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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지

작품명
분지
저자
남정현(南廷賢)
구분
1960년대
작품소개
개요 1965년 3월 <현대문학>에 발표된 남정현의 단편소설. 이 작품은 최종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고백하듯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는 서신 형식의 글이며, 당대의 현실을 비유 또는 알레고리의 방법으로 비판, 풍자하고 있다. ‘분지’라는 제목 그 자체가 암시하고 있듯이 우리나라를 더러운 땅으로 규정하고, 간사, 아첨 등이 팽배하고 가진 자의 추태가 만연한 오물의 땅으로 풍자한다. 그리고 거대한 힘으로 약자를 제압하려는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내용 주인공인 ‘만수’는 홍길동의 10대손으로서 의기 있는 인물이다. 그는 어머니, 여동생 분이와 함께 광복을 맞이한다. 독립군인 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머니는 광복을 맞아 아버지가 돌아온다기에 무척 기뻐하며 태극기와 성조기를 갖고 무슨 환영대회에 나갔다가 미군 병사한테 강간을 당하고 돌아온다. 얼마 후 어머니는 그 정신적 충격으로 미군을 저주하며 죽는다. 만수와 분이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가난한 외가에서 살게 되었다가 한국전쟁 때문에 뿔뿔이 흩어진다. 만수는 군복무를 마치고 나왔지만 살길이 막막하여 걸식하며 방황한다. 어느 날 누이동생 분이를 만나는데 그는 스피드 상사의 첩 노릇을 하고 있었다. 만수는 억울하고 분했지만 스피드 상사에 의탁하여 미군물품 장사를 시작한다. 그러던 중 스피드 상사의 진짜 부인 ‘비취’가 오자, 만수는 그녀를 향미산으로 유인하여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설명한 후 강간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펜타곤 당국이 그를 최대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가 숨어든 산을 포위한다. 만수는 지역구 출신 민의원에게 솔직히 고백하고 구명을 요청해 보지만 민의원은 오히려 그를 엄중히 징벌할 것을 국회에 호소한 뒤였다. 그는 어머니의 영혼에 자신의 사연과 잘못된 현실을 호소한다. 그러나 그는 향미산의 폭발이 임박해 와도 조금도 겁내지 않고 펜타곤 당국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을 것을 다짐한다.
저자
남정현(南廷賢, 1933~) 1933년 12월 13일 충남 서산 출생. 서산 농림고교를 졸업하고 단편 <경고구역>(1958), <굴뚝 밑의 유산>(1959)을 <자유문학>에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모의시체>(1959), <기상도>(1961), <너는 뭐냐>(1961), <혁명후기>(1964), <분지>(1965), <허허선생(許虛先生) 1~3>(1973~1980)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투철한 현실인식과 집요한 작가정신으로 시대 현실 전체의 모순을 예리하게 파악하여 고발, 풍자하였다. <너는 뭐냐>, <분지>, <허허선생> 등 그의 대부분의 소설들은 현대인의 전도된 가치관과 모순된 정치·사회현실, 허위의식 등을 과장법, 반어법, 알레고리, 풍자 또는 그로테스크한 환상적 기법으로 서술하였다. 특히 1965년에는 작품 <분지>가 한국 현실을 왜곡, 풍자하여 반공법에 저촉되었다는 명목으로 당국에 의해 구속되었다가 1967년 선고유예 판결로 석방되었다. 이 필화 사건 이후 한동안 작품활동이 위축되었다가 1969년 <허허선생>을 발표하였다.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5개월 가량 복역하였다. 창작집 <너는 뭐냐>(1965), <굴뚝 밑의 유산>(1967), <준이와 3개월>(1977), 장편 <사랑하는 소리>(1978) 등을 간행하였다.
