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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극장

작품명
무너진 극장
저자
박태순(朴泰洵)
구분
1960년대
작품소개
개요 창작집 <무너진 극장>에 수록되었다. 4·19 혁명을 맞은 청년이 행동 대열에 끼었다가 자기 각성을 하는 이야기이다. 작가의 사회적 관심과 그 내적 반응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내용 4·19 데모 때 무장경관에게 부상당한 몇몇 젊은이가 역시 그날의 데모로 희생당한 친구의 묘를 찾는다. 그들은 삶의 성숙과 자유와 정의, 그리고 죽음을 거의 같은 시기에 경험하게 된 것이다. 묘지를 벗어난 일행은 부상자가 누워 있는 병원으로, 대학 캠퍼스로 돌아다니다가 부정을 규탄하는 대오와 어울려 원이 경영하는 극장의 파괴에 가담한다. 극장은 산산조각이 나고 화염에 휩쓸린다. 비록 악의 질서이고, 구질서일망정 질서는 여지없이 파괴되고 무질서를 틈타서 절도와 폭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이윽고 주인공 나만 혼자 남게 되었고 밤은 점점 깊어 간다. 격렬했던 행동의 시간으로부터 나는 마침내 회의와 반성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과연 이 밤은 지나갈 것인가? 사람들이 아픔을 느끼며 희구해 마지않았던 새날은 찾아올 것인가?’ 세상이 바뀌어 버린 26일, 나는 막상 피곤하여 잠만 잤다.
저자
박태순(朴泰洵, 1942~) 1942년 5월 8일 황해도 신천 출생. 1947년 월남 후 서울중·고를 거쳐 서울대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64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단편 <공알앙당>이 입상하고, 1966년 <세대> 제1회 신인문학상에 중편 <형성>이 당선되었다. 같은 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향연>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약혼설>이 각각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입선되어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정든 땅 언덕 위>(1966), <무너진 극장>(1968), <단씨의 형제들>(1970), <홍역>(1972), 장편 <어느 사학도의 젊은 시절>(1977. 1~ 1978. 12), <낯선 거리>(1986), <밤길의 사람들>(1988) 등을 발표하였다. 소설집 <낮에 나온 반달>(1972), <정든 땅 언덕 위>(1973), <어제 불던 바람>(1979), <신생>(1986), <낯선 거리>(1989) 등을 간행하였다. 그는 소설 창작뿐만 아니라 번역에도 관심을 기울여 <아메리카 니그로 단장(斷章)>(1976), <자유의 길>(1978), <올리버 스토리>(1978), <팔레스티나 민족시집>(1981), <무너지는 사람들>(1981) 등을 간행하였다. 기행수필 <국토와 민중>(1983)은 정치적 억압의 시대에 국토를 순례하면서 기층 민중의 생명력을 배우고자 노력한 결과로 나타난 작품이다. 초기에는 대체로 ‘외촌동 사람들’이라는 부제 아래 변두리 빈민층의 삶을 묘사함으로써 소외되고 뿌리 뽑힌 사람들의 삶과 함께 민중의 건강한 생명력을 드러내는 데 치중했다. 이에 비해 후기에는 <어느 사학도의 젊은 시절>과 <밤길의 사람들>처럼 전쟁이나 민주화 운동 등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을 드러내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리뷰
해방 이후 우리의 현대사를 조금만 깊이 들여다본다면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어떠했을 것인가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지금 50대 이상이라면 누구나 이름 그대로 난세를 겪어 왔노라고 말할 정도로 개개인의 삶은 커다란 격류에 거듭 휩쓸려 왔던 것이다. 8·15 해방과 좌우 대립, 6·25의 동족 상잔, 4·19 혁명과 5·16, 경제개발과 급격한 도시화, 광주항쟁과 6월 항쟁 등 격동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격동 속에 개개인의 삶은 온전한 지속과 발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고, 그 뿌리까지 뽑히기 일쑤였다. 분단과 전쟁이 수많은 난민을 낳았다면 급격한 도시화와 농촌의 피폐는 도시 변두리 빈민이라는 또 다른 난민을 낳았다. 그런가 하면 경제발전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오늘날에도 시민사회의 가치가 제대로 실현되고 있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사회변동에 따른 가치관의 혼란은 정신적 난민들을 만들어내었다. 