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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시집

작품명
요한시집
저자
장용학(張龍鶴)
구분
1950년대
개요
1955년 <현대문학> 7월호에 발표된 장용학의 단편소설. 작가가 스스로, 피난지 부산에서 우연히 사르트르의 <구토>를 접하게 되면서 충격을 받고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제재로 활용하여 만든 작품이라고 밝히고 있다. 전쟁포로 누혜가 철조망에 목을 매고 죽기까지의 생애를 그린 작품으로 서술에 있어서는 사건보다 등장인물의 의식추구에 더 많이 치중했다. 이 작품은 토끼의 우화와 극한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의 행동을 복합 플롯으로 엮어 놓았다. 토끼의 우화, 동호의 눈을 통해 본 누혜의 비극적 삶 및 누혜의 유서, 동호의 세계인식이라는 세 부분을 통해 1950년대의 본질적 모순 중의 하나인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탐구하고 그것의 기만성을 폭로한다. 이 소설은 관념을 소설화하기 위해 우화, 에세이, 그리고 비소설적인 문장을 소설 속에 끌어들여 기존의 소설 문법에서 벗어나 있다. 장용학의 소설 기법은 종래의 소설적 관행과는 달리 관념과 이야기와 에세이와 우화를 소설이라고 하는 하나의 그릇에 동시에 담아 놓은 색다른 것이다. 그것은 관념의 소설화라는 창작 경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줄거리보다는 관념이나 존재 자체를 그대로 제시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한다.
내용
1. 토끼의 우화 깊은 산속 굴에 토끼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바깥 세계를 동경하기 시작한 토끼는 창 쪽으로 발돋움해 그 쪽으로 손을 대었다가 무지개빛이던 방안이 까맣게 되고 쓰러지는 경험을 한다. 며칠 동안 일어나지 못하던 토끼는 그 창을 통해 나갈 수 없을까 하는 ‘위험한’ 사상을 품게 되었다. 토끼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면서 창을 통해 바깥으로 기어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바깥 세계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토끼는 태양 광선을 견딜 수 없어 눈이 멀고 쓰러져버렸다. 토끼는 그후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뜨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영영 잃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 토끼가 죽은 후 그 자리에 버섯이 났고 후예들은 그것을 ‘자유의 버섯’이라고 부르며 그것에 제사 지냈다. 2. 상(上) ‘나’(동호)는 누혜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하꼬방(판자집)으로 찾아간다. 나는 포로 수용소인 섬에서 누혜를 만났고, 벗이 되었다. 누혜가 죽은 뒤로 나는 배가 오기만을 기다렸지만, 자유는 오히려 무거움, 또 다른 포로 수용소의 문에 지나지 않았다. 하꼬방에는 중풍 걸린 누혜의 어머니가 있다. 노파는 아사에 직면한 채 고양이가 잡아다 주는 쥐를 먹으며 연명하고 있었다. 나는 쥐를 빼앗아 고양이의 면상에 팽개치곤 노파의 가슴으로 엎어진다. 그리고 노파의 손목에 매달려 어린애처럼 어머니를 부른다. 등골이 시려온다. 노파의 식은 피가 내 혈관으로 흘러드는 것이다. 이윽고 ‘누혜’를 부른 후 노파는 죽는다. 3. 중(中) 누혜는 괴뢰군이었다. 그는 누워 푸른 하늘을 쳐다보기를 좋아했고, 봉황새나 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고 싶어했다. 수용소 안에서의 생활은 전쟁과도 같았다. 인민의 영웅이었던 누혜는 타락한 인민의 적으로 몽둥이질, 발길질을 당했다. 그는 어느날 “나의 열매는 익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열매를 감당할 만큼 익지 못했다··· 영원히 익지 못할 것이다! 내게는 날개가 없다”고 말하고, 철조망에 목을 매 자살한다. 4. 하(下) 누혜의 유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생을 살리는 오직 하나의 길은 자유가 죽는 데에 있다.”, “자살은 하나의 시도요, 나의 마지막 기대이다. 거기에서도 나를 보지 못한다면 나의 죽음은 소용없는 것이 될 것이고, 그런 소용없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생이라면 나는 차라리 한시바삐 그 전신을 꾀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어둠 속에서 고양이는 나를 노려보고, 자기를 잡으려는 나의 손을 피해 고목나무 가지 위로 올라간다. 나뭇가지에 웅크리고 앉은 고양이의 윤곽이 까만 동화처럼 달 속에 걸려든다.
