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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례기

작품명
분례기
저자
방영웅(方榮雄)
구분
1960년대
작품소개
개요 1967년 <창작과비평>에 발표한 첫 작품이자 대표작. 표현 방법의 토착화, 드라마의 원색성(原色性), 간결한 문장, 대담한 성(性) 묘사 등 많은 문제성을 내포한 작품으로 당시 문단의 화제는 물론, 장기간에 걸친 베스트셀러였다. 충청도 예산지방의 어느 시골을 모델로 했다는 이 작품은 한국농촌의 전근대적인 풍속, 생활양식, 그리고 전설·속담 등이 다채롭게 활용되고 있으며 용팔·콩조지·호랑할매 등,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등장인물들의 전형성(典型性)이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다. 토속적(土俗的) 니힐리즘에 입각한 시골 사람들의 불쌍한 생활양식을 시적(詩的)으로 표현한 수작으로 평가된다. 내용 어머니 석서방댁이 변소에서 낳았다 하여 똥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분례는 먼 친척인 용팔이와 나무를 하러 다니다 그에게 겁탈을 당한다. 그녀는 같은 동네 봉순이가 혼인을 앞두고 겁탈을 당하고는 목을 맨 것을 보고 자신도 죽으려 하나 용팔의 만류에 마음을 돌려먹는다. 노름꾼인 똥예의 아버지는 전문적인 노름꾼인 영철의 어머니 노랑녀의 구슬림에 넘어가 똥예를 영철에게 시집보낸다. 혼인만 네 번을 한 영철은 똥예를 돌보기는커녕 노름에 열중할 뿐이다. 어느날 영철은 노름판에서 큰 돈을 따 돌아오지만 다시 노름에 빠진다. 생사를 건 판을 이기기 위하여 맡겼던 돈을 가지러 온 영철에게 똥예는 죽을 지경으로 얻어맞고서야 돈을 내주지만, 돈을 몽땅 잃고 좌절감에 빠진 영철에게 서방질을 했다는 의심을 받고 쫓겨난다. 그녀는 과수원에서 다시 겁탈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실성하여 집을 떠나고 만다.
저자
방영웅(方榮雄, 1942~) 1942년 7월 20일 충남 예산 출생.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7년 장편소설 <분례기>를 <창작과비평>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이후 단편 <사무장과 배달원>(1968), <바람>(1969), <오늘밤의 결판>(1969), <방구리댁>(1970), <꽃놀이>(1972), <성불하는 마음>(1973), <무등산>(1974) 등과 장편소설 <달>(1971), <살아가는 이야기>(1974), <박힌 돌 뽑힌 돌>(1980) 등을 간행했다. 그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이기도 한 <분례기>는 전편에 걸쳐 농민들의 삶과 그 생명력을 토착적 분위기를 통해 사실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초기 민중소설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 후에 발표한 장편 <달> 역시 토속적인 전설세계를 배경으로 비극적인 간통 사건을 그린 작품이다. 1969년 <달>로 제2회 한국창작문학상을 수상했다.
리뷰
(……) 방영웅의 힘은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체험에서 온다. 그는 온갖 떠돌이들과 밑바닥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터를 중심축으로, 예산읍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결코 온실에서 곱게 자란 화초는 아니다. 그것이 그의 강점이고, 민중작가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원동력이다. 온실에서 자란 화초는 조그마한 변화에도 견디지 못하고 쉽게 지지만, 야생화는 인고의 세월을 견디면서 내성을 키워 갈 수 있다. 야생화처럼 밑바닥 삶을 체험하면서 자란 그에게 가난과 실패는 고통으로 느껴질지언정, 절망적 상황으로 인식되지는 않는다. 차라리 그것은 타성화된 일상성에 불과하다. 공간적 배경이 예산인 <분례기>의 주인공이면서 하찮게 태어나 그렇게 살아가는 그녀의 어머니 석서방네의 타성에 젖은 삶은 작가의 예산 체험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 작가의 예산 체험은 한국인의 숙명적 삶에 바탕을 둔 것이다. 작가의 체험은 그의 소설 속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분례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가난을 숙명으로 알고, 신의 섭리대로 살아간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가려는 의지를 보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석서방 내외는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서도 천하태평이다. 석서방은 집안 일에는 관심이 없고 술집이나 노름방을 전전할 뿐이다. 석서방네도 방에 틀어박혀서 배가 고파서 우는 아이들을 때려 주고 담배를 빨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내일에 대한 불안감이나 미래에 대한 절망감을 보여 주지 않는다. 자기의 밥줄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온다는 속설과 자식을 여섯 명이나 두고 있어서 그런지 모른다. 사실 그들은 자식을 노동력으로 생각하고 있다. 때문에 똥예는 집안일도 하고 나무도 하러 다닌다. 그녀는 늘 분실이와 봉순을 부러워한다. 분실이는 최참봉의 손녀로, 그 고장의 유지인 백씨의 막내아들과 혼인할 처녀이다. 봉순은 길남으로부터 혼인말이 들어와서, 일도 하지 않고 집에서 자수를 놓고 있는 똥예의 친구이다. 