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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형제

작품명
가난한 형제
저자
오유권(吳有權)
구분
1960년대
작품소개
1950년대 농지개혁 이후 영세소작농의 증가와 농촌의 몰락상을 배경으로 양심껏 살려고 하나 빈궁을 벗어날 수 없는 농촌가정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다. 서른 살 인수와 열아홉 살 평수 형제는 가난한 농촌마을에서 살길이 막막하다. 농사지을 땅은커녕 공사판 일도 중단되고 얼마 되지 않는 노임도 제때 받을 수가 없다. 인수는 짐꾼으로 나섰다가 먼저 자리를 잡은 지게꾼 패거리에게 치도곤을 당하고 평수는 구걸을 하다가 개에게 물린다. 굶어 죽어가는 가족을 보다 못한 형제는 부잣집의 곡식을 훔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인수가 벼랑에 떨어져 죽고 만다. 상여꾼들은 인수의 시체를 멘 채 일을 달라고 절규한다.
저자
오유권(吳有權, 1928~) 1928년 8월 18일 전남 나주 영산포 출생. 영산포 남초등학교를 마치고, 부산 체신리(遞信吏) 양성소를 수료한 뒤 우체국 직원으로 근무했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해병대에 입대하여 소설 습작을 하는 한편, 김동리와 황순원의 지도를 받았다. 1955년에 단편 <두 나그네>와 <참외>로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이후 1950년대 후반에 발표한 20여 편을 비롯하여, 매 10년마다 평균 60여 편의 중·단편을 발표한 다작형의 작가이다. 그 중 <방앗골 혁명>(1962), <황토의 아침>(1967), <여(女)기(旗)수(手)>(1969), <송잇골의 젊은이들>(1977), <과수원집 딸들>(1980), <농지상한선>(1988) 등이 대표작이다. 전라남도문화상(1957), 현대문학신인상 (1961), 한국창작문학상(1971), 흙의문학상(1978) 등을 수상했다. 데뷔 초기에는 <옹배기>(1956), <대숲 안집 고부>(1956), <소문>(1957), <혈>(1958), <황노인네 일가>(1958), <젊은 홀어머니들>(1959), <돌방구네>(1959) 등을 발표하여, 투박한 토속어로 전남 지방 농촌의 전통적인 생활을 즐겨 다루었다. 결혼을 앞둔 처녀가 괜한 소문으로 파혼에 이른다는 풍속도를 그린 <소문>, 과학사 샤머니즘의 세계를 대조시킨 <돌방구네>, 한국전쟁의 비극으로 홀로 된 여인들의 삶을 제시한 <젊은 홀어머니들> 등이 이 시기의 소설세계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1960년대에는 장편 <방앗골 혁명>, 머슴살이와 행상을 하던 농가집 내외가 가난 때문에 수난을 당하고 그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도회지로 나서는 <황토의 아침> 및 <대지의 학대> 등이 그 예이다. 이밖에 비참해진 농촌 실정을 다룬 <가난한 형제>(1963), <흙 노하다>(1965) 등의 단편도 발표하였다. 1970년대 이후에도 시골 농민의 애환과 도회지에 사는 서민들의 향수 공간으로서의 농촌생활을 소설의 제재로 즐겨 다루었다. <민촌 마을>(1970), <농지정리>(1970), <나무꾼>(1972), <정월 대보름>(1974), <서울살이>(1976), <싸릿골의 이장>(1979) 등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이 가운데 <농지정리>는 이른바 근대화라는 이름의 졸속행정 때문에 피폐해 가는 농민들의 참상을, <정월 대보름>은 아늑한 시골의 명절 풍경을, <서울살이>는 시골에서 올라와 어려운 도시 삶에 시달리는 상경민의 처지를 그리고 있다. 1980년대에 <농지상한선>(1982), <한촌 사람들>(1982), <장돌뱅이 형제>(1983), <봄나들이>(1983), <살구나무집>(1985), <산중비화>(1986), <목화촌의 새댁>(1988) 등을 발표하였다. 오유권의 문학적 특성은 시종일관 농촌소설에 전념해 왔다는 점이다. 그의 소설들은 모두 쇠퇴해 가는 농민이나 농촌 문제에 집착하되, 남다르게 구수한 호남 방언과 선의의 인물 형상을 통해 훈훈한 인정세계를 구축해 냈으며, 전통적 토속세계를 지키려고 노력해온, 몇 안 되는 농민작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리뷰