박태순은 바로 이러한 우리 현대사의 굴곡과 파행에 관심을 집중해 온 작가이다 그리고 그의 전기적 사실 또한 그의 작품활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의 가족은 그가 6세 때인 1947년 2월에 해주에서 서울로 내려왔으니 그가 유년기에 체험한 바 해방 이후의 다소 유동적이던 분단상황 아래에서의 월남민들의 생활은 실향사민을 다룬 그의 작품의 바탕이 된다. 대학 1학년 때 그는 4·19 혁명에 뛰어들었고, 학우가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 체험으로 그는 4·19에 직접 가담했던 사람의 목소리로 4·19의 본질을 그 내측에서 그려낼 수 있었다. 1970년대 이후 그는 우리의 현실과 삶의 기록자로서의 면모를 꾸준히 보여왔다. 그는 1970년대를 여는 대표적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전태일의 분신과 광주 대단지 사건에 대한 보고문학을 제출한 바 있다. 이러한 민중의 현실과 삶의 본질에 대한 그의 탐구와 체험은 그 뒤 국토기행으로 이어져 <작가기행>과 <국토와 민중>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런가 하면 제3세계문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 <파키스탄행 열차>(인도), <민중의 지도자>(나이지리아) 등을 번역하기도 했다. (……) 박태순은 창작집 <정든 땅 언덕 위>에 주로 수록된 이른바 외촌동 연작으로 작가적 명성을 얻었고, 이 작품들만으로도 소설사에 기록될 작가이다. 그리고 도시 빈민 문제를 다룬 이 작품들은 그의 국토기행에 이르기까지 민중현실에 대한 기록이라는 박태순 문학의 주류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정신의 궤적을 염두에 둘 때 박태순 문학의 기본 축은 <무너진 극장>(1968)에서 <환상에 대해서>(1975), <밤길의 사람들>(1988)에 이르는 데에 있지 않을까 한다. <무너진 극장>에서 <밤길의 사람들>에 이르는 길은 4·19에서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의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도정의 문학적 표현인 셈인데, 그 도정에 작가의 현실과 역사에 대한 인식의 심화와 확대를 드러내는 그의 다양한 작품들을 분포시킬 수 있다. 말하자면 그의 문학적 출발점은 4·19 혁명의 실패와 좌절인 셈이다. 작가 자신이 대학 1학년 때 직접 체험한 이 미완의 혁명을 그는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무너진 극장>은 이승만 정권의 붕괴 전야인 4월 25일에 일어난 사건들을 그린 것인데, 4·19 혁명의 횡단면을 날카롭게 부조해 낸 기념비적 작품이다. 4·19 때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가 나은 ‘나’는 친구 광득이와 함께 외출하다 금방 마포형무소에서 풀려 나온 융만이를 길거리에서 만나서는 망우리로 평길이의 무덤을 찾아 본다. 평길이는 시위를 하다가 총에 맞아 죽었던 것이다. 다시 이들은 서울의대 부속병원으로 부상당해 입원한 친구 흔수를 문병하고 문리대 쪽으로 가다가 대학교수단의 시위를 보고는 저녁부터 술집에 앉아서 침통하게 자유와 행복 등을 주제로 토론을 한다. 밤중에 밖으로 나온 그들은 분노한 시위대의 물결에 합류하여 임화수의 평화극장을 부수러 간다. 시위대는 무질서에 환장해 버린 듯이 기괴한 소리를 뱉으며 극장의 내부를 모조리 파괴하고 불까지 질렀다. 평화극장이란 무엇인가. 독재정권의 하수인인 정치깡패 임화수의 것이기에 파괴되었지만 그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근대사회 도시의 주요한 공간의 하나인 극장은 시민들의 정서와 의식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말하자면 시민의 놀이공간인 셈이다. 그러나 임화수의 평화극장은 시민의 주체적 놀이공간이 아니라 시민으로 하여금 재갈 물린 관객이기를 강요하는 현실의 상징적 공간이다. 시위대는 이 극장을 파괴함으로써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 파괴를 그렇게만 보고 있지 않다. 위선과 기만, 억압과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이 파괴는 쾌감을 가져왔지만 곧 시위대를 저 원초적 무질서에까지 끌고 가고 말았다. 