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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

작품명
균열
저자
김학철(金學鐵)
구분
1940년대
저자
김학철(金學鐵)
생애(1916~2001)
함남 원산 출생. 원산에서 보통학교 졸업. 중국에 건너가 무장독립투쟁 조직인 조선의용대에 가담했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어 복역하던 중 1945년 광복 직후 석방. 서울에서 여운형, 이태준, 이원조, 한효, 임화, 지하련 등과 함께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동하다가 좌익운동이 미군정에 의해 탄압을 받자 월북하였다. <노동신문>, <인민군신문> 등에서 일하다가 한국전쟁 후인 1952년부터는 조선족 자치주 수도인 연길시에 정착하면서 여러 편의 장편, 중편들을 발표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반혁명분자로 몰려 10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1985년에 중국국적을 취득한 후 정식으로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에 가입하여 작품활동을 하다가 2001년 9월 연변에서 사망하였다.
주요작품 및 작품세계
김학철의 문학활동은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문단에 소개되었는데, 특유의 강건한 문체와 도도한 사상성이 전면에 드러나면서도 인간의 삶의 진정성 문제를 간과하지 않는 날카로운 시선이 함께 자리잡은 작품을 통해 평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는 만주 지역의 지주 소작관계에 대한 사회주의적 시각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삶의 기본적인 조건의 문제를 아울러 제시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 <격정시대>, 중편소설 <범람>, <번영>, <항전별곡>, 단편집 <새집 드는 날>, <고민>, <김학철 단편소설선집>,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 산문집 <우렁이속 같은 세상> 등이 국내에서 간행되었다. (······) 전쟁 중 해학적 수법과 훈훈한 전우애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균열>이다. 이 작품은 해방기에 발표된 순서로 보면 4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이지만 사실상 그의 데뷔작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조선의용군의 삶을 형상화하는 그의 작품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것은 이 작품에 대한 윤규섭의 추천사를 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한 번도 면담은 없으나 과거 십 년간 조선과 세계를 위하여 적의 탄우 속에서 살았다는 작자가 끝끝내 문학에서 뜻을 버리지 않은 데 경의를 표한다. 우리 문단도 이런 작자를 얻은 것은 큰 기쁨이다. 첫 솜씨 같지 않은 건실한 필치다. 좀 소박한 데는 대담히 소략해서 그 대신 중요한 장면은 더욱 두드러지게 더욱 인상깊게 꾸며나갈 용의가 부족한 탄은 없지 않으나-그러나 작자가 보이려는 의도는 넉넉히 드러났다. 더 불필요한 데를 깎고 나갈 수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우리 문학의 신개지역이다.(<신문학> 창간호, 1946.4)” (······) ‘역사 증언에의 욕구와 형상화 수준’, 이상갑, <재외한인작가연구>, 고려대학교한국학연구소, 2001(······) 작가 김학철은 1945년 11월부터 1946년 11월까지 서울에서 조선독립동맹 서울시위원으로 정치활동을 하는 한편 10여 편의 단편소설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작품은 입수하기 위하여 힘써 봤으나 작품을 다 입수하지 못하고 네 편만 입수하였다. 그것은 작품 <균열>, <밤에 잡은 부로>, <야맹증>, <담배국>이다. 이 시기 그의 소설 세계를 이 네 편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살펴볼 수밖에 없다. 