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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소년

작품명
바닷가 소년
저자
한남철(韓南哲)
구분
1960년대
작품소개
조그만 어촌 마을. 마을 사람들은 그날그날을 우선 먹고 살기에 바쁘다. 이 어촌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원수는 가난이요 굶주림이다. 이 작품의 중심 인물인 소년은 피난길에서 부모를 잃고 늙은 할머니와 둘이 살고 있다. 소년은 가끔 고향의 꿈을 꾼다. 꿈속에는 아버지 어머니가 있다. 그러나 지금 소년은 항상 배가 고프다. 늙은 할머니가 하는 밥벌이니 그럴밖에 없다. 그나마 소년의 주림을 메워 주는 것은 이 마을 사람들의 따뜻하고 순후한 인정이다. 최 노인, 이웃집 아줌마,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한결같이 소년과 소년의 할머니를 돌봐 준다. 그런데 소년에게 불행이 닥친다. 할머니가 앓아 누운 것이다. 최 노인을 비롯한 온 마을 사람들이 정성으로 살펴 주지만 소용없다. 할머니를 장사지낸 날 최 노인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넌 이제부터 혼자 살아야 돼. 이 다음에 네가 커지면 내가 왜 울었는지 알게 될 거다.”라고.
저자
한남철(韓南哲, 1937~) 1937년 10월 2일 경기도 인천 출생.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를 중퇴했다. 1958년 <사상계>에 단편 <실의>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이후 <사상계>, <동아일보>, <대한일보>, <월간중앙> 등에 재직하면서 <음지부조>(1960), <고도>(1960), <끊어진 다리>(1961), <귀로>(1962), <함정>(1964), <유산의 행렬>(1964), <별장이 있는 풍경>(1965), <단색화>(1965), <검은 파도>(1966), <청산유수>(1972), <연기>(1973), <길들이기>(1979), <손수레와 통소>(1980), <바닷가 소년>(1983) 등을 발표했다. 1959년에 발표한 단편 <강설>은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 갇힌 인간의 의식과 행동을 제시한 작품이다. 1970년에 발표된 <쥐전>은 인간세계의 내막을 들여다보는 쥐를 등장시켜서 한국사회의 추악상을 신랄하게 파헤치고 있다.
리뷰
(……) 한남철은 하나하나의 작품에서 일종의 새로운 모험을 되풀이해서 시도하고 있다. 아니 그의 작중 인물들로 하여금 새로운 모험을 되풀이해서 시키고 있다고 하는 편이 타당하겠다. 대부분의 그의 작품에 설정되어져 있는 작중 현실은 그의 작중 인물들로 하여금 모험을 유발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그러한 모험을 통하여 그의 작중 인물들은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바 개연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 설정되어져 있는 작중의 상황은 일종의 실험대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거기서 액션을 벌이는 작중 인물들은 효과적인 실험 대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물론 이 실험의 결과가 어떤 것으로 나타날지는 작가 자신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때로 플러스가 될 수도 있겠고, 때로는 마이너스나 제로로 나타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인간성이 간직한 개연성의 어느 한 면을 반영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리하여 그의 문학은 소재의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 하나하나의 작중 상황을 휴머니티의 개연성의 추구를 한 실험대라고 생각하는 작가에게 있어서, 그 작품들이 소재의 다양성을 보인다는 것은 오히려 필연적인 것이다. (……) 그런데 극한 상황을 다룬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과 병행하여 한남철의 작품들 가운데 한국적인 한 및 인정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 작품들을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바닷가 소년>, <별장이 있는 풍경>, <어둠의 숲>, <검은 파도> 등등이 이런 계열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극한 상황을 다룬 일련의 작품들이 철저히 픽션적인 작품들이라면, 이런 계열의 작품들은 작가 자신의 전기적 사실을 상당히 농후하게 반영하고 있는 작품들이 아닌가 한다. 이런 일련의 작품들의 중심 인물은 대개 어린 소년이다. 이런 작품들에는 작가 자신의 소년시절의 추억이 비교적 짙은 농도로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이런 작품들에는 한국 농어촌의 토속적인 분위기가 짙게 흐르고 있다. 