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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과 머저리

작품명
병신과 머저리
저자
이청준(李淸俊)
구분
1960년대
작품소개
개요 1966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발표된 단편으로 다음 해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한국전쟁의 체험에 대해 자연주의적이거나 관념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1950년대 전후소설을 뛰어넘어 새로운 소설적 지평을 열어 놓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소설은 6·25를 전쟁터에서 겪은 형과 그보다 어린 세대에 속하는 아우의 각기 다른 고민을 대조시키며 그려내고 있다. 극한 상황의 비인간성 속에서 자신에 대한 극도의 환멸을 맛보았던, 그리고 그 환멸에 대한 분출구로서 소설 쓰기를 택한 ‘병신’과 그러한 체험의 절실함도 없으면서 무기력하게 자신을 포기한 ‘머저리’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형국이다. 이로써 이 둘은 서로에게 반성적 계기가 되며, 그 아픔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이 된다. <병신과 머저리>는 이러한 내용과 아울러, 액자소설 양식이라는 독특한 형식, 논리적이고 정확하게 구사되는 문체 등으로, 이후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내용 외과의사인 형이 수술 중 한 소녀를 숨지게 한 후 병원 일을 팽개치고 소설을 쓴다고 틀어박히면서부터 화가인 ‘나’ 역시 화폭을 메우지 못하고 형이 쓰는 소설에 관심을 갖는다. 나는 사랑하는 여자 혜인의 청첩장을 앞에 두고 고민하고 있다. 혜인은 가난한 화가보다 장래가 확실한 의사를 택했고 나는 혜인을 붙잡지 못했다. 형은 6·25 중 오관모라는 포악하고 잔인한 중사와 늘 그에게 학대를 받아온 김일병과 함께 산중의 동굴에 낙오된다. 오관모는 부상을 입어 쓸모없게 된 김일병을 죽이고 탈출할 것을 제의한다. 형은 오관모의 잔인성에 불쾌해 하는 동시에 김일병의 무력감에 그가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관모의 행위에 대한 방관을 자기의 살인행위로 받아들이는 나약한 형에게 분노를 느낀 나는 형이 김일병을 죽여버린 것으로 형의 소설을 끝맺는다. 이튿날, 화실에 나타난 형이 내가 오랫동안 그리지 못한 혜인의 그림을 찢어버리고 혜인의 결혼식장에 간다. 집에 돌아온 나는 형 자신이 끝낸 형의 소설을 본다. 형이 죽인 것은 관모였다. 그러나 혜인의 결혼식에서 돌아온 형은 관모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나는 형의 아픔이 어디서 오는지, 아픔이 오는 곳이 없는 나의 환부는 어디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저자
이청준(李淸俊, 1939~) 1939년 8월 9일 전남 장흥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1965년에 <사상계> 신인상에 <퇴원>으로 당선되었다. 초기의 작품 <병신과 머저리>(1966), <굴레>(1966), <석화촌>(1968), <매잡이>(1968) 등에서는 현실과 관념, 허무와 의지 등의 대응관계를 구조적으로 파악한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발표한 주요작품으로는 <소문의 벽>(1971), <조율사>(1972), <떠도는 말들>(1973), <이어도>(1974), <자서전들 쓰십시다>(1976), <잔인한 도시>(1978), <살아 있는 늪)(1979) 등이 있다. 이 소설들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정치 사회적인 메커니즘과 그 횡포에 대한 인간정신의 대결관계이다. 특히 언어의 진실과 말의 자유에 대한 그의 집착은 이른바 언어사회학적 관심으로 심화되고 있다. 이청준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보다 궁극적인 삶의 본질적 양상에 대한 소설적 규명에 나서고 있다. <시간의 문>(1982), <비화밀교>(1985), <자유의 문>(1989) 등에서 그는 인간존재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의 의미에 집착을 보인다. 작가는 대표적인 1960년대 세대이면서도, 1970~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세계를 갱신하고 넓혀간 점이 주목된다. 그의 소설은 지적이면서도 관념적이지 않고, 세계의 불행한 측면들을 포착하면서도 그 이면을 냉정하게 응시하려 한다. 또한 그의 문장은 하나하나가 충일한 무게를 가지고 있다. 