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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朱蒙)

작품명
주몽(朱蒙)
장르
신화
작품소개
고구려의 시조(재위 기원전 37∼19) 주몽(朱蒙)에 관한 설화. 주몽(朱蒙)은 추모(鄒牟)·상해(象解)·도모(都慕)·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삼국사기>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밖에 <동국이상국집>, 광개토왕릉비문의 서두, <동국여지승람>의 평양조,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등에 수록되어 있다. 특히 <동국이상국집>의 <동명왕편>은 오언고시로서 ‘영웅서사시’라고 일컬어질 만한 특성을 갖추고 있으며, 가장 장편이어서 이 방면의 자료 가운데에서 가장 우수하다.
원문
高句麗 卽卒本扶餘也 或云今和州 又成州等 皆誤矣 卒本州在遼東界 國史高麗本記云 始祖東明聖帝 姓高氏 諱朱蒙 先是 北扶餘王解夫婁 旣避地于東扶餘 及夫婁薨 金蛙嗣位 于時得一女子於太伯山南優渤水 問之 云 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神山下鴨邊室中私之 而往不返[壇君記云 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 有産子 名曰夫婁 今按此記 則解慕漱私河伯之女 而後産朱蒙 壇君記云 産子名曰夫婁 夫婁與朱蒙異母兄弟也] 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于此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光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照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五升許 王之與犬猪 皆不食 又棄之路 牛馬避之 棄之野 鳥獸覆之 王欲剖之 而不能破 乃還其母 母以物之 置於暖處 有一兒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岐異常 自作弓矢 百發百中 國俗謂善射爲朱蒙 故以名焉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戱 技能莫及 長子帶素言於王曰 朱蒙非人所生 若不早圖 恐有後患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食令瘦 駑者善養令肥 王自乘肥(者) 瘦者給蒙 王之諸子與諸臣 將謀害之 蒙母知之 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 何往不可 宜速圖之 於時蒙與烏伊等三人爲友 行至淹水[今未詳] 告水曰 我是天帝子 河伯孫 今日逃遁 追者垂及 奈何 於是魚鼈成橋 得渡而橋解 追騎不得渡 至卒本州[玄郡之界] 遂都焉 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本姓解也 今自言是天帝子承日光而生 故 自以高爲氏] 時年十二歲 漢孝元帝建昭二年甲申歲 卽位稱王 高麗全盛之日 二十一萬五百八戶 <삼국유사> 권1 제2 기이(紀異)편
국문풀이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다. 혹은 지금의 화주(和州), 또는 성천(成川)이라 하나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는 요동 지경에 있었다. <국사> 고구려 본기에 이런 사실이 있다. 시조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성은 고(高)씨요,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이보다 전에 북부여왕 해부루가 이미 동부여로 피해갔으며, 후에 부루가 세상을 떠나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에 금와가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얻었다. 금와가 그녀에게 물으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하백(河伯)의 딸인데 이름을 유화(柳花)라고 합니다. 여러 아우들과 나와 놀고 있을 때, 한 남자가 자기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면서 저를 웅신산(熊神山) 밑 압록강가에 있는 집 안으로 유인해가서, 몰래 정을 통해놓고 가서는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중매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어, 마침내 이곳으로 귀양 보냈습니다.”―<단군기(壇君記)>에는 “단군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관계하여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 이 기사를 살펴보면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정을 통하여 주몽을 낳았다 한다. <단군기>에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했다” 하니, 부루와 주몽은 배다른 형제인 것이다. 금와는 그녀를 이상히 여겨 방 속에 가두어두었더니 햇빛이 비쳐왔다. 그녀가 몸을 피해가니 햇빛이 또 따라가 비쳤다. 