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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이 타는 가을강

작품명
울음이 타는 가을강
저자
박재삼(朴在森)
구분
1950년대
저자
박재삼(朴在森, 1933~1997) 1933년 4월 10일 도쿄 출생. 경남 삼천포에서 성장했으며, 고려대 국문과를 중퇴했다. 현대문학사, 대한일보사, 삼성출판사 등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제2회 현대문학신인상, 한국시인협회상, 노산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인촌상 등을 수상했다. 1953년 시 <강물에서>가 모윤숙에 의해 <문예>에 추천되고, 1955년 시 <정적>이 서정주에 의해 <현대문학>에 추천됨으로써 추천 완료하였다. 1962년 첫 시집 <춘향이 마음> 이래 다수의 시집과 시선집을 간행하였고, 1997년 6월 8일 타계했다. 박재삼의 시세계는 시 <춘향이 마음>(1956)과 <울음이 타는 가을강>(1959) 등으로 대표되는데, 그는 이런 시들을 통해 한국 서정시의 전통적 음색을 재현하면서 소박한 일상생활과 자연에서 소재를 찾아 애련하고 섬세한 가락으로 노래했다. 그는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 골목을 빠져 나와 바닷가에 서자”(<밤바다에서> 1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슬픔이라는 삶의 근원적인 정서에 한국적 정한의 세계를 절제된 가락으로 실어, 그 속에서 삶의 예지와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그의 시에 있어서 자연이란, 삶의 이치를 완벽하여 구현하고 있음으로써 영원하고 지순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세계이다. 그는 그 자연에 의지하여 위로와 지혜를 얻지만, 때로는 자연의 완벽한 아름다움과 인간과의 거리 때문에 절망하기도 한다. 박재삼의 시는 1950년대 주류이던 모더니즘 시의 관념적이고 이국적인 정취와는 달리 한국어에 대한 친화력과 재래적인 정서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주어, 전후 전통적인 서정시의 한 절정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어체의 어조와 잘 조율된 율격은, 그의 시의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을 보장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1959년 2월 <사상계>에 발표한 박재삼의 시. 이 시에 등장하는 ‘울음’, ‘눈물’, ‘가을’ 등의 이미지는 박재삼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지만, 이 시에서는 보다 섬세하고 뛰어나다. 또한 이 시는 전체적으로 성숙과 소멸의 이미지로 덮여 있는데, ‘가을 햇볕’, ‘등성이’, ‘제삿날’, ‘해질녘’, ‘가을강’ 등이 그것이다. 시인은 이런 비유들을 통해 사랑의 성숙을 죽음과 소멸의 이미지로 채색함으로써, 통념적인 것보다 훨씬 강렬하고 새삼스러운 체험으로 바꿔놓는다. 서러운 사랑의 귀결은 소멸이지만 그 사랑은 강렬한 시적 이미지를 통해 다시 태어나게 되고, 그리하고 소멸과 재생의 의미를 동시에 갖게 된다. 시인은 노을이 붉게 타는 가을강의 숨막히는 아름다움을 통해, 삶의 서러움을 하나의 정화된 의미로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러운 사랑의 이야기는 한낱 소멸의 이미지에만 묶여 있지 않고, ‘울음이 타는 가을강’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매개로 하여 삶의 근원에 대한 깊은 성찰과 새로운 자각으로 독자들을 이끌어 가게 된다. 박재삼은 이처럼, 평범한 삶의 체험을 생생하고 강렬한 정서로 부각시키는데, 그러한 과정에는 구어체의 생동감 있는 어조의 변주라는 특유의 시적 장치가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겄네.” 시의 상(想)과 상(像)의 융합이 시의 표현임을 보여준다. 박재삼의 서정이 인상적 지각과 삶의 지각이 합쳐지면서 그의 시는 상징적인 효과를 더해가게 되는 것이다. <울음이 타는 가을강>이 보여주는 것처럼 박재삼은 인간의 정이 자연을 통하여 시각화되는 맑고 밝은 감각을 지니며, 삶의 뜻을 강렬하게 체험하는 인간일수록 정은 심성의 바탕임을 보여주게 된다. ‘제삿날’과 ‘해질녘’이 빚어내는 정서는 ‘울음’과 유기화되며, 다시 그 ‘울음’은 노을과 연상되고 그 노을은 죽음과 연결되어 ‘제삿날’의 ‘불빛’은 죽은 자와 산 자들이 모여드는 ‘우리’를 끌어오게 한다. 이러한 시표현은 분명히 서정시의 강력한 호소력이며, 그러한 호소력은 시상들의 상징적 융합을 전제로 비롯되는 것이다. 그의 첫 시집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의 시는 서정의 원형을 ‘님’의 만남에 두었으며, 그 만남의 확대에 따라 시정신 역시 부단히 성장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시정신은 자연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진전해왔다. 그러한 수용의 진화를 세 단계로 나누어서 볼 수 있는 것이다. (1) 환상적 직관의 수용(시인의 상상이 충만되어 있을 뿐 인생의 체험은 배제되어 있다.) (2) 인상적 지각의 수용(시인의 상상력이 관여되어 시표현은 삶의 체험과 연관을 맺는다.) (3) 서정적 의식의 수용(시인은 우리를 의식하게 된다. 그의 서정은 상황에 접한다.) 