그는 작품집 <소문의 벽> 후기에서 소설 쓰기를 ‘자기 구제의 몸짓’이라 불렀다. 여기에서 자기를 구제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글쓰기의 의미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는 내외적 조건들에 대한 성찰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소설이라는 언어와 언어 그 자체에 관한 반성을 낳는다. 그의 소설에서 흔히 구사되는 액자소설의 기법이라든지 추리소설적인 요소, 또한 언어 그 자체에 대한 관심들은 이러한 반성적 사유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1967년 <병신과 머저리>로 제13회 동인문학상을, 1978년에는 <잔인한 도시>로 제2회 이상문학상을, 1985년에는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리뷰
(……) 의사이자 시인인 형은 수술 실패로 한 소녀를 숨지게 한 일이 있은 다음부터 병원 일을 그만두고 소설 쓰기를 시작한다. 형이 쓰는 소설은 6·25 때 패잔병으로 남아 있다가 동료를 죽이고 도망치는 형의 자전적인 이야기이다. 화가인 동생은 형의 소설에 이끌리면서 좀처럼 화폭에 붓을 대지 못한다. 여기에 혜인과의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가 보태어진다. 혜인은 동생에게 다가왔던 여인이지만 동생이 영영 문을 열어 줄 기미를 보이지 않자 형의 친구와 결혼하게 된다. 여기서 문제는 자기 일을 하지 못하고 자기 욕망을 발현시키지 못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형은 의사 일을 하지 못한다. 동생은 그림을 그리지 못할 뿐더러 혜인과 사랑을 나누지도 못한다. 그러나 하지 못하는 원인에 있어서 이 형제는 변별된다. 그것이 1950년대 젊은이와 1960년대 젊은이 사이의 세대론적 차이라고 읽혀지기도 했던 대목이다. 하지만 단순한 세대론의 문맥으로 그칠 것은 아니지 싶다. 최근작인 <가해자의 얼굴>(1992)을 읽고 든 생각이지만, 오히려 가해자와 피해자의 양자 논리를 맞세운 것이 아닌가 한다. 형은 한국전쟁 당시 동료를 살해하고 도망쳐 나왔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 현재 그는 수술을 하던 중 한 소녀를 죽게 했다. 물론 수술을 하지 않았더라도 위험한 목숨이었고, 그만큼 어려운 수술이었기에 경우에 따라서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형은 자기 현실을 온전히 가해자의 논리로 받아들인다. 자신이 바로 가해자임을 증거하기 위한 형의 행위는 두 가지다. 하나는 소설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소설 쓰기(자기가 관모를 총살하는 장면을 담은 소설)이고, 다른 하나는 거리를 지나다가 구걸하는 거지 소녀의 손을 일부러 밟는 행위가 그 둘이다(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동생의 화실에 들러 제작중인 동생의 화폭을 손가락으로 찢는 도발적인 행위가 세 번째일 수 있겠다). 게다가 형은 전쟁 이전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연적과 집요하게 싸웠던 인물이다. 이런 형의 특성은 자신이 가해자임을 승인하고 반성하는 것으로써 활력을 되찾고자 한다. 끝에서 다시 병원문을 열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물론 혜인의 결혼식장에서 자기가 죽였다고 생각했던 동료가 살아서 나타난 모습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부수적인 요인처럼 보인다). 반면 동생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는 현실에서 무기력한 예술가의 초상으로 제시되거니와, 스스로 원인도 알 수 없는 어떤 것에 의한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혜인이 마지막 고별 편지에서 쓰고 있는 것처럼 ‘환부다운 환부가 없는’ 환자이다. 이 병증은 <퇴원>의 주인공이 보이는 증상과 흡사하다. 서사적 수중에서 드러난 하나의 병인은 분명 혜인이지만, 스스로 그것도 아니라고 느낀다. 그러면 무엇인가. 아픔의 증상이나 원인이 비교적 명료했던 형과는 달리 동생의 그것은 안개 속에 가리워져 있다. 안타까운 피해자의 의식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나는 인간의 근원에 대해 좀더 생각을 깊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중략)…… 하여 에덴으로부터 그 이후로는 아벨이라든지 카인, 또 그 인간들이 지니고 의미하는 속성들을 논리 없이 생각해 보곤 하였다. ……(중략)…… 그러나 감격으로 나의 화필이 떨리게 하는 얼굴은 없었다. 