순박한 시골 사람들의 따뜻한 인정이 흐르고 있고, 낡은 한국 사람들의 설움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이런 모든 요소들이 어울려 이런 계열의 배경이 도회적이고, 작중의 액션이 극한적이고, 그리고 강한 명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전자의 계열의 작품들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 <바닷가 소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매우 비참한 것이다. 그런데 그처럼 비참한 상황이 철없는 소년의 시선으로 전달되고 있기 때문에 보다 함축적인 여운을 풍겨 준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인생의 첫새벽을 처참한 설움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 한 고독한 소년의 모습을 본다. 그것은 곧 한과 인정 속에서 자신의 인생의 눈을 뜨기 시작하는 한국 소년의 모습인 것이다. <별장이 있는 풍경>의 중심 인물도 소년이다. 소년이 내레이터요 주인공이다. 이 소년의 마음 속에 심각한 상처를 주고 있는 것도 다름 아닌 빈곤이다. 소년은 가난한 대장간집 아들. 모두가 가난한 이 마을에 그러나 궁궐 같은 별장이 하나 서 있다. 일제 시대에는 군수를 지냈고, 해방 뒤에는 고관을 지냈다는 늙은 부호가 그 별장의 주인이다. 이 늙은 부호는, 사람도 먹기 힘든 고기만을 매일 먹는다는 개를 끌고 다닌다. 풍채가 좋고 인자해 뵌다. 불타 버린 교화당도 이 부호가 돈을 대어 지었다. 아이들이 별장에 찾아가니 과자를 준다. 교회당 낙성식 때는 어린이들에게 나눠줄 선물을 그득히 준비한 것도 이 늙은 부호다. 그런데 소년의 형은 그 늙은 부호를 나쁜 사람이라 욕한다. 그 늙은 부호는 지조를 팔았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한테서 과자를 얻어 먹는 것은 거지나 할 짓이라는 것이다. 소년은 형의 말을 물론 이해할 수 없다. 소년은 별장이 부럽고, 그 과자를 얻어 먹지 못한 것이 아쉽다. 소년은 형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째서 가난하냐고. 그런데 형은 대답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가난한 속에 “오히려 잘 산다는 게 이상한 노릇이지.”라고. 이 소년 역시 철이 없다. 깨끗한 가난과 더러운 부유를 이해할 수 없다. 그저 가난한 것만이 서럽고 원통하다. 이 소년의 설움은 곧 한국의 설움이다. 한 소년의 6·25의 기억을 회상의 형식으로 진술하고 있는 <어둠의 숲>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중 현실도 결국 앞서 말한 두 작품의 그것과 혈연을 같이하는 것이며, <검은 파도>에서 느끼게 되는 일견 음울하고 기괴한 분위기도 그 밑바닥에는 앞서 말한 설움이 깔려 있다. <검은 파도>에 있어서 넋 나간 듯한, 실성한 듯한 노인의 한밤중의 남모를 흐느낌에서 우리는 <바닷가 소년>의 할머니나 <별장이 있는 풍경>에 있어서의 이제는 고인이 된 할아버지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더구나 그 노인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정신적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은 바로 한국적 설움이다. ‘나’의 정신 내부에 중요한 비중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원통하게 죽은 동생에의 기억, 바다에 전 재산을 탕진하고 다시 복구하려는 꿈을 끝내 실현시키지 못한 채 원통하게 죽은 아버지의 기억…… 등등이다. 이 노인의 애절한 울음 속에서 ‘나’는 어떤 구체적인 좌절의 양상을 보는 것이요, 나아가서 자기 내부에 자리잡은 한의 실체를 보는 것이다. (……) ‘허구(虛構)와 생명(生命)’, 천이두, <현대한국문학전집 15>, 신구문화사, 1968
작가의 말
내가 쓴 글이 잘 됐든 못 됐든, 책으로 묶어져 나온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 어떻게 되었든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조금의 거짓 없이 말을 해 보자면 내가 작가라고 의식하기는 이 글을 쓰는 것으로 해서 두 번째 같다. 첫 번째는 나의 글이 처음으로 사상계 지상에 발표되었을 때하고 그 다음으로는 이렇게 지금 ‘작가의 말’이라는 것을 쓰고 있는 이 시간이다. 첫 번째의 의식이라면 현재의 나로서는 책임이 있을 리 없다. 신춘문예, 추천, 기타 현상 응모의 절차를 거쳐서야 작가라는 꼬리표가 들러붙게 마련인 이 땅에서, 그 당시의 내게는 만사가 일단 절차를 밟기만 하면 끝나는 것인 줄 알았다. 첫 번째의 흥분은 지속되는 시간이 그렇게 길 수는 없었다. 