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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金南祚)

예술가명
김남조(金南祚)
전공
개요
김남조 시의 정신적 지주는 가톨릭의 사랑과 인내의 계율이다. 이 때문에 모든 작품은 짙은 인간적인 목소리에 젖어 있으면서도 언제나 긍정과 윤리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배경으로 인해 ‘종교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종교적인 배경은 인간적인 목소리를 더욱 짙고 깊이있는 것으로 만드는 구실을 한다. 한편 기법상으로 보아 관심을 끄는 것은 리듬이다. 그의 시는 대부분 시행의 자유로운 배열로 형성되는데, 그 형성이 우아하고 유연한 리듬으로 정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이미지보다는 의미가 승한 그의 언어가 생생한 생명력을 갖는 것도 언어를 꿰뚫는 리듬 때문이다. 김남조는 1953년 첫 시집 <목숨>을 발간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에 들어갔는데, 인간성에 대한 확신과 왕성한 생명력을 통한 정열의 구현을 그려내고자 하였다. 특히 <목숨>은 가톨릭 계율의 경건성과 뜨거운 인간적 목소리가 조화된 시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두 번째 시집 <나아드의 향유>로 이어지면서 종교적 신념이 한층 더 강조되고 기독교적 인간애와 윤리의식을 전면에 드러내게 된다. 이후의 시들은 대부분 기독교적 정조를 짙게 깔면서 더욱 심화된 종교적 신앙의 경지를 보여준다. 정열의 표출보다는 한껏 내면화된 기독교적 심연 가운데서 절제와 인고를 배우며 자아를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시는 시집 <겨울 바다>에 이르러 정감의 세계를 상상력의 풍요로움을 통해 묘사해내면서 더욱 정갈해진다. 감각적인 언어와 동적인 이미지들이 함께 어우러져 일구어내고 있는 시 정신의 풍요로움은 정념의 시를 추구해온 이 시인의 가장 큰 미덕이다. - 참고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누리미디어, 2002 <국어국문학자료사전>, 국어국문학편찬위원회 편, 한국사전연구사, 1995
생애
경북 대구에서 출생한 김남조는 일본 큐슈(九州)에서 여학교를 마쳤고, 1951년 서울사범대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시절인 1950년 <연합신문>에 시 <성수(星宿)>, <잔상(殘像)> 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마산고교,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후 1954년부터 숙명여대 교수로 재직하였다.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제1회 자유문학가협회 문학상, 제2회 오월문예상, 제7회 시인협회상, 제33회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하였다. 모윤숙(毛允淑), 노천명(盧天命)의 뒤를 이어 1960년대 여류시인의 계보를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까지 발간된 시집은 모두 30여 권으로, 비교적 다작(多作)의 시인으로 꼽히고 있다. <목숨>, <나아드의 향유> 외에도 <정념의 기>, <풍림의 음악>, <잠시, 그리고 영원히>, <김남조 시집> 등을 대표시집으로 꼽을 수 있다. 1983년 서문당에서 <김남조 시전집>이 간행된 바 있다.
