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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달비장수

작품명
강원도 달비장수
저자
전병순(田秉淳)
구분
1960년대
작품소개
추암부락에는 유난히 홀어미가 많다. 월평댁은 군인 나간 아들 탓에 며느리와 단 둘이 살고 있다. 마을의 세 아낙이 강원도 쪽으로 달비장사를 다니며 돈을 벌자 자신의 며느리도 함께 장삿길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월평댁의 성화에 못 이겨 아낙들은 마치 못해 월평댁 며느리를 장삿길에 동행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달비장사는 핑계일 뿐 그동안 낯선 동네에서 몸을 팔아 돈을 벌어온 것이다. 함께 간 며느리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망치고 돈을 받아 오게 된다. 그러나 억울한 심사에 마을로 돌아온 후 자초지종을 발설하게 되고 아낙들은 도망가기 바쁘다. 소문은 삽시간에 마을에 퍼지고 동네 어른들의 의견으로 월평댁은 추암마을 열두집 남녀노소 모두를 불러다 잔치를 벌일 준비를 한다. 모두 입을 덮어준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장날 장터에서 음식장만 거리를 사서 앞집 복돌이의 지게 위에 물건을 쟁이는 월평댁은 며느리가 더 걱정된다.
저자
전병순(田秉淳, 1929~) 1929년 2월 2일 전남 광주 출생. 1950년 숙명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51년 단편 <중교사>를 <신문학>에 발표함으로써 등단하였으나, 활동 중지 상태에 있다가 단편 <뉘누리>가 <여원(女苑)> 작품 모집에 당선, 신인상을 수상함으로써 재등단했다. 이듬해 <한국일보> 장편 공모에 <절망 뒤에 오는 것>이 입선하였다. 상명여고 등에서 교편을 잡은 바도 있으나, 이후 작가 생활에만 전념하였다. 중편 <누구에게 말하리>(1967) 등을 위시하여 많은 중·단편 소설이 있으며, 특히 장편에서 솜씨를 발휘하여 등단작 외에 <피는 꽃 지는 꽃>(1964), <현부인>(1965), <독신녀>(1966), <또 하나의 고독>(1968), <안개 부인>(1969), <인생 동업>(1969), <창마다 불빛이>(1970), <물 위에 쓴 이름>(1972), <강가의 나무들>(1972~1973), <어린 여인>(1979) 등 수많은 화제작들을 발표하였다. 그의 작품은 주로 장편소설로서 그런 만큼 통속성에 떨어질 위험을 안고 있지만, 자질구레한 시정 잡사들을 누추하지 않게 그려내는 솜씨를 발휘한 것으로 정평을 얻었다. 특히 여성작가 특유의 필치로 여성들의 일상사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수더분한 세속잡사의 얘기로 옮겨 놓는 데서 장기를 발휘하였다. 1968년 <또 하나의 고독>으로 제5회 여류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리뷰
<이단>, <미수>를 비롯한 작품들은 모두 착실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만나게 되는 어려움들을 다룬 것이다. <이단>에서는 주인공이 배급 타는 줄에서 딱한 나머지 남을 새치기 시켜준 탓으로 정작 저는 밀려나고 만다. 짤막한 얘기지만 대뜸 윤리학의 근본문제가 솟아오른다.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 저를 버리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물음이다. 안락사를 다룬 <미수>는 사랑을 하기 때문에 살인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고비가 드러난다. <국가>에서는, 제도적으로 이뤄져야 할 일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 그것을 저마다의 자리에서 어떻게 치러야 하느냐가 말썽이 된다. <강원도 달비장수>에서는 먹고 살기 위해서 어디쯤까지 사람스럽지 못해져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를 묻고 있다. 어버이가 자식에 기울이는 사랑은 정말 절대일 수 있는가가 테스트되는 것이 <테스트필>의 이야기다. <파장금 서정>에서는 결혼이라는 인륜의 근본 형식이 새삼스럽게 수수께끼가 되고 만다. 이 모든 경우에서 한결 같은 것은, 만일에 주인공들이 규범이 바라는 바를 말 그대로 옮기려고 들면 그 자신이 곧 부서지고 말리라는 점이다. 윤리보다 살아남는 일이 더 무겁다 치더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어디쯤까지 사람의 길을 어길 것이냐를 가리기는 쉽지 않고, 쉽다 하더라도 그 같은 가림이 저마다에게만 뿔뿔이 맡겨진다면 마침내 사회 전체로 보면 윤리적 쑥밭이 되고 만다. 