그로 인하여 태기가 있어 알 하나를 낳으니 크기가 닷되들이만 했다. 왕이 그것을 개와 돼지에게 던져주었더니 모두 먹지 않았다. 또 길에 버렸더니 소와 말이 피해가고, 들판에 버렸더니 새와 짐승이 이것을 덮어주었다. 왕이 그것을 쪼개려 했으나, 쪼갤 수 없어서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그 어머니는 쌀 것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질을 부수고 나왔다. 골격과 외양이 특이하고 기이했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기골이 준수하여 범인과 달랐다. 스스로 활과 살을 만들어 백 번 쏘면 백 번 다 맞혔다. 그 나라의 풍속에 활을 잘 쏨을 주몽이라 한 까닭으로 이름을 주몽이라고 지었다. 금와에게는 아들 일곱이 있었는데, 언제나 주몽과 함께 놀았으나 그 기예와 재능이 주몽을 따르지 못했다. 맏아들 대소가 금와왕에게 말했다. “주몽은 사람이 낳은 것이 아니니, 만약 일찍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했다. 주몽은 좋은 말을 알아보아 좋은 말은 적게 먹여서 여위게 하고, 나쁜 말은 잘 먹여서 살찌게 했다. 왕은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왕의 여러 아들과 여러 신하들이 주몽을 장차 죽이려고 꾀했다. 주몽의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알고 그에게 말했다. “나랏사람이 장차 너를 죽이려고 하니, 네 재능과 지략으로 어디를 간들 살지 못하겠느냐? 빨리 대책을 세워라.” 이에 주몽은 오이(烏伊) 등 세 사람을 벗삼아 엄수(淹水)―지금 자세히 알 수 없다―에 이르러 물에게 말하였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손자다. 오늘 도망나오는 길인데 뒤쫓는 자가 거의 다 쫓아왔으니 어찌해야 하겠느냐?” 이에 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그를 건너가게 하고는 곧 흩어지니 뒤쫓는 기병들은 건널 수 없었다. 졸본주―현도군의 지경―에 이르러 드디어 도읍을 정했다. 미처 궁실은 짓지 못해서, 다만 불류수(沸流水) 위에 옥사(屋舍)를 지어 거처하며,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국호로 인하여 고(高)로써 씨(氏)를 삼았다―본성은 해(解)였으나 지금 자기가 천제의 아들로서 햇빛을 받고 낳았다 하는 까닭으로 스스로 고로써 씨를 삼았다. 이때 나이 열두 살이었는데 한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 갑신(기원전 38)에 위에 올라 왕이라 일컬었다. 고구려가 전성하던 때는 21만 5백8호나 되었다.
어휘풀이
- 태백산 : 여기에 말한 태백산은 백두산을 이른 말이다. - 우발수(優渤水) : 일설에 우발수는 웃벌못 곧 상평지(上坪池)라 한다. - 하백(河伯) : 황하(黃河)의 신, 곧 물을 관장하는 신. - 웅신산(熊神山) : 일설에 웅신산은 고마뫼 곧 개마산(蓋馬山)이니 백두산이 일명 개마산이므로 백두산을 이른 것이라 한다. 참고: <삼국유사>, 이재호 역, 솔출판사, 1997
해설
동명왕에 관한 문헌들의 기록에는 들고 남이 많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주몽신화와 주몽신화 가운데 그 뛰어난 서사성과 문학성을 가지고 있는 <동국이상국집>의 동명왕편을 비교해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동명왕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몽은 하늘의 신인 해모수(解慕漱)를 아버지로, 강물의 신인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어머니로 하여 알로 태어난다. 그 어머니가 몸을 의지하고 있던 부여왕조의 금와왕은 그 큰 알을 버리게 하였지만, 짐승과 새들이 알을 보호하였다. 왕이 직접 그것을 깨뜨리려 하였으나 깨지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어머니가 그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는데 알 속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그 아기는 매우 출중하고, 특히 활을 잘 쏘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주몽’이라고 불렀다. 금와왕의 일곱 왕자들은 주몽을 시기하여 없애려고 하였다. 주몽의 어머니는 계략을 써서 주몽이 기르고 있던 왕실의 말들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차지하게 하고, 주몽에게 몸을 피하여 큰일을 도모하게 하였다. 주몽이 도망하여 엄수(淹水: 혹은 개사수)에 도달하였으나 왕자들의 추격이 급박하였다. 주몽은 물을 향해서 “내가 천제(天帝)의 아들이고 강의 신의 손주(외손)인데 이제 이 추격을 어찌하리오.” 하고 말하자 고기 떼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아 추격을 면하게 되었다. 주몽은 남쪽으로 달아나서 졸본(卒本)에 도착하여 작은 집을 엮어 나라의 기틀로 삼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하였다. 