똥예는 분실이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봉순을 부러워하여 봉순네 집에 가서 자수를 배운다. 고자로만 알고 지내던 아저씨뻘 되는 용팔이로부터 처녀성을 잃고도 그것을 감수하고, 자신도 빨리 혼인말이 오고 가서 나무를 하러 다니지 않기만을 학수고대한다. 그녀 역시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간다. (……) <분례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빈민들이다. 작품 초반부의 문풍지가 파르르 떨리는 방에서 여섯 명이 떨어진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풍경은 빈민들이 사는 모습을 가장 인상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대목이다. 분실이 할아버지인 최참봉이나 그 고장의 유지인 백씨와 같은 부유층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유층은 빈민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거나 부러움의 대상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누구도 그들의 부귀를 탐내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분실이에게 부러움을 느낀 똥예의 뇌리에 스쳐 지나갈 뿐이며, 이 작품의 중심구조와 전혀 무관한 인물들이다. 빈민들이 작품의 중심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작가가 그들에게 애착을 갖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왜 작가는 빈민들에게 그토록 애착을 갖는 것일까? 자신의 지나간 삶에 대한 추억 때문인가? 아니면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제재를 끌어온 때문인가? 물론 그 답을 정확히 내릴 수는 없다. 그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 기인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도시 빈민촌 체험은 금호동에서 시작된다. 그의 가족은 1956년 상경하여 금호동에 거처를 정하고, 그곳에서 10여 년을 살았다. 여기에서 그는 이발사, 리어카꾼, 막걸리 배달부, 구두닦이, 출판사의 외판사원, 식당의 고용원, 늙은 갈보, 대폿집 작부, 남대문시장의 행상, 약방 주인 여편네, 식모 등을 만나고,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다. 금호동의 체험은 1970년 이후의 많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이 된다. 그런데 도시 세태를 다룬 소설에서도 작가는 그들의 비참한 삶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가는 야생화 같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 많은 선배작가들 가운데 그가 가장 영향을 받은 작가는 김유정이다. 예산 체험과 도시 빈민촌의 체험이 김유정의 문학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고, 거기서 문학화의 가능성을 확인했는지도 모른다. 김유정의 <동백꽃>, <소낙비> 등에 등장하는 순박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바로 그 자신이 체험한 바와 너무 흡사했다. 따라서 자신의 삶과 김유정의 작품이 어우러져 <분례기>를 낳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 <분례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이웃에 따뜻하고 동병상련을 앓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가부장제적 질서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남성들은 여성들이 자신들과 동등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여성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철저한 보수주의자들이다. 영철은 장가겟집 아들로, 노름꾼이다. 그는 여러 차례 결혼을 했다.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심하게 구타를 해서 가차없이 쫓아냈다. 그러한 행위를 그의 외할머니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심지어 본인이 나서서 손주며느리를 못살게 굴곤 했다. 똥예도 그러한 희생자의 한 사람이다. 남편은 신이나 전제 군주와 같은 존재이고, 아내는 언제나 남편의 말을 신의 말로 여기고 따라야 한다. 특히 여염집 여인들은 정조를 생명으로 알고 살아야 한다. 정조를 잃은 여인은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을 해야 한다. 자살하지 않으려면 용팔의 처 병춘처럼 목숨을 걸고 정조를 지켜야 한다. 그런데 똥예는 용팔이 아저씨에게 순결을 빼앗기고도 자살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윤리의식을 지니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녀도 처음에는 자신을 저주하고 죽을 작정도 해보았다. 그러나 ‘얘 뭘 죽니, 죽지 마’라고 한 찔레의 속삭임과 ‘지난 겨울에 폈던 꽃이 지금 또다시 폈잖여’라고 한 용팔의 말에 슬그머니 마음을 고쳐 먹고 험준한 산길을 타고 신랑 점을 치러 향천사로 향해 버린다. 고자를 따라 나섰다가 고자에게 당한 똥예의 비밀은 고자인 용팔과 자기 자신만의 비밀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삶의 애환을 꿋꿋하게 견디어 내는 건강성을 보여준다. 