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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요(薯童謠)

작품명
서동요(薯童謠)
저자
서동(薯童) 또는 백제 무왕(武王)
장르
향가
작품소개
신라 진평왕 때 백제 무왕이 지었다는 향가이다. 4구체이며 향찰로 표기되어 있다. 일부에서는 이 노래를 향가라기보다는 민요로 보기도 한다. <삼국유사> 권2 무왕조에 수록되어 있으며 배경설화는 신분이 미천한 서동이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하여 아이들에게 노래를 지어 퍼뜨림으로써 뜻을 이루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
무왕(武王, ?~641) 백제 30대 왕으로 법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41년간의 재위기간 동안 왕권을 강화하고 신라 서쪽 지방을 공격하여 여러 성을 취하였다. 재위 후반기에 익산 천도를 통하여 기존의 귀족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634년 법왕이 시작한 왕흥사를 완성하고 사비궁을 중수하고 미륵사를 창건하는 등 대규모 역사를 일으켜 백제 중흥기를 맞이하였다. 그의 능은 익산시 팔봉면 신왕리에 있는 쌍릉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양주동 해독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사귀어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김완진 해독
善化公主님은 남 몰래 짝 맞추어 두고 薯童 방을 밤에 알을 안고 간다 (참고) <고가연구>, 양주동, 일조각, 1980 <향가해독법연구>, 김완진, 서울대출판부, 1980
배경설화
무왕(武王)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고 되어 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 제 삼십 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어머니는 과부로 살았는데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못의 용과 교통(交通)하여 (자식을)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인데 기량을 측정하기가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이 이름을 지었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갔다. 마로써 마을 아이들을 먹이니 아이들이 친하게 여겨 그를 따라다녔다. 이에 노래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 그것을 부르게 하니 이렇다. “선화공주님은 / 남몰래 사귀어두고 / 서동방을 /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가 서울에 가득하고 궁중에까지 도달하니, 백관들이 공주를 멀리 내쳐보낼 것을 극력히 간하였다. 장차 떠날 때에 왕후가 순금 일두를 가는 길에 주었다. 공주가 장차 유배지에 가려고 하는 도중에 서동이 나와 절을 하며 가는 길에 곁에서 시중들 것을 청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으나 우연히 믿음이 가고 기뻐 따라가서는 몰래 통하였다. 그 뒤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고 곧 동요의 영험함을 알았다. 함께 백제에 이르러 왕후가 준 금을 꺼내어 생계를 도모하기를 꾀하였다. 서동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물건이오?”라고 하였다. 공주가 “이것이 바로 황금인데 가히 백년지부를 쌓을 수 있습니다.”하였다. 서동이 다시 “내가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땅에 진흙과 같이 쌓여 있소.”하였다. 공주가 듣고는 크게 놀라 말하길 “이는 천하의 보물로 만약 지금 금이 있는 곳을 안다면 즉시 이 보물을 부모님이 계신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하였다. 서동이 “좋소.”라고 말하였다. 이때 금을 모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용화산 사자사 지명법사의 거처에 편지를 보내 금을 수송할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말하기를 “나의 신력으로 수송할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공주가 편지와 함께 금을 사자사 앞에 두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만에 신라 궁중에다 가져다 놓았다. 진평왕이 그 신이한 변화에 기이하게 여기면서 깊이 존경하여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로 인하여 인심을 얻어 어느 날 왕위에 올랐다. 왕과 부인이 사자사로 가고자 할 적에 용화산 밑의 큰 연못가에 이르러 미륵삼존이 연못 가운데 나타났다.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다하며 부인이 왕에게 말하였다. “모름지기 이 땅에 큰 절을 세우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왕이 그것을 허락하고 지명법사의 거처에 편지를 보내 연못을 메울 방법을 물었다.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에 삼으로 연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이에 미륵삼존상을 본떠 만들고, 전탑과 곁채 각 세 개를 그곳에 지었다. 이름을 미륵사 - 국사에는 왕흥사라 하였다 - 라 지었다.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 그것을 돕도록 하였다. 지금도 그 절이 존재하고 있다. 삼국사에 말하기를 이는 법왕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홀어머니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잘 모르겠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무왕(武王)
해설
<서동요>는 <삼국유사> 권2 무왕조에 수록되어 있는 4구체 향가이다. 작자 및 작품 해석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어 왔다. 먼저 서동과 선화공주의 정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존중하여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무왕대에 신라와 백제의 관계가 적대적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들어 양국 왕실 간의 결혼은 당대에 성립될 수 없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양국 간의 혼인관계가 실제로 있었던 것은 백제 동성왕 때의 일이므로 백제 동성왕과 신라 이찬 비지의 딸이 무왕과 선화공주의 정체라는 견해가 있다. 이 밖에 ‘서동’이 원효의 어릴 때 이름인 ‘서당(薯幢)’과 유사하고 또한 그가 결혼한 인물이 공주인 요석공주였다는 점을 들어 원효와 요석공주가 서동과 선화공주의 실체라는 견해도 있다. 또한 이 설화가 불교적인 우의를 담고 있다고 보아 그 정체를 남순동자와 관음보살의 관계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 무왕조 표제에 달린 세주(細註)에 무왕의 원래 이름은 무강왕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에 착안하여 서동의 정체가 백제 무령왕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서동요>는 신분상 미천한 소년인 서동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불가능한 상대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자 계략을 꾸며 부른 노래이다. 노래의 내용이 이미 미천한 서동과 선화공주 간의 사랑을 기정사실화하여 선화공주에 대한 비방을 하고 있으므로 비방요(誹謗謠)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으므로 참요(讖謠)적 성격도 지니고 있다. 서동요 자체만 보았을 때 이 노래의 주제는 선화공주의 은밀한 사랑 정도로 파악될 수 있으나, 배경설화와 함께 파악하면 선화공주에 대한 서동의 사랑과 선화공주의 사랑의 획득이라 할 수 있다. 이 노래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전승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신분에 구애받지 않은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라는 이 노래의 주제에 있을 것이다.
연계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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