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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오랑 세오녀(延烏郞 細烏女)

작품명
연오랑 세오녀(延烏郞 細烏女)
장르
설화
작품소개
신라 때의 설화. 고려 초엽 박인량(朴寅亮)이 엮은 <수이전(殊異傳)>에 실렸던 것으로, 지금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수록되어 전한다. 연오(延烏)와 세오(細烏)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자 일월이 빛을 잃었다가 세오의 비단으로 제사를 지내자 다시 빛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설화로 이는 한국의 태양신(太陽神)에 관한 신화로서는 유일한 것이며, 이 태양신의 일본 이동과 관련하여 일본 태양신 신화와의 비교연구가 주목된다.
원문
第八 阿達羅王卽位四年丁酉 東海濱 有延烏郞 細烏女 夫婦而居 一日延烏歸海採藻 忽有一巖[一云一魚] 負歸日本 國人見之曰 此非常人也 乃立爲王[按日本帝記 前後無新羅人爲王者 此乃邊邑小王 而非眞王也] 細烏怪夫不來 歸尋之 見夫脫鞋 亦上其巖 巖亦負歸如前 其國人驚訝 奏獻於王 夫婦相會 立爲貴妃 是時新羅日月無光 日者奏云 日月之精 降在我國 今去日本 故 致斯怪 王遣使求二人 延烏曰 我到此國 天使然也 今何歸乎 雖然朕之妃 有所織細 以此祭天可矣 仍賜其 使人來奏 依其言而祭之 然後日月如舊 藏其於御庫爲國寶 名其庫爲貴妃庫 祭天所名迎日縣 又都祈野 <삼국유사> 권1 제2 기이(紀異)편
국문풀이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즉위 4년 정유(158)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가 부부로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가 바다에 가서 해조(海藻)를 따고 있던 중, 갑자기 바위 하나―혹은 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가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이 연오를 보고 말했다. “이는 비상한 사람이다.” 그래서 왕으로 삼았다.―<일본제기(日本帝紀)>를 살펴보면 전후에 신라 사람이 왕된 이가 없으니, 이것은 변읍(邊邑)의 소왕(小王)이고, 진왕(眞王)은 아닐 것이다. 세오는 그 남편이 돌아오지 않음을 괴이히 여겨 가서 찾다가, 남편의 벗어놓은 신을 보고 그 바위에 올라가니, 바위는 또한 그전처럼 세오를 싣고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보고 놀라서 왕께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세오를 귀비(貴妃)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이 없어지니, 일관(日官: 천문과 점치는 일을 맡은 사람)이 말했다.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있었던 것이 지금 일본으로 가버린 때문에 이런 괴변이 일어났습니다.” 왕은 사자(使者)를 일본에 보내어 두 사람을 찾았다. 연오는 말했다.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이니, 이제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써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거요.” 이에 그 비단을 주었다. 사자가 돌아와서 아뢰었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그전과 같아졌다.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며,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 참고: <삼국유사>, 이재호 역, 솔출판사, 1997
해설
연오랑 세오녀(延烏郞 細烏女) 설화는 영일현의 영일(迎日), 즉 ‘해맞이’의 지명도 태양신화와 직접 관련이 있으며, <일본서기>의 ‘천일창설화(天日槍說話)’도 같은 류의 광명의 신, 즉 태양신화의 이동전설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동남 해안과 일본의 이즈모(出雲) 지방은 역사적으로도 문화의 전승로였음을 감안해 볼 때, 그러한 문화를 따라 이동한 태양신화의 한 모습을 이 설화는 잘 설명하고 있다. 연오와 세오의 이름 속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까마귀(烏)는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태양을 상징하였다. 따라서 연오(延烏)는 ‘태양을 맞이한다(迎日)’, 또는 ‘태양 속의 까마귀(陽烏)’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연오는 태양 속에 까마귀가 산다는 양오(陽烏)전설의 변용으로 볼 수 있고, 세오(細烏)도 쇠오, 즉 금오(金烏)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세오의 비단을 가져와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하였는데 여기에서 도기야는 <동국여지승람>에 ‘욱기야(郁祈野)’라고도 하였으니, 이는 <경상도지리지>에서 설명한 근오지(斤烏支)의 ‘오지(烏支)’와도 음이 일치하며 일본의 지명 ‘오키(隱岐)’와도 동일하여, 연오·세오가 일본에 건너가 구연(舊緣)의 땅 오키(迎日)의 이름을 자기의 신왕국의 명칭으로 삼았을 가능성을 짐작해볼 수 있게 한다. 결국 <연오랑세오녀설화>는 일찍이 우리 민족이 일본 땅을 개척하여 통치자가 되고 내왕한 문화적 사실을 원시적 태양신화의 동점설화(東漸說話)에 붙여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좋은 예화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연오와 세오도 광명을 의인화한 명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연계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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