어린 시절의 과열된 흥분 상태와 고질화된 작단의 병폐(막연한 표현 같지만)는 곧 불협화음을 일으켰고, 절차라는 껍질을 벗기고 봐도 결국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나와 비슷한 연배의 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느꼈으리라고 나는 믿는 바이지만- 물론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식으로 탄생된 ‘작가’라는 이름이 나에겐 허망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타인에게 내가 소개될 때 ‘이 분이 소설을 쓰는 운운···’ 할 때마다 자리가 거북했던 경험은 아마도 이런 것에서 연유한 때문인지 모른다. 이런 감정은 또한 역으로 작용을 일으켜 내가 글을 쓰노라 자신에 벅찬 사람을 볼 때마다 역겨움을 느끼게 했다. 어째서 나는 작가라는 것인지, 이 땅에서 과연 어떤 것이 작가인지, 단순한 상태에서도 나는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런 감정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또 세월은 흐르고, 해마다 몇 편씩 소설이라는 명목으로 글을 써 온 것이 지금까지 이르는데, 아직도 내게는 ‘작가’라는 이름이 붙어 있음을 문득문득 생각할 때마다 나는 곤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글을 썼다는 그 물리적 동작만이 사실이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 다음의 일, 내가 쓴 글이 작가가 쓴 글이기 때문에 ‘소설’로 통한다는 이 공신력만은 내 입장에서는 사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너는 작가라는 이름으로 통하고 있느냐를 따져 묻는 분이 만약 있다면 할 말이 없다. 그래도 구태여 말을 하라면 궁여지책에서가 아니라 담담하게 이렇게밖엔 할 말이 없다. 즉 “나도 모르겠다.”- 이 말이 내가 ‘작가’라는 분들을 도저히 존경하지 않는다는 말로 오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 역시 작가를 무한히 존경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다. 되풀이 주장하거니와 나는 진정한 ‘작가’를 존중한다. 아마 나에게 용기가 부족한 것인지도 몰라……. 양심에 꺼리는 일을 단호하게 거부하지 못하고 늘어져서 끌려온 나의 처사를 비난할 분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머리를 들 때마다, 그 책임이 전적으로 내게만 있다는 생각이 안 되는 강한 반발이 또한 내 한구석에는 있어왔다. 어째서 나를 이런 엉터리 없는 일에 종사시키도록 주위는 나를 허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나 혼자만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이 공범관계가 왜 지속되고 있는가이다. 만약 이 땅에 진정한 문학 풍토를 조성하기 위한 공범 관계라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할 공범 관계라면, 그런 대로 낯가죽을 두꺼이 하고 참아 낼 배짱이 내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것이 진통을 위한 몸부림이라기에는 너무나 모든 것이 허술하기만 해서 나는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이 땅의 ‘작가’가 사회의 관심 밖에서 겉도는 현상은 이것을 웅변으로 말해 주는 사례인지도 모르겠다. 소위 처녀작이라는 것을 발표하고 가당치 않게도 ‘작가’라는 것을 의식했던 철없는 흥분이 가라앉은 후 지금까지 내가 누린 ‘작가’라는 위치(이런 것이 있었다고 하면)는 이렇게 내용 없는 것이었고, 그것은 내가 원고지를 앞에 놓고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만약 내가 글을 쓸 때 ‘작가’라는 것을 순간적으로라도 느낀 적이 있었다면 그것은 순전히 무의식 중에 저지른 방자스런 처사라고 밖엔 변명할 길이 없다. 그리고 두 번째 내가 ‘작가’를 거짓없이 의식하고 있는 것은 지나온 일을 그나마 반성하고 앉았는 이 ‘작가의 말’을 쓰고 있는 지금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쓰고 난 다음에는 다시 이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어버릴는지 모른다. 곰곰 생각을 해 보니 그렇게 될 공산이 큰 것 같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내가 사기를 한다고 주장하는 이 글을 쓴다는 작업을 앞으로 계속할 공산이 크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책임한 작가’, 한남철, <현대한국문학전집 15>, 신구문화사, 1968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바닷가 소년>, 한남철, 창작과비평사, 1992 <현대한국문학전집 15>, 한남철 외, 신구문화사,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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