이렇게 해서 이 소설들의 세계 역시 동시대의 작가들이 모두 부딪치고 있는 괴로움의 커다란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개화 이래 진행되어온 거듭된 사회변화는 보통 생활자의 자리에서 생각할 때 끊임없는 윤리규범의 무너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고지식하게 ‘윤리’라는 이름의 채권을 산 사람들은 그것이 나중에 보면 갚아줄 사람 없는 빈 종이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가 일쑤였다. 깨닫는다고 해도 반드시 의식 속에서 뚜렷한 객관화가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모양으로 드러나 보이게 된다는 말이다. 즉 윤리채권을 많이 산 사람은 생활에서의 패배자가 된다는 형태로 사람들은 생활의 법칙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 배움을 이번에는 생활로 옮기고 보면 ‘비싸게나 불러라’ 같은 이야기가 되고 만다. ‘삶’을 위해서 ‘사람다움’을 아주 내버리고 만 상태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그러면서 산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다시 마주서게 된다. (……) <실루에뜨>, <체취>, <회춘기>는 <강원도 달비장수> 등과는 다른 울림을 내는 이야기들이다. 여기서 작가는 알맹이로 봐서 역시 윤리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습관으로 제도라든지, 그 제도를 거쳐서 이루는 남과의 생활이라는 말로는 부르지 않는 문제와 마주치고 있다. 결혼생활이라는 것은 물론 제도요, 그것도 첫째급 제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첫째급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만큼, 다른 제도의 문제처럼 공약수를 말해본들 문제를 푸는 데에 그것이 미치는 힘이 너무나 하찮게 울리는, 문제는 그대로 너무도 해결 없이 남기 마련이라는 그런 ‘제도’인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이 다른 제도들과 살닿은 관계를 가지고, 어떤 때는 아니 많은 경우에 다른 제도와의 함수관계에 있지만 남녀의 애정의 문제는 다른 제도와의 사이에 엄연한 종차를 가짐 또한 의심할 수 없다. 이들 작품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속시원한 이야기 같은 것을 작가는 말하고 있지 않다. 애정의 문제는 삼강오륜이 무너진 다음, 개화연애-복고-위악-무정부와 같은 주기가 돌림병처럼 바뀌고 되풀이되었을 뿐, 그래야 할 만한 깊이와 점잔을 가지고 다뤄지지도 못했고, 어떤 미끈한 양식에 이르지도 못한 문명지표의 하나이자, 따라서 소설문학에서도 가장 얕은 긍정적 축적밖에는 갖지 못한 소재이다. 이와 같은 사정을 반영해서 <체취>, <회춘기>, <실루에뜨> 등과 같은 작품에서 다루어진 애정의 이야기들은 한결 가라앉아 있고, 문제의 깊이 앞에서 망설이는 몸짓이 작가의 붓에 어떤 뉘우침, 주저 같은 울림을 빚어내게 만들고 있다. 말할 수 있는 테두리 안에서만 이야기한다는 것은 예술적 미덕의 하나이다. 가령 <강원도 달비장수>에서는 돈 때문에 애정의 윤리가 무너지게 되지만, 돈 때문에가 아닌 <채취>나 <회춘기>의 경우에는 문제는 그리 쉽지도 않고 테두리가 뚜렷할 수도 없겠고, 따라서 <박포씨>에서처럼 여우가 있을 수도 없다. 다만 여전히 남을 다치지 않으면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는다는 몸가짐에서는 다른 작품들과 다름이 없다. 이처럼 살펴볼 때 풍속의 교정자로서, 세련된 행위양식의 전형의 창조자로서 개화이래의, 생활과 예술 표현에서의 거듭되는 위기에 대해 저항해온 이 땅의 문화 제작자의 한 사람으로서의 몫을 다하고 있는 한 작가를 우리는 알아보게 된다. 그의 소설의 제목인 <이단>이라는 표현은 그 작품의 문맥에서의 반어적인 효과를 넘는 뜻이 있어 보인다. 우리 사회의 문명상태는 그 이단에 대한 ‘정통’의 모습도 쉽사리 말하기 힘들다는 사정에까지 그 울림이 퍼질 수 있는 표현이라 새겨지기 때문이다. 무슨 목적에서건 작품에 대해서 밖에서 논의한다는 것은, ‘말’의 성질 때문에 개념화, 선조화일 수밖에 없다. 해설자가 위에 적은 말들 역시 그런 것이고, 그것도 매우 좁은 이해력 안에서 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전병순씨의 작품은 스스로 서 있고, 그것도 실팍한 제 힘으로 서 있는, 소설이라는 이름의 자족적 세계이다. 