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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결선생(百結先生)

작품명
백결선생(百結先生)
장르
전·전기
작품소개
백결선생(百結先生, 생몰년 미상)은 신라 시대의 인물로 음악가이며 특히 금(琴)으로 이름이 났다. 경주의 낭산(狼山) 밑에 살던 빈한한 선비로 세상의 일을 달관했던 선생의 이야기는 <삼국사기> 열전에 실려 전해지고 있으며 그 내용을 통해 방아타령[碓樂]의 유래를 알 수 있다.
원문
百結先生, 不知何許人, 居狼山下, 家極貧, 衣百結若懸鶉, 時人號爲東里百結先生, 嘗慕榮啓期之爲人, 以琴自隨, 凡喜怒悲歡不平之事, 皆以琴宣之, 歲將暮, 鄰里舂粟, 其妻聞杵聲曰, 人皆有粟舂之, 我獨無焉, 何以卒歲, 先生仰天嘆曰, 夫死生有命, 富貴在天, 其來也不可拒, 其往也不可追, 汝何償乎, 吾爲汝, 作杵聲以慰之, 乃鼓琴作杵聲, 世傳之, 名爲碓樂 <삼국사기> 열전(列傳) 백결선생(百結先生) 조
국문풀이
백결선생(百結先生)은 어떤 내력의 사람인지 모른다. 안산(狼山: 지금 경주(慶州)의 낭산(狼山)) 아래에 살았는데, 집이 매우 가난하여 옷이 해어져 백 군데나 잡아매어 마치 메추라기 달아 맨 것과 같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동리(東里)의 백결선생(百結先生)이라 이름하였다. 일찍이 영계기(榮啓期)*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언제나 거문고를 가지고 다니며 모든 희로비환(喜怒悲歡)과 불평사를 거문고로 풀었다. 세모(歲暮)가 되어 이웃에서는 방아를 찧는데, 그 아내가 방아 찧는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남들은 모두 곡식이 있어 방아를 찧는데 우리만이 없으니 어떻게 이 해를 보낼까” 하였다. 선생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하기를 “무릇 사(死)와 생(生)은 명(命)이 있고 부(富)와 귀(貴)는 하늘에 달리었으니, 그 오는 것을 막을 수 없고 가는 것을 따를 수 없거늘 그대는 어째서 상심(傷心)하는가. 내가 그대를 위하여 방앗소리를 내어 위로하겠소” 하고, 이에 거문고를 타며 방앗소리를 내니, 세상에서 전하여 이름하기를 ‘대악(碓樂)’이라 하였다.
어휘풀이
- 영계기(榮啓期) : 중국의 춘추 시대 사람으로서 공자와 동시대의 인물인데 성격이 낙천적이어서 사슴가죽 옷에 새끼 띠를 매고 늘 금을 타며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고 한다. - 대악(碓樂) : 신라 자비왕(慈悲王) 때의 노래로 백결선생이 지었다고 하며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애장왕(哀莊王) 8년(807)의 기록에 전하는 대금무(碓琴舞)가 그것인데, 무척(舞尺)은 붉은 옷을 입고, 금척(琴尺)은 푸른 옷을 입고, 음악과 무용을 공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악지(樂志)에 그 기록이 실려 있다. 참고: <삼국사기>, 이병도 역주, 을유문화사, 1996
해설
백결선생에 관해서는 영해 박씨(寧海朴氏) 족보에 보다 상세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름은 박문량(朴文良)이며, 414년(실성왕 13)에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눌지왕 때 아버지 박제상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순절(殉節)하자 그의 어머니 김씨와 누나인 아기(阿奇)와 아경(阿慶)은 비보를 듣고 이내 자결하였고, 가운데 누나인 아영(阿榮)만이 남아서 백결을 양육하였다고 한다. 그 뒤 아영이 궁중으로 출가하자 그도 함께 입궐하였으며, 장성해서는 각간(角干) 이수현(李壽玄)의 딸과 혼인하여 관직에도 있었다. 478년(자비왕 21)에는 모든 관직을 떠나 향리로 돌아갔는데, 이때 그는 ‘낙천악(樂天樂)’이라는 귀향곡을 지어 불렀다고 한다. 더없이 청렴하고 결백하여 궁중으로부터의 모든 후원을 거절하고 스스로 궁색한 생활을 즐기다가 말년에는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연계정보
-삼국사기(三國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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