어둠과 밝음의 경계는 뚜렷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어둠보다는 밝은 쪽이 더욱 광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아래층이고 이층이고 할 것 없이 사람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마치 원시인들과도 같이 깩깩 고함을 지르며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여기저기 불길이 번지기 시작하는 곳에 마치 이 세계에 종말이 다가왔다는 것처럼 이상한 냄새를 피우며 연기가 퍼져 가고 있었다. ……(중략)…… 아마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불만스러워할 때 막연히 느끼는 그러한 방심상태일는지도 모른다.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무질서에로의 해방상태. 이런 본능이야말로 최루탄을 맞으면서도 애써 진행시켜 갔고 대열을 만들어 갔던 데모의 다른 한쪽 면이 아니겠는가? (<무너진 극장> 중에서) 이 광기의 상태는 어떤 면에서는 4·19의 한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집단적 정화작용이 없는 혁명이란 상정하기 어렵다. 이 부분은 4·19 혁명을 그 참가자의 시각에서, 말하자면 제3의 관찰자의 시각이 아니라 그 내측의 시각에서 그린 것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지만 또 하나 평가되어야 할 것은 작가가 이를 혁명과 일상의 갈등으로까지 확대하여 조망하고 있는 점이다. 극장 내부가 누군가에 의해 불타기 시작하자 극장에 인접한 주택가의 주민들이 위험을 직감하고 달려들었다. 주민들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불이 번지기 시작하는 곳으로 달라붙었다. 성난 이리떼처럼 달려들어 불길을 짓밟았다. 거기에 약간의 충돌이 있었다. 데모대들은 어떤 본능적인 느낌으로 이들을 적수로 간주하여 달려들 태세를 취했다. 주민들은 또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 그들의 재산을 보호하려 하였다. 그것은 마치 혼란의 세계를 맞이한 두 가지 계층의 사림군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불길이 어느 정도 잦아들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일제히 합창을 하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불을 지르지 마라. 그러면 이 동네가 타버린다.” (<무너진 극장> 중에서) 지금까지의 억압적 질서와 대중 기만을 상징하는 극장의 파괴가 일상에만 충실하려는 인간들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비쳤는지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냉혹한 도취상태이긴 하나 혁명의 대열에 선 사람들과 일상의 유지적 인간들의 대립을 그린 이 장면은 4·19 문학 중 탁월한 성취의 하나라 할 것이다. 이처럼 무질서의 해방상태까지 체험한 ‘나’는 아침에 군인들의 눈을 피해 무너져 버린 극장을 포복해 나오면서 새로운 극장, 새로운 무대가 어떻게 등장할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그러나 그 뒤 파괴된 극장의 무질서가 고귀한 자유와 행복으로 건설되었던가. 여전히 4·19를 한순간의 고립적 사건으로 몰고 가는 세력이 의연히 버티고 있음을 ‘나’는 깨닫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혁명은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 ‘진정한 삶을 위한 편력’, 김종철, <정든 땅 언덕 위 外>, 박태순, 동아출판사, 1995
작가의 말
1950년대 문학이 지니는 허무주의, 그리고 문학의 문학성만을 내세우는 문학주의가 민족 현실을 결과적으로 어찌 왜곡시키게 하는가를 일깨워 주게 한 것이 바로 4월 혁명이었다면, 농민-유랑민-난민-빈민-노동자를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여 그 사회 모순을 심화시키고 아울러 외압에 예속시킴으로써 매판적인 부를 창출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알아차리게 한 것은 이미 ‘대일 굴욕외교 반대’의 함성이 오르던 1964년의 계엄령 속에서였다. (……) 잘못된 세상과 어찌 싸워나가야 하느냐 하는 것이 인생론을 이루게 하는 사회에서는 소설 창작이란 그 싸움의 결과로써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 그 원인을 이루는 행위는 결코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문학과 혁명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이런 질문의 방식으로 그 시대에 있었을 것이다. 