누구보다 먼저 필자 자신이 이 세계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은 큰 기쁨이었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해설’의 가난함과 작가의 세계 자체의 그득함에 대한 증언으로 가름하고 싶다. <이단>, <미수>를 비롯한 작품들은 모두 착실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만나게 되는 어려움들을 다룬 것이다. <이단>에서는 주인공이 배급 타는 줄에서 딱한 나머지 남을 새치기 시켜준 탓으로 정작 저는 밀려나고 만다. 짤막한 얘기지만 대뜸 윤리학의 근본문제가 솟아오른다.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 저를 버리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물음이다. 안락사를 다룬 <미수>는 사랑을 하기 때문에 살인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고비가 드러난다. <국가>에서는, 제도적으로 이뤄져야 할 일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 그것을 저마다의 자리에서 어떻게 치러야 하느냐가 말썽이 된다. <강원도 달비장수>에서는 먹고 살기 위해서 어디쯤까지 사람스럽지 못해져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를 묻고 있다. 어버이가 자식에 기울이는 사랑은 정말 절대일 수 있는가가 테스트되는 것이 <테스트필>의 이야기다. <파장금 서정>에서는 결혼이라는 인륜의 근본 형식이 새삼스럽게 수수께끼가 되고 만다. 이 모든 경우에서 한결 같은 것은, 만일에 주인공들이 규범이 바라는 바를 말 그대로 옮기려고 들면 그 자신이 곧 부서지고 말리라는 점이다. 윤리보다 살아남는 일이 더 무겁다 치더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어디쯤까지 사람의 길을 어길 것이냐를 가리기는 쉽지 않고, 쉽다 하더라도 그 같은 가림이 저마다에게만 뿔뿔이 맡겨진다면 마침내 사회 전체로 보면 윤리적 쑥밭이 되고 만다. 이렇게 해서 이 소설들의 세계 역시 동시대의 작가들이 모두 부딪치고 있는 괴로움의 커다란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개화 이래 진행되어온 거듭된 사회변화는 보통 생활자의 자리에서 생각할 때 끊임없는 윤리규범의 무너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고지식하게 ‘윤리’라는 이름의 채권을 산 사람들은 그것이 나중에 보면 갚아줄 사람 없는 빈 종이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가 일쑤였다. 깨닫는다고 해도 반드시 의식 속에서 뚜렷한 객관화가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모양으로 드러나 보이게 된다는 말이다. 즉 윤리채권을 많이 산 사람은 생활에서의 패배자가 된다는 형태로 사람들은 생활의 법칙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 배움을 이번에는 생활로 옮기고 보면 ‘비싸게나 불러라’ 같은 이야기가 되고 만다. ‘삶’을 위해서 ‘사람다움’을 아주 내버리고 만 상태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그러면서 산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다시 마주서게 된다. (……) <실루에뜨>, <체취>, <회춘기>는 <강원도 달비장수> 등과는 다른 울림을 내는 이야기들이다. 여기서 작가는 알맹이로 봐서 역시 윤리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습관으로 제도라든지, 그 제도를 거쳐서 이루는 남과의 생활이라는 말로는 부르지 않는 문제와 마주치고 있다. 결혼생활이라는 것은 물론 제도요, 그것도 첫째급 제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첫째급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만큼, 다른 제도의 문제처럼 공약수를 말해본들 문제를 푸는 데에 그것이 미치는 힘이 너무나 하찮게 울리는, 문제는 그대로 너무도 해결 없이 남기 마련이라는 그런 ‘제도’인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이 다른 제도들과 살닿은 관계를 가지고, 어떤 때는 아니 많은 경우에 다른 제도와의 함수관계에 있지만 남녀의 애정의 문제는 다른 제도와의 사이에 엄연한 종차를 가짐 또한 의심할 수 없다. 이들 작품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속시원한 이야기 같은 것을 작가는 말하고 있지 않다. 애정의 문제는 삼강오륜이 무너진 다음, 개화연애-복고-위악-무정부와 같은 주기가 돌림병처럼 바뀌고 되풀이되었을 뿐, 그래야 할 만한 깊이와 점잔을 가지고 다뤄지지도 못했고, 어떤 미끈한 양식에 이르지도 못한 문명지표의 하나이자, 따라서 소설문학에서도 가장 가장 얕은 긍정적 축적밖에는 갖지 못한 소재이다. 