실상 나는 그 많은 얼굴들 사이를 방황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혜인 이후 나는 벌써 어떤 얼굴을 강하게 예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직은 내가 그것과 만날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병신과 머저리> 중에서) ‘환부다운 환부가 없는’ 환자인 동생은 강한 예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만날 수 없는 처지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 안타까움의 비밀은 우선 혜인의 문제와 관련되지만, 보다 크게는 욕망과 행동,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스스로 패배자임을 자인하고 나선 낭만적 예술혼에서 찾아볼 수도 있겠다. 안타까운 심리적 동요만 있을 뿐, 형과는 달리, 현실과 화해하지 못하는 이 ‘머저리’ 같은 동생의 내면 풍경이야말로 초기 이청준이 거둔 웅숭깊은 문학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잃어진 것 때문에 상처받은 인물, 따라서 임상학적으로는 정확한 병인도 규명할 수 없는 비현실적 질환을 앓고 있는 인물을 그리면서 동시에 작가는 전통적인 장인의 세계에 몰입하기도 한다. <줄>(1966)의 줄 타는 광대, <매잡이>(1968)에서 매 부리는 곽서방, <과녁>(1967)에 나오는 궁사들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다. 이런 유형의 소설은 훗날에도 <서편제>(1976), <불먹는 항아리>(1977), <시간의 문>(1982), <지관의 소>(1990) 등등 일련의 예술가 소설들에서 되풀이되거니와, <병신과 머저리>에서 동생의 ‘안타까움’의 비밀을 벗기려 한 작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미 말한 대로 동생의 안타까움은 욕망과 행동,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로 인해 생긴 것이었다. 예술의 장인들을 이 같은 괴리를 비교적 극복한 사람들로 작가가 상정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진정한 예술가들이야말로 자기 예술작품의 끝닿은 지평을 통해서 자기의 삶을 온전히 발현할 뿐만 아니라 거기서 세상과 우주의 비밀스런 실체를 엿보고 가까이 갈 수 있는 존재들인 까닭이다. ‘환부다운 환부가 없는’ 환자들이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나서는 두 가지 방향- 이상 심리를 지닌 광기의 세계와 예술적 장인들의 세계- 은 결국 자기 내면의 탐색으로 요약될 수 있다. 크고 작은 이유거나 혹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유로 하여 현실에서 패배했다고 느끼는 자들의 내면 탐색이 이청준 초기 소설의 특징이다. (……) ‘틈의 고뇌와 종합에의 의지’, 우찬제, <눈길 外>, 동아출판사, 1995
작가의 말
(……) 내가 문학을 하게 된 동기랄까 하는 것을 꼽으라면 한 세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중에서도 다른 것을 다 포괄할 수 있는 한 가지만 꼽으면, 내가 촌놈이어서 시골에서 태어나 살다 보니 도회지로 옮겨오면서 갖게 된 어떤 절망과 동경 같은 것이 문학을 하게 된 동기가 된 게 아닌가 싶어요. 시골과 대비해서 생각할 때 나로서는 삶이 활발하게 실현되는 곳은 바로 도회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시골에서 자라나 중학교 때 도회지로 오면서 거기 끼어들지 못한다는 좌절감을 갖게 되었었지요. 이렇게 현실로 끼어들지 못하니까 말로라도 끼어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학의 동기를 이루게 된 것 같다는 말인데, 그러나 그 후로도 삶의 중심에 있지 못하다는 느낌은 좀처럼 버려지지가 않더군요. 어쨌든 이렇게 해서 문학을 하게 되었는데… 저는 작가는 필경 자기 시대를 쓰게 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자라면서 전쟁을 겪었고, 대학에 입학하면서 4·19를, 그 다음 해에 바로 5·16을 겪었는데, 한참 의식이 활발할 때 겪었던 이 두 사건의 의미를 지금 소박하게 정리해보면 삶에서 어떤 정신 세계가 열렸다가 갑자기 닫혀버린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 같아요. 20대의 분출을 사회적인 엄청난 힘이 방종으로 단죄하고 억압했을 때 여기서 갈등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죠. 