모순이 해결될 수만 있다면이사, 그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모순의 바로 그 모순성을 축으로 삼아 팽이 돌리기로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있는 ‘너무나도 잘못된’ 60년대에 그 부정과 긍정의 절대값을 어느 폭까지 산정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런 ‘쟁점’이 표면적으로 부각되어 나온 것으로 알려진 바는 없었을 것이다. (……) 나는 소설가라기보다는 산문가이었으리라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과연 ‘산문가’라는 말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1960년대에 내가 ‘소설’을 추구하였다면 70년대 이래 나는 ‘산문’을 추구하였으며, 그리고 소설을 산문의 한 갈래인 것처럼 여기는 문학을 해왔는 바 거기에는 나름대로 그렇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산문 정신은 비유컨대 시 정신과는 달리, 시대 정신이라는 것, 총체적인 현실이라는 것을 스승으로 삼는다. 이럴 때 소설은 소설 그 자체의 문학성을 존경할 이유는 없게 되며, ‘잘못된 시대 속에서의 올바른 삶의 추구’를 어찌 형상화해 내고 있느냐 하는 것에 얼마나 충실했는가에 의해 그 소설이 우선적으로 판별될 것이라고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올바르지 않으면 아니 될 삶에 어찌 복무하느냐 하는 것이 급선무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 독재의 현실에 맞서 시대의 진실을 밝혀야 할 문학의 일로써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문학 성명서’가 더 급하다면 그것부터 써야 할 일이고 잘못된 진상을 알리기 위해서는 현장 르포가 더 요청될 것이다. 그리고 소설은 삶을 왜곡시키게 하는 시대의 굴레, 그 물적 토대를 밝히는 정신 작업을 주행해 낼 것이 중요하게 되며, 그럴 적에라야 그 문학성을 채우는 것이 되지 않을까. 아니 소설은 하찮치 않은 것일 수 있다. 나는 소설을 존경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믿지 않으며, 따라서 언제든지 그만 둘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이른바 잡문이라 불려지는 글들을 병행시켜 왔다. 나아가서는 조잡한 시대에는 산문성(가령 노동자의 수기라든가, 확신범의 항소이유서라든가, 반체제 가요라든가)이 더 문학성을 지니게 되기도 하며, 소설은 도리어 희문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일 아닌가. (……) 시와는 또 달라서 소설은 그 자체로 근대 정신의 산물이었던 것이나 서구 문학의 경우 19세기 중엽으로부터 제국주의 문화가 팽배하면서 ‘병든 감수성’에 젖어 들고 이른바 ‘문학을 위한 문학’을 내세워 오기도 하였던 바, 우리 문학이 이 잘못된 병독에 오염된 점도 있지 않은가 하는 의혹이다. 소설이 근대 정신의 산물이라고 했을 때의 ‘근대’라 하는 것은 신의 시대(고대)- 영웅의 시대(중세)에서 바야흐로 평민·민중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하는 역사 발전 단계의 맥을 짚는 인식 내용이라 하겠는 바, 그러한 의미의 근대 ‘정신’을 소설의 산문 정신에 담는 것이 유효하다면 우리 사회는 물론 이를 요청하고 있을 것이다.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의 다채로운 삶의 표정들 속에서 소설이 희희낙락할 수 있기를 바라는 그러한 것이 소설가의 꿈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민중은 제멋대로 출몰하는 엉뚱한 상전들의 머슴 노릇에 겨워하고 있으니 소설이 덩달아 그 머슴의 머슴 노릇으로 겨워할밖에 없는 게 아닌가. 산문가로서의 소설가는 시대 정신을 위해 복무하는 머슴꾼이나 그 노릇마저 안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을 터인데, 이런 태도의 허허실실을 나는 이 ‘선집’을 내게 되는 계기에 점검해보고자 한다. 사회 구성체 속에는 기층 민중층-중산층-지배층의 계급·계층 구성 속에 문학인-예술가의 자리를 그 어디인가에 마련해 놓고 있을 것이다. 어떤 이에 의하면 그들은 지식인의 범주 속에 포함되며 다른 관찰에 따르면 지식인의 하위층과 민중의 상위층에 접변되는 주변인, 즉 마지날 맨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사회인으로서의 문학인은 그의 사회행위에 대한 나름대로의 역할과 의무를 갖게 될 것인 바, 문학 전통이 강한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특히 ‘글 아는 자의 책임’을 중요하게 따진다. 