저자
장용학(張龍鶴, 1921~1999)1921년 4월 25일 함북 부령 출생. 1943년 일본 와세다대학 상과에 재학 중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하였다. 1947년 월남하여 한양공고, 무학여고, 경기고 교사로 재직했으며, <경향신문>, <동아일보>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49년 <연합신문>에 <희화>를 연재하기도 했으며, 1950년 단편 <지동설>이 <문예>에 추천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단편 <찢어진 ‘윤리학의 근본문제’>, <요한시집>, <비인탄생>, <현대의야> 등을 발표하면서 독특한 소설적 방법을 선보인다. 1962년 소외된 인간 군상, 즉 현대문명으로 파괴되어가는 인간상을 그린 장편소설 <원형의 전설>을 <사상계>에 연재하였다. 작품집으로는 <원형의 전설>, <유역> 등이 있다. 그의 소설적 방법은, 체험을 서사적 방법으로 제시하기보다는 관념을 캐리커쳐식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법 속에 숨어 있는 장용학 소설의 주제는, 현대인의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고발과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이며, 그는 이를 관념적 문제로 진술하고 있다. 장용학은 관념소설이라는 새로운 계보를 만들어낸 작가이자 한국전쟁을 세대적 자의식으로 인식하여 그 시대상을 소설적으로 드러내려고 노력한 소설가로 평가받고 있다.
리뷰
(······) <요한시집>은 다르다. 그 다른 점을 적기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을 것이다. 첫째, 독자가 작품 속의 질서에 쉽게 말려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도 소설인가?’, ‘이런 작품도 있을 수 있구나!’하는 놀라움이 그것이다. 가장 초보적인 독자라도 얼른 느끼게 되는 이 이화감이나 개념적 반성이, 오늘날의 한국 문학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 제기의 여러 양상에 있어서 과연 어느 만큼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다른 자리에게 심각한 검토를 받아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소설 외적인 여러 요소의 대담한 차용이다. 토끼의 우화는 그만두고라도, 에세이 또는 에세이적인 요소의 혼입은 어떤 의미에서건 중요시되어야 한다. ‘그 노예도 자유인이 아니라 자유의 노예였다. 자유가 있는 한 인간은 노예여야 했다! 자유도 하나의 숫자, 구속이었고 강제였다.’라는 투의 소설문장은 결국 관념적 소피스티케이션의 직접적 개입을 초래했고, 그것은 작가에게 한자의 사용을 불가피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이상의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작품을 다른 방법으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즉 이 작품은 과거의 소설방법-스토리, 플롯, 캐릭터, 세팅 등-에 의하여 완전히 해명되지 않는다. 물론 스토리가 있기는 하다. 배경도 있고 사건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누혜’나 ‘동호’의 성격을 재구성해보고 포로 수용소에서의 사건을 음미하고 6·25와 그에 따른 비극적 상황을 생각해보아도, 작품 <요한시집>은 여전히 미지의 땅에 남아 있을 것이다. 요컨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이 어떤 전형적 성격을 창조하거나 신기한 이야기를 묘하게 꾸며서 독자들의 호기심에 영합하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 존재의 근원적 의미와 인간이 그의 환경에 대하여 가지는 본질적인 관계, 그것을 탐구하는 것이 작가 장용학에게는 시급한 과제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과제를 위해서 구태여 종래의 소설 개념에 조화하지는 않았다. (······) 자유도 참으로 인간이기 위한 최종의 장소가 아니라, 그 뒤에 올 ‘진짜’를 위한 가교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자유도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토끼가 태양 광선 때문에 눈이 멀었던 것처럼, 그리하여 누혜는 철조망에 목을 매고 죽는다. 그는 철조망 안에서, 포로들 사이에서 자유의 인식을 얻었지만, ‘자유가 있는 한 인간은 노예여야 했다! 자유도 하나의 숫자, 구속이었고 강제’였기 때문에 새로운 비상을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철조망이 하나의 세계를 의미가 다른 두 개의 세계로 나누고 있듯이, 자유 그것도 인간이 마침내 도달하게 될 목적지가 아니라 ‘가’와 ‘진’ 사이의 경계선이며 그 초소인 것이다. 