(……) 이 작품은 하층민들의 절박한 삶과 그들의 선량한 의식을 날카롭게 대비시키면서 당대 농촌의 불모성을 비교적 정확하게 반영해내고 있습니다. 지게꾼이라도 하려 하지만 선금을 내야 하고, 지주에게 고지를 간청하나 거절당하고, 동생은 문전걸식하다 개에 물리고, 마을 이곳저곳에서 굶어죽거나 자살하는 사건이 거듭되는 가운데 상갓집에서 전과 떡부스러기를 주머니에 넣는 인수의 눈물겨운 모습에 다다르면 1920년대 신경향파 소설 이상으로 참혹합니다. 그러나 어둡고 처참한 모습만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에 시달릴망정 인수 형제를 포함한 하층민들은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체불 임금을 받아내기 위해 항의할 줄 알고, 영농자금과 절량농가대여곡의 분배 과정에서 무토지 농민을 제외시키는 정부 정책에 항거하는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그들이 더 이상 순응적인 농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집단행동으로 나서는 결말부분은 비극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보다 나은 세계를 열망하는 그들의 의지를 승화시킨 장면입니다. 그들의 선량함과 적극적인 행동이 현실의 벽에 부딪쳐 좌절되면서 쌓였던 분노가 집단적 저항으로 표출된 것이지요. 김정한의 <사하촌>의 결말 부분과 흡사합니다. “극빈자에게 구호미를 달라”, “노동자에게 일을 달라”는 구호는 하층민들이 삶의 주체로서 발돋움하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 ‘전후 현실의 불모성과 새로운 삶의 지표 찾기’, 고용우·이봉범, <20세기 한국소설 : 하근찬·한무숙 외>, 창작과비평사, 2005 부산에 임시수도가 있던 피난시절, 그러니까 50년대 전반에 나는 오유권을 처음 만났다. 그 무렵 부산에서 문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 ‘금강’이란 다방이었다. 중심가인 광복동 한복판의 창신파출소 바로 옆에 있던, 지금은 양품점이 되어버린 그 다방에 어느 날 키가 작고 몸집이 달마대사처럼 둥글게 생긴 해병대의 사병 한 사람이 들어왔다. 다방 같은 데는 익숙치 않은 시골뜨기라는 사실이 첫눈에 드러나는 그 해병대 사병이 오유권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날 김동리 씨를 찾아 왔었다. 전부터 그를 알고 있는 것 같았던 김동리 씨는 그를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소설공부를 하는 착실한 군인이라고 소개했다. 그래서 나도 인사를 나누게 된 오유권은 그러나 아직 문단에 등단하기 전이어서 나는 그때 그의 이름을 잘 기억할 수 없었다. 다만 지독한 전라도 사투리의 앳된 목소리가 인상에 남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날 헤어진 이후로 우리는 꽤 오래 만나지 못했다. 그러한 오유권의 이름이 어느날 내 기억 속에 갑자기 되살아났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55년에 그의 첫 추천작 <두 나그네>가 <현대문학>에 발표된 것을 읽고 나서의 일이다. 제목이 밝혀주고 있는 바 그대로 작품에 등장하는 두 나그네가 주고 받는 대화는 순 토박이 전라도 사투리였는데, 그 사투리의 구수함이 곧 나로 하여금 몇 년 전 부산서 만난 시골뜨기 해병대 사병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그래도 긴가민가해서 물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작가 오유권이 바로 그 때의 그 사람이란 대답이었다. 그러면서 김구용 씨는 또 오유권이 김동리 씨의 동서라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사람이 하도 착하고 신실해서 김동리 씨가 처제에게 오유권과의 결혼을 권고했다는 것이다. 미상불 오유권은 착하고 신실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이다. 거짓말을 하거나 약속을 어기거나 또 남을 해꼬지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오직 선의 그것만이 그의 가슴 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 올라도 좋을 만큼 부지런하다. 당연한 일이지만 허영이나 낭비벽도 그와는 전혀 인연이 없다. 진국이란 말이 가장 적실하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마도 오유권일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 하늘은 이 진국 오유권에게 포상이 아닌 시련만을 내리고 있다. 어릴 때부터 중년이 될 때까지 줄곧 그를 괴롭혀 온 가난도 그런 시련의 일례가 된다. 그가 학교를 국민학교밖에 다니지 못한 것은 바로 그 가난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독학으로 무전기사 자격을 따서 고향인 영산포 우체국에서 10년 넘어 무전기사로 근무했다. 그리고 해병대에 복무하고 있을 때는 우리말 사전 한 권을 온전히 노트에 베꼈다. 사전을 살 돈이 없어 그랬던 것이다. 아니 사전 한 권 살 정도의 돈은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오유권은 그 돈을 자기가 쓰지 않고 집에 부쳤음이 분명하다. 군 복무 시절의 그의 휴가는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평상시 휴가를 반납하고 농번기에는 전에 반납했던 몫까지 휴가를 얻어 와서 집안의 농사일을 도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집안을 생각하는 오유권이 돈을 집에 부치지 않고 어찌 자기를 위해서 쓸 것인가. 