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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가(燕行歌)

작품명
연행가(燕行歌)
저자
홍순학(洪淳學)
장르
가사
작품소개
이 작품은 1866년(고종 3년) 가례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온 홍순학이 지은 장편의 기행가사이다. 고종이 왕비를 맞이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유후조(柳厚祚)를 상사(上使)로 한 사행의 일원이 된 작자는 서울 출발에서 북경 체류 후 다시 돌아오기까지 130여 일간의 여정에서 보고들은 바를 기술하였다. 총 3800여 구에 달하는 장편인 이 가사는 서울에서 북경까지 긴 노정에 따라 고적을 더듬고 풍속을 살피며 인전에 접하였던 바를 소상히 기록한 여행기로, 김인겸의 <일동장유가>와 더불어 조선전기의 양반가사를 계승하는 대표적인 후기 가사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저자
홍순학(洪淳學, 1842~1892) 조선 말기의 문장가.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덕오(德五). 기종(夔種)의 아들로 족숙(族叔) 석종(奭種)에게 입양되었다. 1857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수찬을 거치고, 1866년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돌아와서 지은 <연행가(燕行歌)>는 장편 기행가사로,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따른 위기가 잘 나타나 있어 주목된다. 대사헌·대사간·예조참의 등을 거쳐 감리인천항통상사무(監理仁川港通商事務)·인천부사·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를 지냈다.
현대어풀이(부분발췌)
하오월(夏五月) 초이레의 / 도강(渡江) 날짜 정하였네. 가지고 갈 물건을 점검하고 / 여행 장비를 수습하여 압록강변에 다다르니 / 송객정(送客亭)이 여기로다.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나와 앉고 / 다담상(茶啖床)을 차려 놓고, 세 사신(使臣)을 전별(餞別)하는데 / 구슬프기도 그지없다. 한 잔 한 잔 또 한 잔으로 / 서로 앉아 권고하고, 상사별곡(相思別曲) 한 곡조를 / 차마 듣기 어려워라. 장계(狀啓)를 봉한 후에 / 떨뜨리고 일어나서, 나라 떠나는 감회 그지없어 / 억제하기 어려운 중 여인의 꽃다운 눈물이 / 마음의 회포를 돕는도다. <중략> 육인교(六人轎)를 물려 놓으니 / 장독교(帳獨轎)를 대령하고, 가마 앞 통인(通引)이 하직하니 / 해 가리는 일산과 말고삐만 있고, 공형(公兄)과 급창(及唱)이 물러서 / 마두(馬頭)와 서자(書者)뿐이로다. 한 조각 자그마한 배를 저어 / 점점 멀리 떠서 가니, 푸른 봉우리는 첩첩하여 / 나를 보고 즐기는 듯, 흰구름은 멀리 아득하고 / 햇살의 빛깔이 참담하다. 비하지 못할 이내 마음 / 오늘이 무슨 날인고. 세상에 난 지 이십오 년 / 부모님을 모시고 자라나서 평소에 부모님 곁을 떨어져 / 오래 떠나 본 일이 없다. 반 년이나 어찌할꼬 / 부모님 곁을 떠나는 정이 어려우며 경기도 지방 백 리 밖에 / 먼 길 다녀 본 적 없다. 허약하고 약한 기질에 / 만 리나 되는 여행길이 걱정일세. <중략> 한 줄기 압록강이 / 양국의 경계를 나누었으니, 돌아보고 돌아보니 / 우리나라 다시 보자. 구련성(九連城)에 다다라서 / 한 고개를 넘어서니 아까 보던 통군정(統軍亭)이 / 그림자도 아니 보이고, 조금 보이던 백마산(白馬山)이 / 봉우리도 아니 보인다. 백여 리의 사람 없는 곳에 / 인적이 고요하다. 