글 아는 자는 전통 사회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지배문화 이데올로기의 공급자 역할을 하였으나, 물론 이제는 전혀 달라졌다. 글 아는 자는 산업화되는 자본제적 사회 속에서 일단 지식산업-문화산업의 종사자가 되나 그 중 문학 예술인은 아카데미즘을 표방하는 학자, 저널리즘 또는 출판문화의 기자 내지는 편집인과는 또 다른 자유업, 그러니까 일종의 ‘지식 노동자’이다. 그런데 문학인은 다른 문화산업 종사자와는 달리 그 문학행위에 어떤 개인적인 목적이나 동기, 이해득실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는 사회 구성체의 특정 계급·계층 속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며, 개인과 집단의 이해 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이익사회’의 경쟁 논리에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고, 나아가서 계급적 사유의 고리로부터 해방되어 사회-민족-역사를 총체적으로 조감하는 존재여야 할 것이다. 이른바 ‘체험 교환 가능성’의 전달자 내지 매개자이어야 한다. 즉 민족의 ‘형식’을 규정하고, 민중의 ‘내용’을 정당하게 설명해야 한다. 민중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나 입이 없다. 문학인은 입을 가지고 있으니 민중의 이야기를 매개하여야 한다. 나아가서는 ‘입’이 열린 민중으로서의 문학인이어야 한다. 한편 지배층은 커다란 귀를 가지고 있다. 온갖 미디어를 동원하여 퍼뜨리고 있는 갖가지 정보들은 송신체계의 독재-독점으로 일방통행식의 수신 체계를 수립하여 이를 주입하는 방식으로 방출시킨다. 문학인은 문학적 진실에 따라 이 ‘지배문화’에 맞서 그 잘못된 것을 비판하며, 그들이 고의로 감추거나 왜곡시키는 것을 들추어 내어야 하며, 아울러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그는 ‘정확한 귀’를 가져야 한다. 열린 입, 뚫린 귀의 문학은 물론 하나의 이상이기는 하다. 지난 60년대 이후의 대단히 잘못된 독재 체제들은 문학의 어려움보다도 문학인의 사회인으로서의 역할을 더욱 곤핍스러운 것으로 되게 하였다. 독재문화의 유지를 위해 허위의 문학 공간을 마련하여 “얘들아, 이 운동장, 이 울타리 안에서 놀아라”하기는 하였으나, 잘못 발음되는 문학보다는 차라리 침묵의 문학이 더 소중한 문학행위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실재로 문학의 입은 닫혀졌고 귀는 막아졌다. 닫혀진 입, 막힌 귀를 어찌 열게 하고 뚫게 하는가 하는 작업이 먼저 해결돼야 했다. 소설을 쓰고 펴내고 읽고 하는 것이 독재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의미로 되게 하자면 ‘문학 사회학’을 근본부터 점검해야 한다는 생각들이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70년대 문학은 민족문학-민중문학의 운동장, 그 광장을 찾아내게 되었을 것이다. 문학은 일련의 반독재 운동 과정을 통하여 그 독재문화를 구성하게 하고 있는 반민족적 반민중적인 성격을 적발해 내게 되었고 그리하여 민족-민중 문학으로서의 방향을 헤쳐 나가게 하였으리라 보는 것이다. 확실히 70년대는 이러한 ‘산문의 시대’였던 것으로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사회인으로서의 문학인 역할과, 문학 창작으로서의 문학인 역할은 둘로 나뉘어지는 두 개의 개념인 것은 아닐 것이다. 70년대의 독재는 여러 극단적인 체험들을 가능하게 하였을 것이기에, 문학의 위기 의식이 문학인의 자기 정체성을 그토록 고민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한때 유행되던 성명서 식의 표현을 빌린다면 ‘문학운동 속에 문학이 있게 되는 것’의 발견이겠는데, 물론 이런 파악은 지금도 유효하다. (……) 내 소설이 무뚝뚝하고 독자들에게 불친절하며 어떤 면에서는 불편한 것이었음을, 이번에 그 작품들을 추려보면서 반성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나는 작가-작품 사이의 융통성 없는 직선, 또는 폐쇄적인 정직성의 통로에 닫혀져 있음을 살피게 되었다. 왜 그랬을꼬, 딱해 보이기도 한다. 소설에 풍만한 곡선도 그려 넣고 시침 뻑 따는 엉너리에 객담쯤 윤활유로 집어 넣어도 관계찮을 것인데 왜 그리 고지식하기만 했을꼬. 현실이 메마르고 각박한 것을 속일 수 없는데 소설이 번질거리고 질척거리는 것은 도리어 거짓이며 속임수이며 방정이 아니겠는가 하는 우직한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우직한 것이었다고 느끼게 되었다면 거기에 변화가 있기는 할 것이다. 일테면 나는 소설의 하인 노릇으로 소설이라는 진상품을 받들어 올려야 한다는 것에만 골몰하여 살이 없고 기름기가 없는 봉제공 노릇만 하였나 보다. 