이와 같은 사정을 반영해서 <체취>, <회춘기>, <실루에뜨> 등과 같은 작품에서 다루어진 애정의 이야기들은 한결 가라앉아 있고, 문제의 깊이 앞에서 망설이는 몸짓이 작가의 붓에 어떤 뉘우침, 주저 같은 울림을 빚어내게 만들고 있다. 말할 수 있는 테두리 안에서만 이야기한다는 것은 예술적 미덕의 하나이다. 가령 <강원도 달비장수>에서는 돈 때문에 애정의 윤리가 무너지게 되지만, 돈 때문에가 아닌 <채취>나 <회춘기>의 경우에는 문제는 그리 쉽지도 않고 테두리가 뚜렷할 수도 없겠고, 따라서 <박포씨>에서처럼 여우가 있을 수도 없다. 다만 여전히 남을 다치지 않으면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는다는 몸가짐에서는 다른 작품들과 다름이 없다. 이처럼 살펴볼 때 풍속의 교정자로서, 세련된 행위양식의 전형의 창조자로서 개화이래의, 생활과 예술 표현에서의 거듭되는 위기에 대해 저항해온 이 땅의 문화 제작자의 한 사람으로서의 몫을 다하고 있는 한 작가를 우리는 알아보게 된다. 그의 소설의 제목인 <이단>이라는 표현은 그 작품의 문맥에서의 반어적인 효과를 넘는 뜻이 있어 보인다. 우리 사회의 문명상태는 그 이단에 대한 ‘정통’의 모습도 쉽사리 말하기 힘들다는 사정에까지 그 울림이 퍼질 수 있는 표현이라 새겨지기 때문이다. 무슨 목적에서건 작품에 대해서 밖에서 논의한다는 것은, ‘말’의 성질 때문에 개념화, 선조화일 수밖에 없다. 해설자가 위에 적은 말들 역시 그런 것이고, 그것도 매우 좁은 이해력 안에서 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전병순씨의 작품은 스스로 서 있고, 그것도 실팍한 제 힘으로 서 있는, 소설이라는 이름의 자족적 세계이다. 누구보다 먼저 필자 자신이 이 세계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은 큰 기쁨이었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해설’의 가난함과 작가의 세계 자체의 그득함에 대한 증언으로 가름하고 싶다. ‘정통을 찾아서’, 최인훈, <강원도 달비장수>, 창작과비평사, 1977
작가의 말
“앞으로는 좀더 소설에 있어서의 예술성과 사회성의 안배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이것은 61년도 초에 공개한 나의 고민이요 숙제였건만 그 방향의 의식적 노력의 부족을 지금 나는 자인할 수밖에 없다. 소설에 있어서의 예술성이란 편의상 그 기준을 나대로 설정해 놓고 있긴 하다. ‘감동의 진폭’ 말이다. 그것은 ‘안배’라든가 의식적 노력 같은 것만으로 그렇게 간단히 해결되지 않는 어떤 복합적 요소가 게재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지금도 변함은 없다. 다만 나는 이제 그 감동의 요인, 진원 같은 것을 달리 가져야 한다는 깨달음에 부딪친 것이다. ‘미적 감동’이란 표현을 잠깐 빌어 말하자면, 이를테면 미란 그것이 순수하며 강하고 철저하고 정당할 때는 분노에도 증오에도 횡포 같은 것에까지도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좌절이나 절망 또는 비애나 환희 같은 경우에 못지 않는 크나큰 감동을 우리에게 줄 수도 있는 거라고 이젠 확신을 지니고자 한다는 얘기이다. 또 한가지 어떤 문제의 근본이나 핵심에 보다 깊이 굳건히 저촉되게 하기 위해서는 이제부턴 나의 소설에 있어서의 육화나 메이크업 같은 작업은 과감히 생략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각오를 조심스레 검토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어떻든 나는 이제부턴 좀더 달라져야겠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본성을 보고, 세계를 보고, 눈을 좀더 똑바로 뜨려 스스로를 질타할 때 나는 결국 보다 냉정해야겠고, 비정해야겠고 침묵과도 가까운 자세로써 깊이 관찰하며 작가가 피에로나 광대 또는 제물 같은 존재로 전락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그동안 비교적 다작작가라는 평에 자책을 느낀 만큼 장단편을 가리지 않고 청탁대로 모두 다 써내려오면서도 생활의 문제에 쫓기느라 작품집 하나를 내지 못하다가 이번 백낙청 선생의 호의로 인해 이 책이 나오게 되어 진심으로 감사를 느낀다. 또한 낱낱의 작품에 적절하고 정확한 분석과 비평을 내려줌으로써 작가로서의 나를 진단해 주고 앞으로의 방향에 더욱 확신을 안겨주신 최인훈 선생께 깊이 감사드린다. ‘후기’, 전병순, <강원도 달비장수>, 창작과비평사, 1977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강원도 달비장수>, 전병순, 창작과비평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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