위험한 만 첩의 산중 / 빽빽이 우거진 나무들이며 적막한 새 소리는 / 곳곳에 구슬프고, 한가한 들의 꽃은 / 누구를 위해 피었느냐? 아깝도다, 이러한 꽃 / 두 나라의 버린 땅에 인가(人家)도 아니 살고 / 논밭도 없다고 하되, 곳곳이 깊은 골에 / 닭 소리 개 소리 들리는 듯. 끝없이 넓고 험한 산의 형세 / 범과 표범의 해가 겁이 난다. <중략> 밥 짓는 데서 상을 차려 / 점심을 가져오니, 맨 땅에 내려앉아 / 점심을 먹어 보자. 아까까지 귀하던 몸이 / 어이하여 졸지에 천해져서, 일등 명창이 오락가락하던 / 수청 기생은 어디 가고, 가득한 맛난 음식과 좋은 반찬 / 딸린 반찬도 없으나마, 건량청(乾糧廳)에서 준 밥 한 그릇 / 이렇듯이 달게 먹으니, 가엾게 되었으나 / 어찌 아니 우스우랴 <중략> 금석산(金石山) 지나가니 / 온정평(溫井坪)이 여기로다. 날의 형세가 황혼이 되니 / 한데서 잘 잠자리를 정하자. 세 사신 자는 데는 / 군사들 쓰는 장막을 높이 치고, 삿자리를 둘러막아 / 임시로 꾸민 방처럼 하였으되, 역관(譯官)이며 비장(裨將) 방장 / 불쌍하여 못 보겠다. 사면에서 외풍이 들이부니 / 밤 지내기 어렵도다. 군막이라고 말은 하되 / 무명 한 겹으로 가렸으니, 오히려 이번 길은 / 오뉴월 더운 때라, 하룻밤 지내기가 / 과히 아니 어려우나, 동지섣달 긴긴 밤에 / 바람과 눈이 들이칠 때 그 고생이 어떠하랴, / 참혹들 하다고 하대. 곳곳에 피운 화톳불은 / 하인들이 둘러앉고, 밤새도록 나발 소리를 냄은 / 짐승 올까 염려해서이라. <중략> 밝기를 기다려서 / 울짱의 문으로 향해 가니, 나무로 울타리를 하고 / 문 하나를 열어 놓고, 봉황성(鳳凰城)의 장이 나와 앉아 / 사람과 말을 점검하며, 차례로 들어오니 / 묻고 경계함이 엄숙하고 철저하다. 녹색 창과 붉은 문의 여염집은 / 오색이 영롱하고, 화려한 집과 난간의 시가지는 / 만물이 번화하다. 집집마다 만주 사람들은 / 길에 나와 구경하니, 옷차림이 괴이하여 / 처음 보기에 놀랍도다. 머리는 앞을 깎아 / 뒤만 땋아 늘어뜨려 당사실로 댕기를 드리고 / 마래기라는 모자를 눌러 쓰며, 일 년 삼백육십 일에 / 양치질 한 번 아니하여 이빨은 황금빛이요 / 손톱은 다섯 치라. 검은빛의 저고리는 / 깃이 없이 지었으되, 옷고름은 아니 달고 / 단추 달아 입었으며, 검푸른 바지와 검은 남빛 속옷 / 허리띠로 눌러 매고, 두 다리에 행전 모양 / 타오구라 이름하여, 발목에서 오금까지 / 가뜬하게 들이끼우고 깃 없는 푸른 두루마기 / 단추가 여럿이며, 좁은 소매가 손등을 덮어 / 손이 겨우 드나들고, 두루마기 위에 덧저고리 입고 / 무릎 위에는 슬갑(膝甲)이라. 곰방대와 옥 물뿌리 / 담배 넣는 주머니에 부시까시 껴서 들고 / 뒷짐을 지는 것이 버릇이라. 사람마다 그 모양이 / 천만 사람이 한 모습이라. 소국 사람 온다 하고 / 저희끼리 지저귀며, 무엇이라 인사하나 / 한 마디도 모르겠다. <중략> 계집년들 볼 만하다. / 그 모양은 어떻더냐. 머리만 치거슬러 / 가르마는 아니 타고, 뒤통수에 모아다가 / 맵시 있게 수식하고, 오색으로 만든 꽃은 / 사면으로 꽂았으며, 도화색 분으로 단장하여 / 반쯤 취한 모양같이 불그스레 고운 태도 / 눈썹 치장을 하였고, 귀밑머리 고이 끼고 / 붓으로 그렸으니, 입술 아래 연지빛은 / 붉은 입술 분명하고 귓방울 뚫은 구멍 / 귀고리를 달았으며, 의복을 볼작시면 / 사나이 제도로되, 다홍빛 바지에다 / 푸른빛 저고리요, 연두색 두루마기 / 발등까지 길게 지어, 목도리며 소매 끝동 / 꽃무늬로 수를 놓고, 품 너르고 소매 넓어 / 풍신 좋게 떨쳐 입고, 옥 같은 손의 금반지는 / 외짝만 넓적하고, 손목에 낀 옥고리는 / 굵게 사려 둥글구나. 손톱을 길게 하여 / 한 치만큼 길렀으며, 발 맵시를 볼작시면 / 수놓은 당혜(唐鞋)를 신었으며, 청나라 여자는 발이 커서 / 남자의 발 같으나, 한족(漢族)의 여자는 발이 작아 / 두 치쯤 되는 것을 비단으로 꼭 동이고 / 신 뒤축에 굽을 달아, 위뚝비뚝 가는 모양 / 넘어질까 위태롭다. 