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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춤

작품명
바라춤
저자
신석초(申石艸)
구분
1950년대
작품소개
신석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장시. 이승의 내적 갈등을 다룬 작품으로서 동양정신과 서구시적 요소의 이중적인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바라춤>은 70여 행의 서사(序詞)를 포함해서 모두 402여 행에 달하는 장시이다. 그리고 <바라춤 서사>는 1930년대 후반에 써서 <문장>(1939)에 발표된 것이고, 시 <바라춤>은 시집 <바라춤>을 통해 처음으로 발표된 것으로 시집 <바라춤>이 나오기까지는 그 최초의 구상부터 완결까지 1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셈이다. <바라춤>은 승무(僧舞)이다. 따라서 이 시에는 불교적 사상이 바로 불교적 언어를 통해 표현되고 있지만, 방법론적으로는 여전히 발레리적 엄밀성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청산별곡(靑山別曲)>을 비롯한 고전시가의 운율(韻律)을 대담하게 원용하고 있다. 시집 <바라춤>은 전통적 정서에 기반을 두고 거기에 현대적 지성을 가미하여 독특한 조화의 세계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시사적 중요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저자
신석초(申石艸,1909~1975) 충청남도 서천 출생. 본명은 응식(應植), 일명 유인(唯仁), 호는 석초(石艸) 혹은 석초(石初).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한학을 공부하다가 192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신병으로 중퇴하였다. 이 무렵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으며,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철학과에 입학,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아 카프(KAPF)의 맹원으로 활약하였다. 이 무렵 프랑스 문학 특히 발레리에 크게 심취하였으며, 1935년에는 <신조선(新造船)> 편집일을 맡아보았고, 1948년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1954년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1957년에는 논설위원 겸 문화부장에 취임하였다. 그뒤 예술원회원(1960), 한국시인협회회장(1965), 한국문인협회시분과 위원장(1965~1966)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문단활동은 1931년 신유인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일보>에 <문학창작의 고정화(固定化)에 항(抗)하여>를 발표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논문은 볼셰비키화한 카프의 창작방법론 강요에 항의하는 내용으로서, 카프의 창작방법론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사상적 고민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박영희(朴英熙)의 전향선언과 함께 1934년 카프의 해산과 함께 관계를 끊었다. 1935년 무렵부터 이육사(李陸史)와 알게 되어 막역한 지기(知己)가 되었고, 서정주(徐廷柱)·김광균(金光均)·윤곤강(尹崑崗) 등과 함께 1937년 <자오선(子午線)> 동인으로 참가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다. <호접(胡蝶)>·<무녀의 춤>을 <자오선> 1호에 발표하였고, 이어 1939년 <시학(侍學)>지에 <파초(芭蕉)>(1호)·<가야금(伽倻琴)>(2호)·<묘(墓)>(4호) 등을 발표하였다. <문장(文章)>과 <인문평론(人文評論)>이 폐간되자 침묵을 지킴으로써 친일문학에 동조하기를 거부하였으며, 광복과 더불어 1946년 제1시집 <석초시집(石艸詩集)>을 간행하였다. 이어 1959년에는 제2시집 <바라춤>, 1970년 제3시집 <폭풍의 노래>, 1974년 제4시집 <처용(處容)은 말한다>와 제5시집 <수유동운(水踰洞韻)>을 간행하였다. 대체로 엄격한 구성과 고전적 심미성을 추구하는 작품세계를 전개하여 왔는데, 이러한 작품세계는 발레리와 노장사상 사이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구축되고 있다. 즉, 사고의 조직성을 추구한 발레리의 엄밀성과 명석성을 형태적인 바탕으로 삼고, 여기에 노장사상의 출세간적달관(出世間的達觀)의 경지를 담아 보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라춤>으로 1969년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리뷰
