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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화

작품명
산화
저자
이성교(李姓敎)
구분
1960년대
저자
이성교(李姓敎, 1932~) 1932년 11월 29일 강원도 삼척 출생. 국학대학을 졸업한 후 1964년 중앙대 대학원을 마쳤고, 성신여대 국문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현대문학상신인상(1966), 월탄문학상(1979)을 수상하였다. 1957년 <현대문학>에 시 <윤회>, <혼사>, <노을>이 서정주에 의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60년대사화집> 동인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1965년 첫 시집 <산음가>를 발간한 이래 <겨울바다>(1971), <보리 필 무렵>(1974), <대관령을 넘으면>(1984), <하늘가는 길>(1989) 등의 시집과 <현대시의 모색>(1982), <한국 현대시 연구>(1985), <한국 현대시인 연구>(1997) 등의 평론집을 간행하였다. 그의 시는 전통을 바탕으로 한 정서를 추구하였으며, 강원도의 향토성을 반영하고자 노력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리뷰
미당 서정주선생께서 주례를 맡고, 재삼(在森)과 나와 성춘복 씨가 들러리를 선 셈이다. 우리네 시인들은 시로써 먼저 통성명을 한다. 내가 성교형의 시를 대하기는 10년이 가깝고, 사람과 사귄 지는 1년 남짓 된다. 내가 문단에 적을 둔 이후의 미당 추천의 동문만 하더라도 개인 하늘의 성군(星群)만큼이나 많다면 많겠으나, 나는 유난히 그의 첫 작품을 잊지 않고 있다. 날더러 그의 시를 논하라면 이 한 마디로 족할 것이다. 사람과 친해보니 결코 그의 시가 사람보다 과장(誇張)된 것이 없었다. 글 쓴다는 인연 하나로 그동안 수없이 친구도 얻었고, 또 친구를 잃었다. 허물이야 뉘게 있건 외롭게 슬픈 일이다. 성교형과 나와도 앞일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같아서는 내 눈에 흙이 들 때까지 놓치고 싶지 않다. 그가 내게 물질을 베푼 일은 없다. 그 따뜻한 마음씨가 내 혈관에 스몄을 뿐이다. 세상에서 남의 의욕을 꺾는 것처럼 잔인한 일은 없다. 그것은 마치 간접교인(間接敎人)과 같다. 가령 시인에게 시를 만류한다거나, 서울서 살겠다는 사람을 시골로 가라는 따위가 그에 비길 수 있을게다. 어둔 변두리를 유랑하다 서울 살림을 차렸더니, 몇몇 분을 제하고는 외면 아니면 어쩌자고 왔느냐는 것이 인사였다. 서울 인정은 섣달 그믐의 들녘 북풍받이니까. 이때 좋은 이웃이 되어 같이 살아보자는 한 사람이 바로 이성교형이었다. 그가 시집을 낸다는데 내가 무엇을 아끼랴. 없는게 한(恨)이구나. 그도 나같이 추세를 모르는 친구였다. 기쁘다. 이 시집이 나오는 그 하루만이라도, 구름아 태양 가까이 서성대지 마라. 꽃도 내년 봄을 당겨서 맘껏 피어주렴. 내가 거리에 나서서 까닭 없이 눈 흘기는 사람 앞에 미소지음은 이 시집 탄생의 여덕이리라. '발(跋) 1', 이동주, <산음가(山吟哥)>, 문학사, 1965내가 이성교형을 처음 만난 것은 어느 해질 무렵의 서정주 씨 댁에서였다. 그러니까 10년 전의 일이다. 그때는 그는 볼이 불그스레 연시빛을 띠고, 무척 수줍음이 많은 듯하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그때 만났을 때의 이형이나 오늘 술자리에서 만난 이형이나 하나도 다른 것이 없는 걸 보고 물정 모르는 나는 새삼 놀란다. 아직도 장정을 상하지 않은 소년티의 순정과 물같이 담담한 심성. 이러한 이형의 사람됨과 마찬가지로 그의 시작의 태도도 또한 변하지 않는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 오고 있었다. 많은 시인이 시류를 타고 앞장서 깃발을 드는 형편에도 그는 조용히 숨어서 비단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산화(山火)로 “산나물이 타지 않을까” 염려하고, “서러운 것들로 먼 산 바라던 곳”에 관심하고, “바람에 묻어오는 염불 소리를 듣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남다른 은공을 쌓음으로 하여, 그는 마치 그가 태어난 강원도 산골과 같은 구석지고 서러운 정한의 세계를 독특하게 펴 보인 유수한 시인이 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는 우렁차고 거센 흐름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실개천의 흐름처럼 미약한 것일지라도, 맑고 조촐한 가락을 뽑았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 된다. 또한 그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감이라 할까 한이라 할까 하는 것이 깔기 마련인 절실성이 그의 입지적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공감으로 이끌어 들이는 강도가 그에게는 있다. 