철조망은 그러므로 매우 역설적이게도 바로 ‘자유’를 상징한다. 그리고 누혜가 그 철조망에 목을 매고 자살했다는 것은 자유에 의한 타살을 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누혜에게 있어서는 ‘비로소 나를 볼 수 있고, 나를 탈출할 수 있고, 안개 속으로 나타나는 세계를 볼 수 있기’ 위한 ‘하나의 시도’요 ‘마지막 기대’였다. 자유 뒤에 오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에 관하여 <요한시집>은 별로 말하고 있지 않다. 작품이 말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하여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요한시집>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동호라고 장용학은 말한다. 사실 누혜의 의식도 많은 부분 동호를 통해서 나타나 있다. 말하자면 누혜는 동호에게 이입되어 있는 것이다. 누혜의 죽음-그것은 자유라는 새로운 벽의 무너짐이며 철조망에서의 탈출이다-은 동호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누혜가 끝나는 장소에서 동호는 시작된다. <요한시집>은 작자의 말에 따르면 ‘동호가 자유의 시체 속에서 부화되어 탄생하는 과정을 그리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 관한 한 동호는 이중적인 기능을 가진 인물로 보인다. 그것은 내레이터로서의 기능과 메시아적인 존재를 상징하는 새로운 주인공으로서의 기능이다. 동호에게 있어서의 의식의 현상학을 분석함으로써, 누혜의 자유 다음에 올 동호의 세계는 어떤 것이라고 장용학이 생각하고 있는지 우리는 아마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세계는 ‘만물은 스스로가 자기의 원인이고, 스스로가 자기의 자[尺度]이다. 태양이 반드시 동쪽에서 솟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는 없다. 늘 새롭고 늘 아침이고 늘 봄이다. 아아, 젊은 대륙······’ 이라는 표현으로써 누혜에게 감격적으로 예감되고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을 가지고 우리는 동호를 통해서 장용학이 말하려고 하는 새 세계의 지도를 그릴 수는 없다. 그러니까 동호는 아직 미지인 채로 남아 있는 인물이며, 이런 의미에서 <요한시집>은 그 타이틀이 암시하듯이 장용학의 작품 세계에 있어서 한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 ‘실존과 자유’, 염무웅, <장용학 문학전집 7>, 국학자료원, 2002
작가의 말
‘자유’의 희생. <요한시집>의 주제는 ‘자유’를 예언자 요한에 비유한 데에 있다. 요한이 나타났을 때 세상 사람들은 그를 구세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 뒤에 올 참된 구세주 예수를 위하여 길을 닦고 죽어야 할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자유’도 요한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유도 구세주는 못 된다. 자유도 그 뒤에 오는 무엇을 위해서 길을 닦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 요한의 말만 가지고는 예수의 모습을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다만 예수가 예루살렘에 나타날 때 요한이 죽은 것처럼, 그 ‘무엇’이 나타나기 위하여는 자유가 죽어야 하고, 죽여야 했고, 죽이려고 한 것이 <요한시집>이었다. (1979) ‘요한시집’, 장용학, <장용학 문학전집 6>, 국학자료원, 2002
관련도서
<장용학 문학전집>(전7권), 장용학, 국학자료원, 2002 <한국 모더니즘 소설>, 문흥술, 청동거울, 2003 <한국 전후문학과 세대: 이어령·장용학·손창섭을 중심으로>, 방민호, 향연, 2003 <현대 소설과 환상>, 박정수, 새미, 2002 <존재의식과 위기의 문학>, 김정관, 푸른사상사, 2002 <한국 전후문학에 구현된 현실인식: 김성한과 장용학을 중심으로>, 최용석, 푸른사상사, 2002 <한국 현대소설의 서사와 형식 연구>, 김한식, 깊은샘, 2000 <한국 근현대 소설 연구>, 김진기, 박이정, 1999 <소설과 언어>, 한국현대소설학회·경원대학교인문과학연구소 공편, 한국현대소설학회, 1997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한국현대문학작은사전>, 가람기획,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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