비류국(沸流國) 바로 이웃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비류국의 송양왕과 주종 관계를 결정짓는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주몽은 활쏘기에 이기고, 계략을 써서 북과 나팔을 빼앗고 마침내 주술로 비류땅이 물에 잠기게 함으로써 송양왕의 항복을 얻게 되고 그 뒤 그의 왕국은 더욱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내용의 동명왕신화는, 동명왕의 부신(父神)과 그의 아들 유리(類利)에 관해서는 생략한 것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 그리고 <동명왕편>의 기록을 절충한 것이다. <삼국유사> 북부여조에서는 북부여의 천제를 해모수라 하고 그 아들을 해부루(解夫婁)라고 한 뒤, 해부루가 상제(上帝)의 명을 따라 동부여로 옮겨가고 동명이 북부여를 이어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북부여조의 바로 다음에 실린 동부여조에서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재상인 가관불의 꿈에 천제가 현몽해서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여기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희는 피해 가라.” 하니 이는 장차 동명왕이 일어날 징조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두 기록으로 보아, 해모수와 해부루로 이어지는 혈통과 동명왕의 혈통은 별개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해모수가 천제로 일컬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천제의 이름으로 해부루를 내쫓고자 하였다면 두 천제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삼국유사>는 동부여조의 바로 다음 조항인 고구려에서 해모수를 동명왕의 부신 자리에 앉히고 있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삼국유사>는 “단군기(檀君記)에 가로되, 단군은 서하 하백의 딸을 아내로 맞아 한 아이를 낳으니 그 이름이 부루이다. 이제 해모수가 하백의 딸을 취하여 주몽을 낳았다는 기록을 생각컨대, 부루와 주몽은 배다른 형제일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 말로 해서 오히려 엇갈림이 더해지고 있다. 어머니가 다른 형제가 아버지가 다른 형제로 바뀐다고 해도 서하 하백과 하백이 동일한 존재임을 확인하지 않고는 논리가 합당할 수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유화, 곧 주몽의 어머니가 동부여에서 숨지자, 금와왕이 태후의 예로 장사를 지내고 태후 신묘(神廟)를 세우매, 동명왕이 동부여에 사신을 보냈다고 하였다. 유화가 금와의 태후라면 해부루의 비(妃)가 되는 셈이고 그렇다면 해부루와 동명이 씨가 다른 형제일 수도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화가 금와왕에 의해서 태후의 대접을 받았다면 이것은 중요한 시사가 될 수 있다. 그것은 고구려왕조에 있어서도 유화는 동명왕의 태후이기 때문이다. 유화는 동부여와 고구려왕조 양쪽에 걸쳐 태후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추정이 여기서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동명왕신화의 바닥에는 부계가 다르고 모계가 같은 존재들 사이의 갈등이 깔려 있는 셈이 된다. 말하자면, 일종의 가족 간의 갈등 내지 혈통 내의 갈등이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갈등은 가장 극적인 부분을 구성하는 서사적 원리로서 작용하고 있다. 이 같은 가계 내의 갈등이 부여왕조에서 고구려 왕조를 파생시켰다면, 같은 형제에게서 백제왕조가 형성된 사례에서 그 파생의 대응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동명왕신화는 추정될 수 있는 이 같은 갈등으로 인하여 상고대 신화들 가운데서 가장 파란 많은 신화로 남아 있다. 탄생에서부터 이미 장애와 난관을 겪은 한 인물이 박해를 이기는 과정이며 투쟁을 승리로 마무리 짓는 과정 끝에 드디어 한 왕조를 창건하는 줄거리로 인하여 동명왕신화는 ‘영웅서사시’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동명왕은 기마술과 궁술에 능한 무장다운 면모와 함께 이른바 ‘주술적 탈주’를 감행하고, 또 방술을 부려 비를 내리게 하는 주술사적 면모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주술사적 무장이자 왕인 동명왕에게서 상고대 왕권의 편모를 볼 수 있다.
연계정보
-그날, 새벽
-고구려의 불꽃-동명성왕
-동명왕편(東明王篇)
-삼국유사(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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