박재삼의 서정은 (3)에 이르러 본질적으로 깊어지는 반면에 ‘님’의 만남에서 삶을 만나게 된다. 그에게 다가오는 상황은 비정스럽게 체험되고, 그 체험에서 서정을 의식하게 된다. 이제 ‘님’의 만남을 자연을 통하여 환상하지 않는다. 삶은 그에게 하나의 ‘님’이며, 그 ‘님’을 정으로 한사코 수용하려고 할 때 박재삼의 서정의식은 끈질기게 동한다. (1)에서 보여준 사치스러운 평면적 시구성보다는 체험에서 우러난 정을 자연에다 실감있게 담는다. 박재삼에게 인생이란 자연과 우리가 존재로서 접해지는 시간과 공간의 장이 된다. 자연의 존재는 그 자체의 움직임이 있고, 움직일 때 저마다의 소리를 낸다. 바람소리, 물소리, 돌소리, 나아가 풀잎이 자라는 소리마저도 듣는 이는 듣는다. 소리는 존재의 동함을 뜻하고, 그 동은 생명이 있음을 뜻하게 된다. 이처럼 천지에 소리가 충만해 있다 함은 전지에 생명의 정이 충만해 있다 함과 동질적인 발상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소리는 다른 소리와는 특이한 소성(素性)을 간직한다. 한 핏줄 한 고장에서 생사를 같이 한 인간들 사이에 의사를 통하게 하고 정을 통하게 한다. 인간의 소리는 뜻이 있고, 동시에 음정이 있는 것이다. 자연의 소리 그 자체는 소리일 뿐이지만 인간의 소리는 생명력의 소망에서 인간과 인간끼리 약속된 소리인 것이다. 약속된 소리는 뜻의 약속이며 정의 약속인 것이다. 인간의 발심을 예부터 이(理)와 정(情)에 두었다. 이가 보편성의 법칙을, 그리고 질서를 추구하는 심성이라면 정은 개체성을, 그리고 본능적으로 질서와 법칙에 대한 저항을 하려는 심성에 속한다. 사람의 소리와 지닌 뜻은 심성의 이에 따르고, 사람이 내는 소리의 정은 심성의 정에 따른다. 사람의 소리를 언어라고 할 때 글과 말을 합한 것이며, 시의 매체는 언어의 글자가 지닌 기능의 소리보다는 말이 지닌 것을 택하게 된다. 시는 사람의 소리이며, 그 소리는 생명의 말인 것이다. 뜻으로의 말이라기보다는 정으로의 말인 것이다. 정의 소리는 개체적인 소리이기 때문에 그 말을 하는 종족 특유의 내밀한 통정을 통하여 갖가지 삶의 체험을 뜻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생리적으로 전하는 것이다. 소리의 생리적 전달이 바로 시의 운율인 것이다. 생리적 전달의 운율 그것은 호흡마디의 조화이며, 그 조화가 이루어질 때 시의 소리는 아름다움을 얻는다. (······) 박재삼은 시의 소리를 음수율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체질에 감아드는 율조를 자아내는 감성을 첫 시집부터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박재삼론’, 윤재근, <현대문학>, 1977.5문학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정확한 답을 대지 못한다. 그러면서 문학을 하고 있으니 모순일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아마도 답에 정확성이랄까 명징성이 없는 것이 문학 자체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정확한 답을 못 댄다고 하더라고 그것을 도통 모른다고만 할 수 없다는 데에 문학이 가진 오묘한 진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 말을 아끼고 사랑한다 하여, 누구나 시인이 된다면, 그것은 쉬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훌륭한 시인, 그것이 된다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작업이라는 것을 안다. 어느 정도의 자기류라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그것이 완벽한 자기의 말법이고 또 그것이 많은 독자를 획득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자기의 말법 안에 사람들을 가두어 놓는 일이 쉽지 않은 것임을 어쩌랴. 더구나 시는 짧은 형식이기 때문에 그것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먼 거리가 있는 사람까지 안심하고 지내기 마련이다. 그 만큼 시를 이루어 놓는 일은 몇 곱절 더 어려운 것이다. 이것이 시를 하기는 쉬우나, 그것을 잘 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말이 나온 까닭인 것이다. 그것은 시에만 한한 얘기는 아닐 터이고, 모든 일이 그것을 ‘잘 하기’가 누워서 떡먹기겠는가. 대(竹)에 칼질을 하는 사람은 댓살을 비단결처럼 잘게 썰고, 도자기를 굽는 도공에게서는 열도를 재는 데 있어 미세를 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것은 훈련에 익은 솜씨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도 정작 잘 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에나 비유할 수 있을지. 요는 자기가 하는 일에 자기의 혼백을 불어넣는 그 일이 중요하다고 보겠다. ‘문학한다는 것’, 박재삼, <노래는 참말입니다>, 열쇠, 1980
관련도서
<박재삼시전집>, 민음사, 1998 <한국현대시인론>, 양혜경, 새문사, 2003 <현대시의 자연과 모더니티>, 진순애, 새미, 2003 <한국 서정시와 자연의식>, 황인원, 다운샘, 2002 <시의 아포리아를 넘어서: 21세기에 새롭게 읽는 한국 대표 난해시 28편>, 이숭원 외, 이룸, 2001 <한국현대시인연구>, 박진환, 자유지성사, 1999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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