이 네 편의 작품은 다 조선의용군 용사들을 주제로 하였다. (······) 작품은 언어구사가 아직 잘 세련되지 못한 표현과 지나치고 과격한 표현도 있으나 갈등이 긴장하고 그 갈등은 적과 싸우는 과정에서 해결되며 전우애가 깊어지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물 형상의 성격 창조에서도 김학천과 김시광과 같은 개성적 인물형상을 창조하였다. 그의 인물 형상 창조에서 산인물형상창조수법은 벌써 이 작품에서부터 싹텄다고 말할 수 있다. (······) 그의 처녀작 <지네>는 자료를 입수하지 못하여 분석하지 못하였으나 작가 자신의 말에 의하면 “군공을 많이 세운 어느 용사가 지네만 보면 무서워 쪽을 못쓴다는 우스운 이야기”라고 하였다. 이상 네 편의 작품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벌인 때부터 좌익적인 경향적인 작품을 썼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독립동맹 서울시위원이며 좌익작가들에 의하여 결성된 문학가동맹 기관지나 좌익적인 잡지에 소설을 발표하였다. 둘째로 작가 김학철은 작가이기 전에 항일투사였다. 작가는 해방 전 1936년부터 항일투쟁에 참가하였고, 더욱이 1938년에 조직된 조선의용대, 1941년에 조직된 조선의용군투사시기의 체험은 그의 문학의 샘솟는 원천이 되었다. 이때 창작초기부터 그의 시선은 중국대륙에 돌려졌다. 그뒤 1990년대까지 줄곧 이 주제를 심화해나갔다. 1980년대에 창작된 단편소설 <태항산록>, <전란속의 여인들>, <발가락이 닮았다>, <이런 여자가 있었다>, <밤눈 어두운 사람> 등은 다 항일전쟁 시기의 체험의 문학이고 전기문학 <항전별곡>은 항일전쟁시기 전우들의 전기이며, 장편소설 <격정시대>는 조선의용군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천명한 그의 항일투쟁시기 체험을 집대성한 작품이다. 그러므로 그의 서울시기 단편과 1980년대 단편들은 직접 전기문학 <항전별곡>, 장편소설 <격정시대>로 이어지고 있다. 서울시기 작품은 <항전별곡>, <격정시대>의 원형이기도 하다. 그의 서울시기 창작부터 우리들은 그의 창작적 개성을 보게 된다. 그것은 창작초기부터 조선의용군의 참신한 주제를 들고 나왔으며 인물형상창조에서 산인간의 부각, 별명을 지어 인물형상의 성격적 특질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수법, 에피소드의 삽입, 유모어와 해학적인 수법이 벌써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의 인물형상의 원형은 실재적인 인물을 전형화하는 수법을 썼다. 예를 들면 문정삼은 <항전별곡>에서 문정일이고 <격정시대>에서는 문성일이다. <야맹증>에서의 이지성은 <항전별곡>에서는 이대성이고 <격정시대>에서는 이태성이다. 그의 작품의 주인공은 거개 항일전쟁시기의 전우들을 원형으로 하였다. 그의 서울시기 창작에서 단편 <균열>에서의 김학천과 김시광의 형상, <밤에 잡은 부로>에서의 허준의 형상 등이 그 성격묘사가 비교적 잘 되었다면 <야맹증>, <담배국>의 이지성, 문정삼의 성격창조는 선명하지 못하고 이야기 차원을 넘지 못한 제한성을 가지고 있으며 문학어 구사에서도 가끔 어색하거나 과격한 표현, 군더더기가 있고 간결성이 부족하다. 이러한 결함은 그 이후 창작시기에서 점차 극복되었다. 작가 김학철의 서울시기 소설세계는 위의 제한성이 있기는 하나 광복직후 좌익문단의 주제영역을 넓히고 다채롭게 하였다. 참신한 조선의용군의 주제를 들고 문단에 데뷔했고 개성적인 예술적 수법이 싹트기 시작한 시기이다. (······) <김학철 문학연구>, 박충록, 이회문화사, 1996
작가의 말
1916년에 아름다운 항구도시 원산에서 나는 누룩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 우리 큰아버지는 대서업자였으므로 ‘대일본제국’의 <육법전서>를 성전으로 받들어 모셨다. (······) 그 큰아버지가 나를 훈계하고 있던 바로 그 무렵에 우리 외삼촌의 처남인 안몽룡은 ML파였으므로 ‘치안유지법 위반’에 걸려 서대문 형무소에서 징역을 살고 있었다. 이런 무슨 갈래판인지를 도무지 알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자라던 나는 서울 보성고 재학 중에 이상화의 시에 접하게 된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 부르짖음에 열광한 나머지 나는 그 빼앗긴 땅에서 살아야 하는게 새삼스레 절통했다. (······) 문학지 <조선문단>이 복간됐을 때 나는 자원봉사자로 뛰어들어 심부름꾼이 됐다. 