리뷰
남정현은 우리 문학사의 ‘알레고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그는 군사독재정권이라는 괴물과의 싸움을 자신의 문학적 화두로 삼은 지 30년이 넘게 일관된 작품세계를 지켜오고 있다. 그의 작가 연보는 이렇게 시작된다. “1933년 충남 서산군 서산읍 동문리에서 태어남. 그 후 계속 갖가지 질병에 시달린 것 이외에는 아무런 경력이 없으며 솔직하게 말해서 지금까지 책 한 권을 제대로 끝까지 다 읽어 본 경험이 없음.”(<분지>에 실린 연보 중에서) 그보다 일찍 나온 다른 연보는 좀더 재미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는데, 그는 국민학교 3학년 때 자칭 신령이라는 어느 노인의 꾐에 빠져, 그와 함께 유랑걸식하다가 한만 국경 근처에서 순경에서 붙들려 고아원에 수용된 일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특이한 이력은 한국소설사에서 남정현 문학의 위치와 특성을 아는데 조금은 도움을 준다. 즉, 그는 근대적 교양인으로서의 문학자로 성장하기보다 사회문화적 이단의 분위기 속에 성장했다는 점이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거침없는 현대성 비판, 이야기꾼적 상상력, 원초적 생리작용 묘사 등은 서구문학의 절대적 영향 속에 자라난 우리 근대소설의 전통 속에서는 좀 낯설어 보인다. (……) <분지>의 주인공 홍만수는 홍길동의 10대손을 자처하는 인물로서, 어머니와 여동생 분이와 함께 해방을 맞는다. 그러나 독립투사인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고 어머니는 미군에게 강간을 당해 충격을 받은 끝에 미쳐서 죽는다. 625 중 군복무를 마치고 암담한 생활 속에서 만난 누이동생 분이가 미군상사 스피드와 동거생활을 하고 있음을 안 만수는 통곡했지만, 오히려 스피드 상사에게 의존하여 미군 물품 장사를 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스피드 상사는 밤마다 분이를 미국의 본처에 비교하며 폭언과 학대를 일삼는다. 이후 그 아내가 한국을 찾아오자 만수는 그녀를 향미산으로 유인하여 겁탈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안 펜타곤 당국은 정예 사단과 미사일을 동원하여 향미산을 포위하고 학살하겠다는 방송으로 주변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 만수는 이제 위기의 순간 앞에서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 자신의 처지를 호소한다. 이상의 줄거리만 본다면 이 소설은 단순하리만치 반미적이고 도식적인 정치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독특한 문학사적 가치는 위기의 순간 앞에 선 만수가 여유만만한 능청스러운 어조로 토해 내는 비판적 사설보다도 오히려, 그의 행위를 극단적으로 몰아 온 유년과 청년의 기억들이 가진 무게, 성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가 주는 고통스런 충격과 해방의 느낌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어머니를 사랑하면서도 잊고자 했던 음부의 기억 때문에 시달렸던 그는 결국 그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누이에 대한 미군의 학대를 계기로 잠재되었던 분노를 행동화시킨다. 그러나 소설 표면에서 그의 행위는 궁금한 문제를 풀어보고야 말겠다는 지극한 합리성을 가장하고 있을 뿐 분노나 저항의 의미는 담담하고 능청스러운 어조 속에 숨겨 있다. 이 담담한 어조와 과장된 진술의 혼합, 능청스럽게 토해 내는 고통스러운 기억의 그로테스크한 묘사의 적나라함은 일찍이 우리 소설사가 갖지 못했던 풍자적 위력을 이 소설에 부여한다. “앞으로 단 십 초. 그렇군요. 이제 곧 저는 태극의 무늬로 아롱진 이 러닝샤쓰를 찢어 한 폭의 찬란한 깃발을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구름을 잡아타고 바다를 건너야지요. (……) 자, 보십시오. 저의 이 툭 솟아나온 눈깔을 말입니다. 글쎄 이 자식이 그렇게 용이하게 죽을 것 같습니까, 하하하.” 이렇게 끝나는 그의 웃음 소리는 표면적으로는 한 과대망상적 인물의 웃음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 바탕에는 한국현대사의 식민지성, 파행성을 청산 하고 새로운 역사를 세우고자 하는 웅혼한 꿈과 기상을 담고 있다. 그러나 <분지>와 함께 절정에 달했던 남정현의 소설세계는 ‘필화사건’의 가혹한 시련을 계기로 또 다른 모색의 길을 찾게끔 된다. 1973년 <문학사상>에 발표한 <괴물체>를 <허허 선생 1>로 개제(改題)한 이 후, 그는 ‘허허 선생과의 피나는 대결시대’를 20여 년간이나 계속해 결국 1993년 연작소설집 <허허 선생 옷 벗을라>를 내기에 이른다. ‘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에 그것에 도전했던, 우리 문학의 가장 무서운 금기에 저항하면서 현실의 본질을 드러내려 했던 남정현의 소설세계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텨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얼마간 ‘일보 후퇴’의 모습을 띠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남정현의 풍자소설은 풍자문학 일반의 특성을 고루 가지면서도 그만의 개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개성은 내용 즉 풍자의 방향 면에서 민중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뒷받침되어 있다는 것과, 독자를 압도했던 <분지>가 가진 이 풍자와 그로테스크의 결합, 대담한 표현에 비교해 볼 때, <허허 선생> 연작에서 우선 두드러진 변화는 이 그로테스크의 약화이다. 물론 표면상으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괴물체와 같은 집의 묘사에서부터, 걸핏하면 벌어지는 지하궁전의 잔치 장면, 허허 선생에 대한 의료행위랍시고 벌이는 황당한 ‘가스분석’ 장면 등 추하고 기괴한 것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그저 우스꽝스러운 일화의 제시에 그칠 뿐, 강렬한 증오의 표현으로서 추하고 기괴한 것의 묘사가 노리는 혐오감의 효과를 자아내지는 못한다. (……) 남정현의 문학을 배태했던 ‘알레고리의 시대’ 즉 권위주의적 독재정치의 시대는 과거의 역사가 되었다고 단언해도 좋을 것인가. 그래서 이제 남정현의 그 치열한 현실대결적 소설들 역시 문학사의 일부로 넘겨졌다고 해도 좋을 것인가. 1990년대의 풍자는 이제 비애와 증오로 뭉쳐진 강력한 무기가 아니라 냉소와 방관의 시선들이 즐겨 찾는 베스트셀러의 반열로 옮겨갔다. 자본의 위력은 ‘정치 풍자’마저도 값나가는 상품을 만들고 심지어 ‘어용 풍자’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된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남정현 문학이 가지는 근원적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선악의 가치 자체가 무화되지 않는 한, 세상의 부정성에 대한 체험이 존재하는 한, 풍자의 위력 역시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변화된 현실, 진정한 풍자정신마저 조롱하는 문화현실까지도 풍자의 대상으로 흡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남정현의 소설들에 나오는 병신스런 인물들의 웃음이 감추고 있는 칼날의 위력이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가장 강력한 웃음의 칼날’, 임진영, <분지>, 동아출판사, 1995