(……) 석초에게 있어서 시에의 몰입이란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지적인 것이다. 그는 시라는 문학형식을 단순한 감정이나 인식의 표출만으로 생각지 않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전 인격을 기울여서 이루어내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또한 시와 시인, 예술과 삶을 완전히 분리시키지 않으면서 시란 그 독자의 질서와 체계를 갖고 완결되어야 할 미적 양식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의 시정신의 근저를 형성하는 이러한 특색은 뚜렷한 주제의식과 이에 대한 쉼없는 탐구로써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지속적인 탐구는 끊임없는 퇴고와 개작의 양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장시 <바라춤>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 작품의 서두는 처음 1941년에 발표될 때에 ‘서사’라는 꼬리표가 붙지 않고 그냥 <바라춤>이었다. 그러나 14년 후인 1955년에 ‘본사’에 해당하는 부분이 씌어지게 되면서 자연히 앞부분은 ‘서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본사의 방대한 분량에 의해 이 작품은 장시 형태를 이루게 된다. 석초는 서사와 본사를 합본하는 자리(시집)에서 본사를 제작하게 된 그간의 경위를 간단히 밝히고 있다. “바라춤은 승무다. 나는 유현하고도 아름다운 이 춤을 보고 일편의 장시를 써보려고 하였다. 가야금산조와 <청산별곡>이 나로 하여금 우연히 <바라춤 서사>를 제작케 하였다. 장시를 쓰게 된 것은 훨씬 뒤인 근래의 일이다. 시작을 폐하고 있던 십여 년 동안 나의 뇌리에는 이따금 이 춤의 영상이 떠오르곤 하였다.” 경위는 간단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길고 복잡하다. 이 속에는 14년의 긴 시간과 춤과 음악적 여요가 어우러져 있다. 하나의 주제에 대한 시인의 집착과 그것을 형상화하는 시인의 노력은 이처럼 종합적이다. 그러나 시(특히 <바라춤>)에 대한 시인의 애착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에 대한 개작의 과정은 집필에 못지않게 복잡하다. 서사와 본사 모두 두 차례 이상의 퇴고를 보여주고 있고, 시집 <바라춤> 수록분에서 총 421행으로 완결된 이후에 시인이 다시 자필로 개작한 최종 추고본이 있다. 또 다른 예로서 <비취단장>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밀도(密桃)를 준다>와 더불어 석초의 처녀작으로서 1935년에 발표되었다. 이후 제1시집과 제2시집에 수록되면서 그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외적 변모는 당연히 시적 대상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내포하는 것이다. (……) 석초의 작품 내적인 변모는, 그의 시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시학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멋설(設)’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직선보다는 항상, 곡선에 멋이 있다. 그러나 또 과도하게 곡절(曲折)된 물체는 결점밖에 볼 수 없다. 또 정지의 상태보다는 동작의 상태에 더 멋이 있지만, 그러나 과도히 움직이지 않는 율동의 상태에서라야만 더 멋을 느낀다.” 여기서 석초는 직선과 곡선, 운동과 정지의 동시적 조화, 또는 양자의 종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의 미학은 극단의 동시적 형식인 ‘표풍에 흔들리는 수목의 가지’와 ‘춘풍에 흔들리는 수류(垂柳)’에 귀결된다. 여기에는 바람과 나무를 분리해서 이해한다면 어떤 아름다움도 일어나지 않는다. 바람은 나무가 있음으로 해서 그 존재를 드러내고,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때에 비로소 최상의 미감 속에 자리잡는다. 예술작품은 동질적인 요소들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이질적인 요소들이 서로 충돌하여 갈등하고 긴장하는 양식으로 나타난다. 이 이질적인 요소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종합되고 통일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다양성과 통일은 서로 배치되는 듯하면서 가장 예술적인 모습으로 화해할 수 있는 역동성을 갖는다. 이른바 ‘다양성의 통일’이라는 문학적 대명제에 대해 석초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이해했는지는 밝히기 어렵지만 위의 몇 줄의 서술로도 이 명제에 대한 석초의 직관을 헤아릴 수 있게 한다. 또한 그가 우리의 전통이나 서구적인 것조차도 그의 속에서 문학화하려 한 노력이, 곧 ‘독자의 사상, 창조의 사상’에 연유한 것임을 알게 한다. ‘신석초론’, 김은자, <바라춤>, 미래사, 1991
작가의 말