그렇다고 웃지 마라 / 명나라가 끼친 제도 저 계집의 발 한 가지 / 지금까지 볼 것 있다. <중략> 아이들도 나와 구경하느라 / 주릉주릉 몰려 섰다. 이삼 세 먹은 아이 / 어른 년이 추켜 안고, 오륙 세 되는 것은 / 앞뒤로 이끈다. 머리는 다 깎아다 / 좌우로 한 줌씩 뾰족하니 땋았으되 / 붉은 당사로 댕기를 드려 복주감투 마래기 모자에 / 채색 비단 수를 놓아, 검은 공단(貢緞) 선을 둘러 / 붉은 단추로 꼭지하고, 바지며 저고리도 / 오색으로 무늬를 놓고, 옷소매 아래 배리기라는 것은 / 보자기에 끈을 달아 모가지에 걸었으니 / 배꼽 가린 꼴이로구나 십여 세 처녀들은 / 대문 밖에 나와 섰네. 머리는 아니 깎고 / 한 편 옆에 모아다가 쪽지는 머리 모양처럼 / 접첨접첨 잡아매고, 꽃가지를 꽂았으니 / 풍속이 그러하다. 호호 백발 늙은 년도 / 머리마다 조화(造花)로다. <중략>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 담배들을 즐기는구나. 팔구 세 이하라도 / 곰방대를 물었으며, <중략> 묵을 곳이라고 찾아가니 / 집 제도가 우습도다 보 다섯 줄로 된 집 두 칸 반에 / 벽돌을 곱게 깔고, 반 칸식 캉이라는 걸 지어 / 좌우로 마주 보게 하니, 캉의 모양이 어떻더냐, / 캉의 제도를 못 보았거든 우리나라 부뚜막이 / 그와 거의 흡사하여 그 밑에 구들 놓아 / 불을 땔 수 있게 마련하고 그 위에 자리 펴고 / 밤이면 누워 자며, 낮이면 손님 접대 / 걸터앉기에 매우 좋고, 기름칠을 한 완자창과 / 회를 바른 벽돌담은 미천(微賤)한 오랑캐들도 / 집치레가 지나치구나. <하략>
해설
서울을 떠나 고양·파주·임진강(臨津江)·장단(長湍)·송도·평산(平山)·곡산(谷山)·황주·평양·가산(嘉山)·정주(定州)를 거쳐 의주까지 국내에서만도 거의 한 달이 걸린 여정이었다. 압록강을 건너면서 비로소 “허약하고 약한 기질 만리행역 걱정일세.”라 하며 이측(離側)한 외로움과 가국(家國) 생각에 무거운 나그네의 심회를 말하고 있다. 국내에서 융숭하였던 지공(支供)·지대(支待)와는 달리, 무인지경 만주 벌판에서의 군막생활(軍幕生活)의 어려움과 봉황성(鳳凰城)에서 만난 호인남녀(胡人男女)의 기괴한 옷차림과 생활, 낯선 이국의 풍물 등을 소상히 관찰하여 특유의 익살로 표현하였다. 청석령(靑石嶺)을 넘으며 효종 입심(入瀋 : 심양에 끌려감)의 수욕(受辱)을 통분하였던 이야기며, 요동(遼東) 700리에서 뽐낸 사내의 호기가 번뜩인다. 북경의 문루(門樓)·사우(寺宇)·고적을 소견하고, 시전(市廛)을 두루 살펴 환희(幻戱)·요술(妖術)을 참관하고, 인사를 방문하여 인정을 교환하였던 일 등 당시의 정황을 밝혀주고 있다. “눈깔은 움쑥하고 콧마루는 우뚝하며 머리털은 빨간 것이 곱슬곱슬 양모 같고 키꼴은 팔척장신 의복도 괴이하다. 쓴 것은 무엇인지 우뚝한 전립 같고 입은 것은 어찌하여 두 다리가 팽팽하냐, 계집년들 볼짝시면 더구나 흉괴하다. 퉁퉁하고 커다란 년 살빛은 푸르스름…… 새끼놈들 볼 만하다. 사오륙세 먹은 것이 다팔다팔 빨간 머리 샛노란 둥근 눈깔 원숭이 새끼들과 천연히도 흡사하다.”라고 하였다. 북경 길가에서 만난 초견(初見) 서양인을 익살로 표현한 대목에서 조선 선비의 오기(傲氣)를 볼 수 있다. 7월 18일 회환(回還), 복명하고 집에 돌아오기까지 반년에 걸친 연행 중 보고 느낀 것을 담아놓은 작품이다. 조선 후기 가사문학에서는 작자층의 다양화로 말미암아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의 확대, 주제와 표현 방식에의 다양한 변화 등이 공통적인 현상으로 등장한다. 그 가운데 사행(使行)의 경험을 담은 <연행별곡(燕行別曲)>, <서정별곡(西征別曲)>, <서행록(西行錄)>, <연행가(燕行歌)>, <북행가(北行歌)> 등이 중국계 사행가사로 묶일 수 있다. 