심부름을 다니면서도 은근히 딴마음이 있어 제 주제도 돌보잖고 명색 소설 한 편을 써서 편집부에 디밀었더니 편집장 이학인이 읽어보고 “이봐 총각, 이두 안 나서 뼈다귀 추렴부터 하겠나?” 하는 바람에 나는 도리어 웃음이 나왔다. 등 뒤에서 몰래 어른의 흉내를 내다가 들킨 아이 모양 쑥스러웠다. ‘빼앗긴 땅을 붓으로 되찾지 못한다면 총으로 찾자!’ 그리하여 나는 상해로 건너가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 김원봉의 부하가 돼 반일 테러활동에 나서게 된다. (······) 그후 나는 중앙육군군관학교(교장 장개석)를 거쳐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의 전신)에 입대했다. 그러니까 정식으로 장총을 멘 조선독립군이 된 것이다. (······) 그때부터 긴장한 전투의 나날을 보내던 중에 우습기도 하고 또 한심스럽기도 한 일 하나가 생겼다. 전투중에 우리가 사살한 적병의 배낭 속에서 우리글로 된 ‘수진판’ 책 한 권을 뒤져냈는데 거기에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단편 하나가 수록돼 있었던 것이다. (······) 그후 여러 해가 지나 해방된 서울에서 나는 이태준, 김남천 등을 통해 비로소 그 작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됐다. 그리고 그때 사살한 적병이 우리 동포라 추측하니 왠지 마음이 아팠다. 학도병 같은 무슨 그런 사람이었으리라. 1941년 12월 태항산 항일근거지에서 나는 홍사익 휘하의 일본군과 접전을 하다가 중상을 입고 포로가 돼 일본으로 끌려가 나가사키 감옥에서 그물뜨는 작업을 하다가 같은 복역수인 송지영과 사귀게 되었다. (송지영은 해방 후 한국문예진흥원장 등을 역임했다.) 나를 비국민이라고 극도로 미워하는 감옥 의사가 총상 입은 다리를 치료해주지 않아 나는 3년 동안 내내 고름을 흘리며 고통을 견뎌야 했다. 그러다가 1945년 초 그 못된 놈의 의무과장이 전근이 되는 바람에 겨우 소망의 다리 절단수술을 받게 되니 나는 곧 살 것 같았다. (······) 나는 혁명군인으로서의 출로가 아주 막혀버린 고비에서 문학의 길로 전환할 결심을 내렸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이었다. (······) (해방 후) 서울서 1년 동안 단편소설 명색들을 부지런히 써서 발표하다가 정치정세가 험악해지는 바람에 나는 조직의 결정으로 부득이 월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평양에서는 김사량과 친교를 맺었고, 또 이태준과의 내왕이 잦았다. 그러다가 장편소설 하나 넉넉히 엮을 만한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1950년 가을 북경으로 들어가 중앙문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본격적인 문학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1952년 가을 연변에 조선족 자치주가 성립된 뒤에 나는 역시 아직은 밝히기 어려운 사정들이 있어서 연변에 와 정착했다. 그러나 창작활동은 4년 정도 했을 뿐이다. 1957년 반우파투쟁 때 나는 숙청을 당해 장장 24년 동안 붓을 꺾어야만 했다. (······) <격정시대>가 서울에서 출간되는 것을 계기로 나의 활동영역은 갑자기 넓어졌다. 문학의 정상에로의 등반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이젠 잘 알았지만 그래도 죽을 때까지 이 길을 견지할 작정이다. 민족의 질을 돋워올리는 데 이바지하지 않는 문학이란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런 무의미한 문학에는 정력을 허비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자 신조다. ‘나의 길’, 김학철,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실천문학사, 1994
관련도서
<20세기 한국소설 13: 김학철·지하련 외>, 창작과비평사, 2005 <재외한인작가연구>, 김현택 외, 고려대학교한국학연구소, 2001 <김학철 문학연구>, 박충록, 이회문화사, 1996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김학철, 실천문학사, 1994 <해방 3년의 소설문학>, 김희민 편, 세계, 1987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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