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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작품명
향수
저자
조벽암(趙碧巖)
구분
1930년대
저자
조벽암(趙碧巖, 1908~1985) 본명은 중흡(重洽). 1908년 10월 9일 충북 진천 출생. 경성제이고보를 거쳐 경성제대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 시에 <문학타임즈>를 발행하여 문학활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화신연쇄점 직물부에 취직하기도 했으나 문필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시와 소설, 평론 등을 발표하였다. 1931년 8월 소설 <건식의 길>과 10월 시 <구고를 사르며> 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1934년 구인회에 가담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1938년 이문당에서 첫 시집 <향수>를 간행했다.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하면서 1947년 고리키의 <문학론>을 번역 출간하였고, 시집 <지열>(1948)을 간행했다. 그의 시세계는, 시집의 제목이 보여주듯 1930년대 시의 일반적 경향이었던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향수를 노래하는 경향과 광복 후 새로운 조국건설의 열망을 표현한 <지열> 계열로 크게 대별된다. 한편 그의 소설은, 1930년대 전반기의 프로문학적 경향과 전향기에 처한 지식인의 자기 고민을 그린 1930년대 후반기의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로는 1933년 <비판>에 발표된 <농군>을 들 수 있는데, 이 작품은 프로문학의 목적의식성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예로는, 굶주림에 지쳐 면서기로 취직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는 지식인의 모습을 그린 <취직과 양>(1937)을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리뷰
(……) 식민지 시대 특히 30년대의 시인들은 고향 상실감을 혹독하게 경험하였다. 30년대의 우리나라 현실이 이런 징후를 낳게 했는데, 이들에게 있어 고향은 단순히 그들의 육신이 나고 자란 장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 공동체가 허물어지기 이전, 그들 정신 속의 안식처이다. 그러므로 이들 시인에게 있어 고향이란 그들의 정신 속에 숨어 있는 과거의 어느 지점에 대한 그리움인 것이다. 그러나 조벽암에게 고향은 이들과 달리 동경 속의 가상적 공간인 것이다. 백석의 시에 나타난 고향처럼 어린 시절의 유희와 입맛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현실적인 공간이 아니라 현실에 안식할 수 없는 자가 꿈꾸는 상상적 공간인 것이다. 현실에서 조벽암은 ‘나그네’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가 느끼는 향수는 나그네의 여수(旅愁)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조벽암은 언제까지나 동경의 세계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차차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한다. (……) 조벽암 초기 시에 나타난 존재에 대한 갈등과 거부, 이에 따른 동경은 현실에 대한 도피가 아니라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이런 과정은 현실인식의 한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여정을 거친 후 조벽암은 해방 후 사회의식이 분명한 작품을 창작하게 된다. 해방기는 36년간의 식민지 억압에서 해방된 기쁨과 독립국가를 수립하려는 민족의 노력이 결국 수포로 돌아간, 희열과 비극이 교차하던 시기였다. 역사가 너무나 가까이 다가올 때 사회 집단 내부에서는 막연한 희망과 이데올로기가 넘쳐 오른다. 시집 <향수>가 젊음의 방황과 진정한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한 모색과 동경의 세계였는데 비해 <지열>은 ‘인민적 진실과 조국적 진실이 한 덩어리가 되어 가는 데서’ 시의 의미를 찾고자 하고 있다. 시집 <향수>의 작품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단지 젊음의 방황과 자기중심적 관념만으로 칠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에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강렬한 반론과 거기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변모가 비록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정신적 추이의 폭은 너무나 큰 것이었다. 일본의 강제 점령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그에게는 그만큼 큰 영향력과 어떤 확신을 가져다 준 것이라 볼 수 있다. (……) -‘해설 : 혼돈과 동경으로부터의 길 찾기’, <조벽암 시전집>, 이동순·김석영 공편, 소명출판, 2004
작가의 말
(……) 보통학교 다닐 시기에는 집안이 다소 풍유한 편이었다. 그러나 구투에서 신사조로 견주어 가는 과도기에 있어서의 모든 갈등 속에서 헤맸다. (……) 한 편으로 변혁되어가는 사조의 고집과 타도, 한 편으로 기울어져가는 살림살이-소지주에서 몰락하여가는 고민상,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신구식 애정문제를 싸고도는 시앗싸움, 이혼 재혼의 소동 속에 넘쳐 흐르는 증오와 애비(哀悲), 우수와 발악의 와중에서 어리다는 핸디캡으로 방관의 자유의 건(鍵)을 가진 나는 그만치 여러 가지 풍습과 그만치 여러 가지 곡절을 비판적이 아니라 맹목적이면서도 인상적으로 관찰하고 평하였던 것이다. (……) 고보 삼학년까지는 보교 적만치도 책을 읽지 못했다. 그것은 그때 거처하는 곳의 정세로도 그러했지마는 군인으로서의 아버지는 공부보다도 몸의 건강을 항상 세차게 하도록 하였다. (……) 또 갑자기 어려워진 학교공부에 얽매어 다른 데까지 돌볼 사이가 없었다. 고보 삼학년 때에 동경서 돌아온 삼촌 포석 씨는 서울서 살림을 하시며 <조선지광>, <예술운동>, <개벽> 신문 등에 연신 작품을 발표하셨다. 나는 하나도 빼어놓지 않고 다 주워 읽었다. (……) 결백한 점, 소탈한 점, 인감(忍堪)하는 점, 진실한 점 이 모든 점에 있어서 나는 삼촌을 누구보다 따랐다. 내가 고보 오 년에 진급한 때이다. 하루는 나의 상급학교 선택 문제를 상의한 때에 “너는 어느 것을 제일 좋아하느냐?” “문학이여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하였다. “아서라! 문학은 밥을 굶는다. 더욱이 조선서는” “그렇지마는 밥 굶는 것이 무서워서 설마 못할까요?”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마는 밥을 굶는 것도 어려운 일이니까. 설마가노- 두려운 것이니까.” 하시며 포석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어느 새에 나왔는지 모르게 굵은 눈물 방울을 덤벙 볼을 씻어 흘리신다. (……) 나는 말없이 삼촌 집을 나와 경복궁 담을 끼고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어스름 황혼이었다. 나의 가슴의 이상과 동경의 추는 오르락내리락하였다. (……) ‘나의 수업시대’, 조벽암, <조벽암 시전집>, 소명출판, 2004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조벽암 시전집>, 조벽암, 소명출판, 2004 <한국현대대표시선 1>, 민영·최원식·최두석 편, 창작과비평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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