 내어서 얘기한다면, 우리 세대, 이어령 씨가 말하고 있는 ‘제삼시대’의 사람들은 모두가 거기에 속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외계에 재빠르게 반응할 뿐이지, 무엇인가를 내부에서 만든 후에 그것을 외계에 대하여 밀고 나갈 줄을 모르는 족속 같다. 왜 우리에게라고 내부에 생기는 무엇이 없겠는가. 다만 옛날 사람들처럼 우직하지가 못할 뿐이다. 우리에게 던져진 먹이는 다만 단순한 의미에서의 ‘생활’뿐이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들의 그 ‘생활’을 유지시켜주는 것을 구태여 찾자면, 우리의 일부에게는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도 낯설어 했던 기독교적 정신 또는 합리주의가, 일부에게는 배금사상이, 일부에게는 상업공부를 한 민족주의가 그것들이다. 생활하기에는 그만한 것들로써도 충분한 것이다. 우리가 차라리 행복한지도 모른다. 어느 때보다도 타인과 자기를 합일시키려 하고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고독하다는 이유로써 말이다. 고독한 자들은 많은 것을 탐내지 않는다. 남을 가르치려 하지 않고 남에게서 배우려고 할 분이다. 항상 등 뒤엔 깊고 물살 빠른 강물을 두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필요한 때는 언제든지 소설 쓰는 일을 그만둔다는 생각을 행복한 느낌의 부축을 받아가며 한다. 최근 나는 몇 군데 신문에 제법 강경한 투의 글을 씀으로써 패기만만한 신인처럼 행세한 ‘쇼’를 부렸다. 요즘 나는 그것에 대한 외계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 그 반응에 의해서 또 나는 나를 만들어 갈 것 같다. 무척 쓸쓸한 기분이 되어 기다리고 있다. 혹시라도 요란한 박수소리가 내 주변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므로 이 쓸쓸함은 견디고 있어야겠지. 이 책이 백만 부쯤 팔림으로써 창우사의 황사장님께 폐를 끼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후기’,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창우사, 1966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장석주, 시공사, 2000 <김승옥 문학의 감수성과 일상성>, 김명석, 푸른사상사, 2004 <한국 현대소설의 시각>, 장수익, 역락, 2003 <한국 소설과 근대성 담론>, 김정남, 국학자료원, 2003 <작가와 작품을 찾아서>, 강인수, 푸른사상사, 2003 <한국현대작가연구>, 김상태 외 편저, 푸른사상사, 2002 <한국소설과 근대적 일상의 경험>, 김명석, 새미, 2002 <환멸의 세계, 매혹의 서사>, 김민수, 거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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