군대의 내무반에서 틈틈이 사전 한 권을 베낀 오유권의 그 초인적인 부지런함을 작품쓰기에도 그대로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 60년대 말경부터던가 서울로 올라와서 소설만을 쓰기 시작한 그는 어느 날 내게 말했다. 월급쟁이들이 회사에 나가서 일하듯 나도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책상 앞에 앉아서 소설을 쓴다고. 그러나 그렇게 부지런히 써도 상업주의에 편승하기를 거부하고 가난한 농민들의 세계만을 외곬으로 그려나간 그의 원고료 수입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그에게는 그 무렵 또 일일이 말 못할 가정적 불행이 연거푸 겹쳤다. 그리하여 피로가 쌓일 대로 쌓인 그는 70년대 중반의 어느 날 고혈압으로 쓰러져 몸의 반쪽을 못쓰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남달리 참을성이 많고 의리가 강한 그는 아직도 건강인 못지 않게 많은 소설을 쓰고 있다. 그 자체가 하나의 놀라움인 이 사실은 나로 하여금 오유권은 역시 오유권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거듭하게 만든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대로 오유권은 가난한 농민들의 세계만을 한결같이 그려 나가고 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그는 농민문학의 작가인 것이다. 우리의 문학사는 일제치하였던 30년대에 그 농민문학이 꽤나 성행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30년대의 농민문학과 오유권이 추구하고 있는 농민문학을 동열에 세울 수가 없다. 왜냐하면 30년대에는 농민의 수가 전체 인구의 8할 이상이었던 데 반해 오늘날의 경우는 3할 미만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그냥 산술적으로 따져도 오늘날의 농민문학이 그 인구 감소율만큼 외로울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의 주변에서 농촌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는 가뭄에 나는 콩보다 귀하다. 그런 뜻에서 오유권은 우리 시대 최후의 농민문학 작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오유권의 농민문학은 데뷔작 <두 나그네>에서부터 뚜렷이 그 본질을 드러낸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도 착한 심성 하나만은 고이 간직하고 살아가는 농민들의 삶의 애환을 애정 어린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 나가는 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우리를 그윽한 휴머니즘의 향기로 감싸주게 된다. <두 나그네>의 등장 인물인 두 나그네 역시 가난한 농민이다. 같은 날 논산훈련소로 아들을 면회 갔다 돌아오는 밤길에 우연히 동향이 된 그들은 그날 처음 만나기는 했지만 이웃마을에 살고 있다. 이러한 그들이 이런저런 평범한 대화를 나누면서 함께 걷다 도중에 세 번 주막에 들러 술을 마신다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줄거리를 이룬다. 말이 술이지 가난한 그들이 어찌 좋은 술을 마실 것인가. 한번에 두어 고뿌씩 안주도 없이 소주를 마실 뿐이다. 그러나 막걸리도 사먹기 힘겨운 그들에게는 이 소주가 고급주에 속한다. 그만큼 가난한 그들 중의 한 사람이 그 소주를 세 번 연거푸 사는 것이다. 단순한 호의일 뿐 다른 뜻은 없다. 대접받은 사내는 아내에게 난생 처음 고무신 한 켤레를 사주려고 남겨온 여비 1백 50환을 생각하면서 다음 주막에선 꼭 자기가 술을 사겠다고 벼르지만 상대가 선수를 치는 바람에 끝내 기회를 놓치고 만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대접을 받기만 한 그의 마음 속에는 미안한 생각과 함께 그래도 아내에게 고무신 한 켤레를 사주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생겨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노렸던 결과가 아니다. 대접한 쪽과 대접받은 쪽, 두 사내 모두가 착한 심성이 명하는 바에 따라 순수하게 행동했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대접한 사내의 호의 어린 호기와 대접받은 사내의 소심한 안도감은 다 같이 흐뭇한 미소를 자아낸다. 한국의 농민들은 이렇게 가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순박하고 또 이렇게 착하다는 사실을 그것은 우리의 가슴에 새겨주는 흐뭇함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오유권의 가을 햇살처럼 다사로운 휴머니즘을 만끽하게 된다. <월광>의 진노인네 집도 한없이 가난하다. 