이번의 이 시집은 그가 10년 경작에서 거둔 알찬 작품 중 간추릴 것을 간추려서 내는 첫 작품집이니, 작품도 작품이지만 같은 길을 걷는 친구로서 마음이 더 없이 기쁘다. '발(跋) 2, 박재삼, <산음가(山吟哥)>, 문학사, 1965성교형의 시집, 그것은 우리 일상의 마음들을 온전하게 한 다발로 묶은 것이 되겠다. 오랜 서울살림에도 강원의 풍물을, 경포대가 굽어보는 펼쳐진 바다가 아니라 쳐다보면 볼수록 치솟아 있는 태백, 그 줄기에서 튼 마음을, 향토를 잊지 않고 고스란히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표제도 그러하듯이, 음험한 바다보다는 산을 향했고, 돌아서서 볼 때마다 높아져 가는 그 높이만큼이나 키워온 것이 곧 성교형의 시이다. 그 높이는 결코 멋모르는 촌스러움도 아니며, 버려진 감상적인 유산도 아니고, 언제나 담담하고 밝은 빛깔의 메아리이다. 그 밝은 빛깔이 와 부딪쳐서 숨은 사연들을 속삭이기도 하고, 또 토속적인 내음을 피워내어 우리를 일깨워주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적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독자를 가진 시, 즉 읽히는 시란 오늘날 그리 흔하지 않다. 그런 책임의 대부분이 우리 시인들에게 있다면, 성교형의 시의 위치는 자못 중하다고 생각된다. 먼 산불을 보면 좋은 일을 보리라는 단순한 미감에 앞서 산나물이며 선영이 오히려 더 걱정되고, 어쩌다 바다로 눈을 주면 비극적인 일이 선하여 돌쳐서버리는 노파심, 그보다 아리랑은 못 불렀지만 그러나 눈물보다 더 단 막걸리.이런 설움도 곧잘 풀 줄 아는 성교형은 어디에 있으나 고향의 사람이며, 그 시 역시 고향의 시이다. 그렇기에 언제고 우리 안 어느 곳에 자리하여 밝게 빛날 것이며, 그 잔잔한 번쩍임의 세계는 잊혀지지 않으리라. '발(跋) 3', 성춘복, <산음가(山吟哥)>, 문학사, 1965
작가의 말
(……) 나는 한때 또다시 나를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작품도 1년에 대여섯 편밖에 안 썼다. 그저 한 작품이라도 남에게 심금을 울려줄 작품을 알차게 쓰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더욱 시의 뜨거운 불길 속에서 살게 된 것은 <60년대 사화집> 동인 때부터였다고 생각된다. 그야말로 젊은 엘리트들로 구성된 경쟁의 무대였기 때문에 뭐라도 소홀할 수는 없었다. 나는 매일같이 시를 생각하며 좀더 좋은 시를 쓰기 위하여 남다른 진통을 겪었다. 시는 기교로 되는 것이 아니고 궁극에 가서는 체험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틈날 때마다 여행을 많이 했다. 정신적으로 김삿갓이 되어 세상 만사를 직접 몸에 익히고 싶었다. 그리하여 문단 데뷔 10년 기념으로 1965년 첫 시집 <산음가>를 냈다. (……) 첫 시집 <산음가>를 엮고 난 다음 나는 또 다른 고민을 했다. 좀더 내적인 충실을 기하고 싶었다. 즉 종전의 리리시즘에다 현실 참여 문제 같은 것도 곁들여 되도록이면 살아가는 내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격한 소리를 피해, 조용한 목소리로 강원도 사람들의 생활상을 노래하고 싶었다. 사실 나는 그 동안에 내 작품세계에 철학성을 많이 부여하려고 했다. 이것이 애초에 내가 노래한 강원도의 토속미와 어떤 연관을 갖는지는 잘 모르지만 되도록이면 과거의 세계를 탈피하려고 애를 썼다. (……) 1971년 하반기에 한국현대시인선집으로 한국시인협회에서 내준 제2시집 <겨울바다>를 냈다. 이 시집은 내 나름의 속셈이 있었다. 그것은 바다를 소재로 한 시를 한데 모으고 싶었다. 으레히 강원도하면 산골을 연상하는데 내 자란 고향은 차라리 산간지대라기보다는 어촌지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내 시엔 이러한 생활을 바탕으로 한 시가 꽤 많았다. (……) 그 후 3년 후인 1974년에 제3시집 <보리필 무렵>을 출간했다. 여기엔 <춘궁기>를 비롯한 42편이 수록되었다. 이 시집은 오히려 종전의 토속적인 세계를 더 짙게 나타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한테 강원도의 서정을 끈질기게 노래하고 있다고 얘기를 들었다. (……) 이 이후 내게는 생활의 큰 변화가 왔다. 그것은 신앙을 바탕으로 한 생활 때문이었다. 종전의 시세계에다 믿음의 빛을 하나 더한 셈이다. 1979년 네 번째 시집 <눈온날 저녁>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 이상으로 짧게나마 내 문단편력을 더듬어봤다. 한마디로 부끄러운 길이었다. 큰 성과는 없었지만 한 가지 고집은 있었다. 그것은 오직 한 곳으로 걸어왔다는 것이다. 그 한 곳은 고향의 노래였다. 내가 부른 고향의 노래가 남보기엔 낡았든 새롭든 아무 상관이 없다. 그 노래는 곧 내 성장의 노래였으니까. 앞으로도 나는 이 길을 꾸준히 걸어갈 것이다. ‘나의 문단 이력서’, 이성교, <영혼의 닻>, 형설출판사, 1982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영혼의 닻>, 이성교, 형설출판사, 1982 <산음가>, 이성교, 문학사,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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