소설 쓰기가 제작이 아니라 유희가 되도록 하여야 하는 것, 다시 말해 작가가 소설을 제조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 소설 자체로 움직이도록 가동시켜 작가가 이를 운전해 낸다는, 바로 그런 구성력의 의도적인 배제 내지 결핍이 온당한 것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산문 정신으로서의 소설은 현실을 스승으로 삼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앞에 적었으나, 못생긴 현실의 문학적 진술이라는 도식성에 너무 묶여 있었던 듯하다. 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가는 독재의 터널시대에서 특히 그런 현상이 심했던 듯하다. 소설의 언어와 논리의 언어가 다를 터임에도 그것을 합성하려 하는 데에서 오는 문장의 거추장도 눈에 뜨인다. 정서의 살과 논리의 뼈는 적당히 토실거려야 하는데 앙상하고, 그런가 하면 울툭불툭 튀어나온 광대뼈들이 드러나고 있다. 사소설적인 것은 피하고 1인칭적인 것이 아니라 3인칭적인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산문의식도 도처에서 삐걱거리고 있다. 위에서 아래를 깔보는 그런 눈이 아니라 밑에서 저 높은 쪽으로 눈꼬리를 치켜 올리어, 이 타락한 사회의 잘못된 질서를 살펴야 한다는 의도가 있었다면 그 의도를 들키어 버리는 서투름이 그대로 고지식하게 보이기도 하다. 독재의 시대가 괴롭다 하는 것은 그 물리력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비인간적’인 기만과 속임수와 공갈의 목소리에 몸 둘 바 모르게 되며 마음가짐의 갈피를 세울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처에서 비틀거리고, 여기저기에 술 냄새를 풍기고 있으며, 삭이지 못한 울분에 게정의 어투를 빈발케 하고 있다. 송기원의 문자로 하면 민중은 바다이다. 그 바다로 들지는 못하는 그 대양의 조금 냄새에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어느 노들강변쯤에서 바다가 가까워 온다, 하며 자맥질을 하고 있는 형국이다. 1960년대, 70년대, 80년대의 세 단계의 문학을 배치하기로 하고 순전히 자기 해독만을 위했던 일기를 첨부한다. 60년대의 소설 중에서 소품 위주의 것을 고르게 되었다면 70년대의 것들은 일관되지 않은 소재들의 작품이 모이게 되었고, 80년대에 들어오면서는 약간 중편소설적인 것들을 여기에 싣게 되었다. (……) 문학은 자기 시대에 대한 전투를 나름대로 전개하여야 한다. 타락한 사회에서의 진실이라는 것이 그 전투의 결과로 얻어지는 바, 창작 작품은 곧 타락한 사회와의 전투를 중단하지 아니하는 문학정신의 요청에 의해서만 그 진실을 보급받게 하는 것임을 안다. 그런데 여전히 완강한 이 시대의 반문화가 어느덧 노병이 되어가고 있는 자를 뒤로 물러서지 못하게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다만 그는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이 젊은이가 떠맡아서 할 일과 혼동되거나 중복되는 것이 아님을 안다. 문학은 바로 그렇게 배수진을 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그리고 작품은 미래를 바라보려고 하면서 뒤로 남는다. 앞쪽으로 향하는 문학과 뒤켠으로 떨구는 작품- 문학은 항상 거창하고 작품은 항상 서투르다. 자기 작품집에 부치여 쓰는 작가의 말은 거창하면서도 동시에 서투른데, 그가 내세우고자 하는 문학성과 그가 남겨놓고 있는 작품성 사이의 틈을 그의 몸통으로 메꿀 수 없는 노릇이니 실상 좋은 것은 묵묵부답일 것이다.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벌이게 되는 전투는 참으로 고달픈 노릇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물러설 수는 없는 바의 것이다. 또한 그것은 승리할 수도 없고 패배될 수도 없는 그런 전쟁이니 다만 자기의 능력을 전부 내보여야 할 일이다. 장편소설로 점령해야 할 고지대와 단편소설들로 딛고 전진해야 할 저지대의 그 어느 한 골짜기에 이 문학선집을 이렇게 내려 놓으면서, 일단 자세를 가다듬는다. 해왔던 대로의 ‘여전히’와, 해보지 못하였던 것으로의 ‘새로이’를 다듬어서, 그렇게 여전히 그리고 새롭게 몸서리를 내기 위하여……. ‘작가서문’, 박태순, <낯선 거리>, 나남, 1989
관련도서
<한국현대문인대사전>, 권영민 편, 아세아문화사, 1991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장석주, 시공사, 2000 <정든 땅 언덕 위 외>, 박태순, 동아출판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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