당자 진노인은 걸식을 하고 있고 625때 남편이 인민군을 따라 산으로 들어간 바람에 생과부가 된 며느리가 도붓장수를 해 근근이 끼니를 잇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가난의 밑바닥을 헤매는 가운데서도 진노인은 결코 착한 심성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며느리와 헤어져 체장수 양서방의 밀회를 너그럽게 용인하는 것이다. 며느리와 헤어져 돌아가는 양서방을 뒤따라 가서 그를 다시 며느리한테로 돌아가게 하고 혼자 달빛 속을 걷고 있는 진노인의 모습은 바로 그 달빛처럼 승화된 휴머니즘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진노인과 앞의 두 나그네와 그리고 그 밖에 다른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오유권 자신의 자화상이다. 오유권이란 인간을 아는 사람이면 즉각적으로 이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그들의 착함과 신선함과 부지런함은 모두 오유권 자신의 인간적 특질인 것이다. 이와 같이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오유권은 따라서 그 인물들의 배경공간인 농촌의 현실과 삶의 실태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표출해 나간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조명하는 농민의 생활상은 언제나 생생한 리얼리티를 구현하게 되고 아울러 거기에 따뜻한 애정이 감돌게 되는 것이다. 모두 그랬다곤 단정할 수 없지만 그동안 있었던 농민문학은 그 대부분이 농민이 아닌 도시인의 농촌에 대한 시혜의식을 기조로 하고 있다. 그러나 오유권의 소설은 다르다. 그것은 이 나라의 가난한 농민이 직접 쓴 흙냄새와 거름냄새와 그리고 그들의 삶의 애환이 진하게 배어 있는 진짜 농민문학인 것이다. 그런 뜻에서 오유권의 문학은 마땅히 재평가되어야 할 값진 의의를 갖는 것이라 하겠다. ‘체험이 바탕된 진짜 농민문학’, 이형기, <농지상한선>, 문학사상사, 1988
작가의 말
눈보라를 뚫고 달려온 인생이었다. 비바람을 헤치며 달려온 나그네였다. 그러나 눈보라와 비바람은 항상 모질고 거센 것만이 아니었다. 때로는 우박이나 진눈깨비가 살갗을 에고 뼈로 스며드는가 하면 때로는 밤새 소복히 내린 하얀 눈이 가슴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고 때로는 창살 같은 폭풍우가 온 몸을 후려치는가 하면 때로는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가 여수를 자아내게 하기도 하였다. 나는 인생이란 필경 자아와의 투쟁이 아닌가 한다. 자기를 이기는 것, 자기 환경을 창조하는 것이 나그네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불행에 부닥치더라도 낙담하지 말고 반드시 새로운 진로를 구하여 운명의 회전을 도모하자.” 이 운명의 회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많은 시련을 겪었다. 국민학교를 나온 것만도 다행한 나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급사 생활을 하고 그 틈틈이 강의록을 사서 공부를 했다. 통신학교에 들어가서는 안 굶어죽을 정도의 밥에 모진 기합이라는 기합은 다 받고 문학에 눈뜨면서부터는 하루 평균 너덧 시간의 잠을 자면서 구년간을 수업했다. 펜촉 살 돈이 없어서 다 일그러진 펜으로 글을 쓰고 석유가 없어서 호롱불을 마음대로 못 켠 적도 있었다. 군에 복무하면서도 책과 원고지는 손에서 떠날 새가 없었고 우리 말을 익히기 위해서 사전을 세 번 베꼈다. 어머님께 의존하면서도 내 붓은 쉴 날이 없었던 반면 그 수입이란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의 문학을 향한 정열은 일편단심, 신앙과 같은 것이어서 1955년 문단에 등단한 이래 백 오십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영광의 길이자 고난의 길이었다. (……) ‘머리말’, 오유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갑인출판사, 1980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20세기 한국소설 : 하근찬·한무숙 외>, 최원식 외 편, 창작과비평사, 2005 <농지상한선>, 오유권, 문학사상사, 1988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오유권, 갑인출판사, 1980 <송잇골의 젊은이들>, 오유권, 문리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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