이러한 가사문학의 변모 과정에서 <연행가>는 새로운 경험의 확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표현하고 있는지 다른 연행가사류와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연행가>는 작자 홍순학의 관심이 어느 한곳에 편중되지 않고 다방면에 걸쳐 있다. 작가는 우리 역사는 물론이고 중국의 역사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하여 기행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역사의 현장마다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의 나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관을 토대로 한 선택의 결과이다. 한편 작가는 반청의식(反淸意識)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중국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대부분 친명반청(親明反淸)으로 일관하고 있다. 서양인에 대한 서술은 더욱 부정적인 시각에서 행해지는데, 서양인을 ‘서양국놈’ 혹은 ‘양귀자놈’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한족과 우리 민족 이외는 모두 오랑캐라는 보수적인 의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당시 관리 대부분의 인식수준을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이 비슷한 시기의 다른 기행가사들과 비교해서 서술 태도 면에서 갖는 특징은,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나타내고 있는 점, 작품 전편에 보이는 작자의 세심한 관찰력, 풍경에 대한 단순 묘사와 소감 서술을 넘어선 부조리에 대한 비판정신 등이다. 이는 당시 기행문학에서 흔히 빚어졌던 평면적인 서술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여행의 경험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데까지 이른 것으로 종래 기행문학의 수준에서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섬세한 묘사와 의태어를 적절히 구사, 생동감을 살리고 있으며 조선 후기의 장편가사가 운문에서 산문으로 변모해 나감을 보여주고 있다. 영조 계미통신사의 삼방서기인 김인겸이 지은 기행가사 <일동장유가>와 고종 3년 사행 서집관인 홍순학이 지은 이 <연행가>는 조선 전기 양반가사를 계승하는 대표적인 후기 가사 작품이다. 조선 후기 가사가 서사적인 경향으로 변모해 가는 한편, <연행가>는 복고적인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이는 전기 가사의 질서에 대한 복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이 작품의 서사적인 경향은 오히려 감정의 변이로 나타난다. 또한 근대사회에 대한 관심보다는 주자학적 세계관에 근거한 사고나 민족의식의 고취, 서구에 대한 경계만이 강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은 보수적인 의식의 소유자가 새로운 경험을 충실하게 ‘가사’라고 하는 갈래에 담아내려고 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면서, 동시에 새로운 경험의 수용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대상을 담아내는 데 있어 그 대상의 특성보다는 작가의 의식을 앞세웠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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