이런 갈등 의식을 우리 세대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저는 가끔 이런 말을 하는데요, 즉 문학은 불행의 그림자를 먹고 사는 괴물이라고 말이죠. 삶의 압력, 현실의 압력이 가중되면 이걸 견뎌내려는 정신의 틀을 만드는 것, 이것이 문학활동이고 문학적 상상력이겠지요. 그러니까 행복한 시대에서는 새로운 문학의 틀이 만들어지지가 그만큼 쉽지 않지요. 물론 세상에 대해 말하면 문학을 필요로 하는 불행한 세상보다는 문학이 필요 없는 행복한 세상이 더 소망된다고 해야겠지만요…… (……) 전에 이상섭 선생은 내 소설이 관념소설이 아니라 의식소설이라고 지적했는데 이 견해에는 나도 동의합니다. 관념소설이란 관념 자체가 추구나 탐색의 대상이 되는 것인데, 내 소설은 표현이나 묘사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 때문에 신문에서 관념소설이라고 표현한 것이 널리 퍼지게 된 것 같아요. 나는 문학이란 삶의 언어적 존재, 언어적 실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존재를 인식하는 것 모두가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아요? 언어를 떠나서는 존재를 증명할 방법이 없지요. 그러니까 삶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것은 소설의 틀을 만들어가는 것과 맞먹는 일인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언어적 실체로 정착시키느냐라는 방법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런 데에서 소설 형태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이건 말하자면 삶의 양식에 대한 관심과 같은 것이겠지요. 여기서 전제되어야 할 노력은 말과 현실의 양면에서의 노력일 텐데요…… 현실로 들어가버리면 문학이 안 되고, 현실을 떠나서도 문학이 안 되는 것이고 보면 말과 현실을 오가는 운동의 긴장에서 문학이 생기는 것이라 해야겠지요. 이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쓴 적도 있는데, 비유적으로 말하면 시골에서 깜깜함 밤길을 가다가 사람을 마주쳤을 때 그 사람이 방금 앞에 사람이 지나갔다고 말해주어서 그 앞서간 사람을 쫓아가기까지의 과정이 바로 소설이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밤길이란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가는 암중행이니까 바로 삶의 모습과 통하는 것이겠지요. 이때 이 무서운 밤길에서 앞에 간 사람이 있었다고 하면 빨리 쫓아가 의지하여 같이 가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데, 이럴 때 앞에 간 사람은 현실의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마음속의 동행자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선행자를 만나버리게 되면 이때는 현실이 되어 더 이상 소설이 아니게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니까 소설이란 마음 속에서의 어떤 믿음과도 같은 것일 텐데, 이걸 관념이라 하면 관념이라 할 수 있겠지요. 또 달리 생각할 때 소설이란 하나의 문화적 기제이고 장치인 것인데, 현실 재현이라는 것과 관련해서 생각할 때 정신은 고도화될수록 추상화되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문학은 운명적으로 구체성을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그것도 문화적 장치의 하나이기 때문에 효과적 기호로 변하고 싶은 욕망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 결국 다시 강조하게 되는 것은 말과 현실 사이의 긴장인데, 이건 달리는 말에서 달아나는 짐승을 쏘아 맞추는 것에 비유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마찬가지로 삶도 움직이고 언어도 움직이는 것이죠. 어느 한쪽이 고정되어 있으면 그래도 쉽겠지만…… 말과 현실의 관계가 이렇게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시대의 고통에서 영혼의 비상까지(권오룡과의 대담)’, 이청준, <이청준 깊이읽기>, 문학과지성사, 1999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장석주, 시공사, 2000 <이청준 깊이 읽기>, 권오룡 편, 문학과지성사, 1999 <눈길 외>, 이청준 외, 동아출판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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