그러한 태도는 작품 말미에 이르러 삶에 대한 애착으로까지 발전해 간다. (……) 똥예, 용팔이, 병춘, 콩조지, 옥화는 서로 남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특히 똥예와 옥화는 일체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똥예를 겁탈한 용팔은 옥화가 낳은 아들을 주워다가 기른다. 옥화의 아들은 고자인 용팔과 살고 있는 병춘을 겁탈하려고 했던 콩조지가 옥화를 겁탈해서 낳은 아이다. 얽히고설킨 그들의 유대감 속에서 똥예의 운명은 어느 정도 점쳐질 수 있다. 똥예의 곁에는 언제나 광기와 죽음이 따라다닌다. 그녀를 좋아하는 철봉 가족은 모두가 천치들이고, 호롱골 사람들은 상엿집 옆에 기거하면서 항상 죽음을 가까이 하고 있다. 똥예는 상여를 타고 가는 자신을 연상하기도 하고, 시집가는 날 상엿집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기도 한다. 해산을 하고 찾아온 옥화를 씻겨 주기도 하고, 시집올 때 입고 온 옷을 옥화에게 주기도 한다. 이처럼 똥예의 광기는 작가의 가부장제적 체험에 의해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작가는 자연에 동화되어 원초적인 삶을 살아가는 민중상을 구현하고 있다. 이러한 민중상은 진정 방영웅적인 특징이다. 많은 작가들이 민중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왜곡시키거나 관념화시켜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한 점을 감안한다면, 그가 진정한 민중작가로 떠오를 수 있는 가능성도, 백낙청의 관심을 끈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그런데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낙관주의는 한국인의 생활 속에 도도하게 흐르고 있는 선비정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선비정신은 당장 때울 끼니가 없어도 책을 벗삼아 안빈낙도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만이 보여줄 수 있다. 그들에게 절망이나 좌절이란 있을 수 없다. 선비정신은 양반의 전유물이었으나, 그것을 오늘날까지도 유지해 오고 있는 것은 민중이다. 선비의 고고한 삶은 여성의 인고와 남성 중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때문에 페미니스트들로부터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남성 중심주의를 강조하거나 미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체험한 바 있는 진정한 민중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하여 그러한 인물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는 민중의 후예로 태어나 민중 속에서 자란 체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고 있는 진정한 민중작가이다. ‘체험의 소설화와 민중의 낙관주의”, 송현호, <분례기, 가자 우리의 둥지로 외(外)>, 동아출판사, 1995
작가의 말
<분례기>의 발표로 내 문학활동이 시작되었다고도 본다. <창작과비평>에 발표되었을 때의 독자들의 지지와 성원을 감사드리고 뒤에서 나를 걱정해주신 선배님들께 우선 인사를 드려야겠다. <분례기>는 삼부작으로 된 장편이다. 장소는 저자의 고향은 충청남도 예산으로 잡았고, 지명도 그대로 사용했으나,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거의가 실제 인물이 아니다. ‘콩조지’, ‘옥화’ 등은 실제 인물이지만. 저자가 어렸을 때 고운 새 상여(喪輿)를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의 인상은 아직도 강렬하다. <분례기>를 쓰게 된 동기는 아마 그런 데서 일어나지 않았을까? ‘똥예’란 똥처럼 천한 인간이고 운명적(運命的)으로 그렇게 되어버린 인간인데 그런 인간들은 이 땅에 너무나 많기 때문에 ‘똥예’란 이름을 가진 여인이 있다는 말을 연전에 들었을 때 나에게 무엇인가 꽉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똥예’란 이름 두 자를 두고 작품 하나는 충분히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다. 저자의 머리에 금방 떠오르는 것은 예의 새 상여였다. ‘똥예’는 새 상여에 대한 집념이 강할 것이 아닌가. 똥예와 새 상여를 연결해본 것이 <분례기>가 된 것이다. 애초 문학에 뜻을 두면서부터 문화풍토가 야릇한 이 땅에선 문학이란 예술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라는 결론이었다. 종교란 피눈물 나는 고행이 뒤따르는 법이지만, 그것이 견뎌볼 만한 것이라면 견뎌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그렇게 말한다는데 나도 어쩔 수 없이 문학을 할 운명이니까 한다는 그런 말밖에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잘 해봐야 할 게 아닌가. 나의 마음가짐과 노력이 앞으로 내 문학적인 성장을 결정해줄 것이다. (……) ‘후기’, 방영웅, <분례기>, 홍익출판사, 1968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한국현대문인대사전>, 권영민 편, 아세아문화사, 1991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장석주, 시공사, 2000 <분례기, 가자 우리의 둥지로 외(外)>, 방영웅, 동아출판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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