나는 과장하는 말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나의 시작의 비밀은 나의 작품 그것이 무엇보다도 잘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각각 그것에서 각자의 상이한, 또는 비슷비슷한 견해를 이끌어낸다. 이것 없이는 세상의 문학평론가들이 할 일도 없어지는 셈이다. 발표된 작품이란 벌써 자기의 것은 아니라고 발레리는 말하였다. 그것은 독자의 것이다. 독자들에 의하여 독자들의 관견에 의하여 독자들의 견식에 의하여 그 취미성에 의하여 향수되고 그리고 거기서 각자 자기다운 그럴 듯한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는 <바라춤>과 <처용은 말한다>를 발표하고 많은 세평을 들어왔다. 그 중에는 지나치게 칭찬하는 사람도 있었고 부당하게 헐뜯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괘념하려고도 않았고, 또 괘념하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칭찬하는 사람이나 나를 헐뜯는 사람이나 어떠한 짐작에서 나오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시 작품이란 하나의 우연에서 산출된다. 그것은 어떠한-자기도 생각지 않은-예감에서 떠오르는 시적인 구성이라든지 소재의 연마라든지 언어의 조탁이라든지 하는 수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작은 처음부터 의식적인 어느 목적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보다도 우발적인 계기에 의해서 탄생된다. 물론 그 밑바닥에는 작자의 에스프리라는 것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보다 잠재적인 것이다. 산문과 같이는 하지 않는다. 굳이 말한다면 시 작품은 시인의 경험에서 얻은 감각에서 발생한다. 일찍이 앨런 포우는 이것을 우주적인 감각이라고 하였다. 나는 여기서 조금도 모호한 말을 하지 않으련다. 포우가 말한 우주적인 감각이라는 말은 하등 신비성을 내포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인이 시를 낳는 상황, 그것의 단초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우주적이란 이 어휘도 현대에 있어서는 훨씬 다른 이미지를 부여한다. 우주 그 자체가 현대인에게는 감각적인 대상이기보다는 계량되고 가견적인 실체로 영상되고 지적인 폭을 넓혀가고 있을 뿐이다. 모든 작품 정신은 결국 작자의 생활 경험교양습성, 그의 시대성에서 초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작도 이 같은 정신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나도 영감이란 말은 그다지 믿지 않고 있지만 어쨌든 시의 우발적인 탄생도 필경 시인의 재능, 그의 지식, 독서의 경험에서 쌓은 사상의 결과인 것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내가 한 편의 시 작품을 이루었다고 하면 거기에는 나의 소망, 또는 몇 권의 책에서 얻은 조금씩의 영향이 작용한 셈이다. 나는 생래로 순수한 한국적인 가정-이렇게 말하는 것은 인습이 어디보다도 완고했기 때문이다-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처음에 한학적인 학습, 특히 시에 있어서는 시전(詩傳)과 당시(唐詩)로부터 시작했다. 그 다음에 서구의 시에 접했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야 다시 되돌아와 우리의 시가인 향가나 고려가사나 시조 등을 섭렵하였다. 이러한 나의 경험은 나의 작품 가운데에 일종의 정신의 혼합물을 담아 온 셈이다. 한편에는 동양적인 혹은 한국적인 어떤 것, 또 한편에는 서구적인 것, 그리고 대별하여 두 개의 정신적 패턴은 서로 상이한 얼굴을 하고 상극하고 길항하여 하나의 오뇌하는 야누스의 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나는 정신의 이 창해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려 하나 좀처럼 나르시스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처용 시 가운데서 나는 이 같은 자기의 상모를 나타낸 셈이다. 그러나 내가 못내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시가에는 전형적인 고전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오해되기 쉬운 말이다. 우리 시에는 운률의 고전적인 제약성도 규격도 없다. 시조가 하나의 정형을 보여주고는 있으나 너무 단시형이기 때문에 적용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일은 우리 시작에 새로운 영역을 남겨 놓고 있는 것만 같이 생각된다. (……) ‘나의 시 정신과 방법’, 신석초, <바라춤>, 융성출판, 1985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신석초 연구>, 조용훈, 역락, 2001 <바라춤>, 신석초, 미래사, 1991 <바라춤>, 신석초, 융성출판, 1985
연계정보
-신석초(申石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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