작가의 말
제아무리 재주를 부려봐도 글을 쓴다고 하는 행위는 인간을 사랑한다(휴머니즘)고 하는 그 크고 빛나는 테두리를 좀처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글이란 결국 인간을 기쁘게 해주기 위한 작업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인간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는 부득불 그 인간이 지금 놓여 있는 상태, 즉 인간이 생존하고 있는 그 구체적인 현실이 늘 문제로 제기되지 않을 수가 없으며, 동시에 그 현실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그 구조와 내용 등이 큰 관심사로 등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말하자면 일상적으로 인간의 행·불행에 큰 영향력을 행사는 현실의 메커니즘을 옳게 이해하지 않고는 도대체 인간을 어떻게 사랑해야 좋을지 그 방법이 막연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란 얘기다. 그러나 밤낮없이 짙은 흑막 속에 싸여있는 이 복잡다단한 현실의 전모를 이해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의 전진을 가로막는 부당한 세력들은 으레 자신들의 지배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현실을 교묘하게 위장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들의 흉계가 드러나지 않게끔 그들은 쉬임 없이 진실을 날조하고 은폐하는 것이다. 그런데 글을 쓴다는 것은 이 은폐된 진실을 찾아내어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감행되는 현실과의 가열한 싸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물론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하여 꿈(理想)의 세계를 표현하곤 하는 것이 작품의 일반적인 습성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꿈의 발원지는 어쩔 수 없이 현실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모순에 찬 현실을 휘황한 꿈의 세계로 끌어 올리려는 인간의 간절한 염원이 진하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글의 토대가 되어 주고 있는 현실과의 싸움 또한 그렇게 용이한 일이 아니다. 역사를 오도하려는 어이없는 무리들은 ‘진실’에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그 통로의 요소요소에다 높은 담장을, 즉 갖가지 형태의 장애물을 설치하고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는 탓이다. 그렇다고 인간을 사랑하기 위한 그 숭고한 작업을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을 억압하는 일체의 기반에서 완벽하게 해방되려는 인간의 그 절절한 소망에 항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글을 쓰는 사람들은 그 장애물을 극복하고 담장을 뛰어넘어 진실과 만나려는 수단으로서 상징이란 이름의 아주 효과적인 무기를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 이 ‘상징’이란 이름의 절묘한 수사기법이야말로 오늘날과 같이 엄혹한 현실에서도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아주 요긴한 힘이 되어 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상징을 하되, 도대체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 어떻게 상징을 해야만 될수록 많은 사람들에게 작자의 뜻이 잘 전달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가 늘 나의 머리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것이다. 어느 대상을 극도로 상징하면 일종의 암호가 될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불행하게도 극히 좁은 범위에서만 통용이 되는 이 암호로는 글을 쓸 수가 없다. 글(작품)에 있어서의 상징적인 표현이란 가능하면 같은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동시대인들 사이에서는 서로가 별로 힘을 안 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러한 성질의, 아니 그러한 수준의 상징적인 언어를 편의상 나는 우리 시대의 ‘표준어’라고 부르고 싶다. 그런데 작가로서의 나의 능력이 너무나 부족한 탓인가. 그동안 나는 글을 쓸 수 있는 소위 그 우리시대의 ‘표준어’를 발견하기 위해 참으로 오랜 세월 글 한자 쓰지 못하고, 끊임없이 현실과의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무던히 애써봤지만, 섭섭하게도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가 없는 것이다. 답답한 일이다. 이렇듯 숨이 찰 정도로 답답한 판에 새로 쓴 글이 없어서 이렇게 오래 전에 쓴 묵은 글들만을 모아놓고 보니 그 됨됨이가 도무지 글 같지가 않아서 더욱 답답한 느낌이다. 그러나 이것이 일종의 자극제가 되어 늘 벼르고만 있는 나의 이 빛나는 구상을 한번 황홀하게 펼칠 수 있는 계기가 혹시 마련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 구석에서는 문득 잔잔한 흥분이 일기도 한다. (……) ‘우리시대의 표준어를 찾아서’, 남정현, <분지>, 도서출판 한겨레, 1987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장석주, 시공사, 2000 <분지>, 남정현, 동아출판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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