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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작품명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저자
득오
장르
향가
작품소개
<모죽지랑가>는 <삼국유사> 권 2 효소왕대 죽지랑조에 수록되어 있는 8구체 향가 작품이다. 삼국 통일에 기여한 죽지랑을 사모하며 기린 노래이다.
저자
득오곡(得烏谷, 생몰년 미상) 32대 효소왕대 죽지랑의 휘하에 있던 화랑이다. 득오실(得烏失)이라고도 표기한다. 급간(級干) 벼슬을 거쳐 급벌찬(級伐飡)의 관등에 올랐고, <모죽지랑가>를 지었다.
양주동 해독
간 봄 그리워함에 모든 것 서러워 시름하는데 아름다움 나타내신 얼굴이 주름살을 지니려 하옵니다 눈 돌이킬 사이에나마 만나뵙도록 지으리이다 낭이여 그리워할 마음이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 있으리이까
김완진 해독
지나간 봄 돌아오지 못하니 살아 계시지 못하여 우올 이 시름 殿閣을 밝히오신 모습이 해가 갈수록 헐어 가도다 눈의 돌음 없이 저를 만나보기 어찌 이루리 郞 그리는 마음의 모습이 가는 길 다복 굴헝에서 잘 밤 있으리 (참고) <고가연구>, 양주동, 일조각, 1980 <향가해독법연구>, 김완진, 서울대출판부, 1980
배경설화
이전에 술종공이 삭주도독사가 되어 장차 임지로 가려 하는데, 이때 삼한에 병란이 있으므로, 기병 3천 명으로 그를 호송했다. 행차가 죽지령에 이르니 한 거사가 있어 그 고개의 길을 평탄하게 닦고 있었다. 공은 그 아름다움에 탄복하였으며, 거사 또한 공의 위세가 매우 큼을 존경하여 서로의 마음에 감동되었다. 공이 임지에 부임한 지 한 달이 지나서 거사가 방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부부가 같은 꿈을 꾸었으므로 더욱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이튿날 사람을 보내 그 거사의 안부를 물었다. 그 지방 사람이 “거사가 죽은 지 며칠 되었다”고 일러 주었다. 사자가 돌아와서 그 사실을 아뢰었다. 거사의 죽음과 꿈을 꾸었던 날이 동일하였다. 공은 말했다. “아마 거사가 우리 집에서 태어날 것 같구려.” 다시 군사를 보내어 죽지령 위 북쪽 봉우리에 장사 지내게 하고 돌로 미륵불 하나를 새겨 무덤 앞에 모시게 했다. 공의 아내가 꿈꾼 날로부터 태기가 있더니 이윽고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이름을 죽지라 했던 것이다. 죽지랑은 커서 벼슬하여 유신공을 따르며 부수가 되어 삼국을 통일했으며 진덕여왕·태종·무열왕·문무왕·신문왕의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에 득오곡이 낭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었으니 그 노래는 이렇다. ‘간 봄 그리워함에 모든 것 서러워 시름하는데 아름다움 나타내신 얼굴이 주름살을 지니려 하옵니다 눈 돌이킬 사이에나마 만나뵙도록 지으리이다 낭이여 그리워할 마음이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 있으리이까’ - 삼국유사(三國遺事), 효소왕대(孝昭王代) 죽지랑(竹旨郞)
해설
<모죽지랑가>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죽지랑에 대한 그리움을 주제로 하고 있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4대에 걸친 재상을 지낸 죽지랑을 사모하는 작자가 이제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해진 죽지랑의 모습을 아름답던 지난 세월과 비교하며 안타까움과 그리운 마음을 표출하고 있다. 비록 죽지랑의 아름다운 모습이 쇠퇴하였을지라도 그를 향한 득오곡의 마음은 변하지 않음을 마지막 7~8행에서 노래하고 있다. <모죽지랑가>에 대한 주요 쟁점으로는 해독상의 문제와 창작 시기에 대한 문제가 있다. 창작 시기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면 <모죽지랑가>가 죽지랑이 죽은 뒤에 추모의 정을 담아 창작되었을 것이라는 견해와 죽지랑이 살아있을 때 지어진 노래라는 견해로 나뉜다. 죽지랑이 살아있을 때 <모죽지랑가>가 지어졌다는 견해는 죽지랑이 득오곡이 일선에 끌려갔을 당시 득오를 위문한 일에 감복하여 지어졌다는 것이며, 죽지랑 사후에 노래가 지어졌다는 견해는 노래의 내용상 죽지랑 사후 또는 최소한 그가 늙어 죽음을 앞둔 시기에 지어졌다는 것이다. 이 같은 차이는 <모죽지랑가>를 해석함에 있어 노래 자체에 집중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배경설화와의 관계 속에서 해석하느냐 하는 점에서 발생된다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모죽지랑가>의 10구체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모죽지랑가>가 8구체가 아닌 10구체 향가일 가능성은 <삼국유사> 소재 기타 향가와 달리 ‘…歌曰’하고 향가 가사가 바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행이 바뀌어 가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과 첫머리의 ‘去隱’이 명사를 꾸미는 말로 사용되었지 문장의 처음에 사용된 용례가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는 <모죽지랑가>의 해석에 있어 독특한 견해이기는 하지만 아직 <모죽지랑가>가 10구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지 않다. (해독상의 문제는 <원문보기> 참조)
연계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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