약력
1921년 경북 대구 출생 1944년 일본 후코오카시 큐슈여고 졸업 1948년 <연합신문>에 <잔상>, <서울대 시보>에 <성숙> 등을 발표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 졸업 / 마산 성지여고·마산고 교사 1953년 이화여고 교사 / 서울대·성균관대·숙명여대 등 강사 1955년 숙명여대 전임강사 1958년 숙명여대 조교수 1961년 숙명여대 부교수 1964년 숙명여대 교수 1981년 가톨릭문인회 회장 1984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 교육개혁심의회 위원 1986년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1987년 방송위원회 위원 1988년 한국방송공사 이사 1990년 제12차 서울세계시인대회 계관시인 /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피선 1991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 1993년 숙명여대 정년퇴임 · 명예교수 2000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상훈
1958년 자유문학가협회상 - <나무와 바람> 1963년 오월문예상 - <풍림> 1974년 한국시인협회상 1985년 서울시문화상 1988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1992년 3·1문화상 1993년 국민훈장모란장 1996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98년 은관문화훈장 2000년 지구문학상(일본 제정) 시집 <목숨>(1953) <나아드의 향유>(1956) <나무와 바람>(1958) <정념의 기>(1960) <풍림의 음악>(1963) <겨울 바다>(1967) <달과 해 사이>(1967) <설일>(1971) <사랑초서>(1974) <동행>(1976) <빛과 고요>(1982) <시로 쓴 김대건 신부>(1983) <바람세례>(1988) <평안을 위하여>(1995) <희망학습>(1998) 단편소설집 <아름다운 사람들>(1984) 수필집 <잠시 그리고 영원히>(1964) <시간의 은모래>(1966) <그래도 못다 한 말>(1968) <다함없는 빛과 노래>(1971) <여럿이 혼자서>(1972) <은총과 고독의 이야기>(1977) <기억하라, 아침의 약속을>(1979) <사랑의 말>(1983) <생각하는 불꽃>(1985) <끝나는 고통, 끝이 없는 사랑>(1991) <사랑 후에 남은 사랑>(1999)
작가의 말
(……) 나와 시는 동거인의 관계이다. 둘은 오랜만에 민감한 사이였고, 무수한 시행착오와 갈등의 터널을 지나와서야 겨우 얼마간 화친의 길목으로 접어들었다. 전날엔 긴장과 탄력을 유지했다 한다면, 이즈음은 헐렁한 사이로 편하고 자연스럽다. 오십 년 이상의 연륜을 포개면서 갈등과 격돌, 체념과 관용의 곡절들 끝에 겨우 다투지 않게 된 부부나 연인 사이처럼 되었음이 근래의 실정이다. “미국엘 가서 사막을 보았어.” 내가 말을 건네면 그는 대답한다. “알고 있어. 나도 함께 갔으니까”라고. 이럴 때 나는 따뜻해진다. 귀국해 그간에 미루어 둔 글과 다른 일거리들을 떠올렸으나 민망하게도 며칠간 쉬어버린다. 쉬면서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 여행을 함께 다닌 이들에 대해 생각해보았고, 충격과 감동을 그칠 새 없이 안겨주던 대륙의 산하, 그 절묘한 풍광들을 떠올렸다. 도처에서 영원성의 모상을 그리고 소멸과 탄생의 거대한 드라마를 볼 수 있었으며 대자연에도 아니, 대자연에야말로 수난과 고통의 역사가 누적되어오고, 현재에도 끓는 용암이 그 자신의 살결을 뒤덮거나 거대한 수림을 일시에 불사르는 일이 생겨남을 알게도 되었다. (……) 문학은 종이 위에 먹을 적시는 서술이기 전에 분명한 획을 그으며 지나가는 삶 자체일 것이다. 물론 현장성이 곧 문학인 건 아니다. 그러나 문인들이 흔히 빠져들기 쉬운 관념 과잉과 체험 공백 등은 심각한 허점이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의 준령과 절벽을 모르며, 살아있는 진실의 중심을 꿰뚫는 일에선 그 먼 거리에 있었을 것이다. (……) 창작이란 언제나 새로운 출발이어야 하며 그렇지 못하다면 시와 시인의 큰 과오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더 찾아내는 일, 그 중요 부분을 포기하게 되기에 말이다. 미래의 시는 무한한 가능성이며 찾아내는 이로 하여금 빛나는 탄생이 될 것이기에 시인은 끝없이 새로운 진실에 육박해야 한다. 밝은 눈에만 보이게 될, 청결한 출생들……. 이를 찾으면서 분발하는 이들 중에 부디 나도 있으려 하느니. - ‘나의 시는 나의 동거인이다’, 김남조, <한국대표시인 101인선집: 김남조>, 문학사상사, 2002
평론
시인은 독자에게 어떤 이미지로서 다가온다. 가령 이육사는 ‘천고 뒤에 백마 타고 올 초인’이란 그의 시구와 더불어 광야에 말 달리는 선구자, 민족의 앞날을 내다본 예언자의 풍모로서, 윤동주는 고뇌하는 나르시시스트, 청교도적 순결성을 지닌 영원한 청년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는지? 또 김수영-하면, 비리와 팽팽히 대결하려는 반골정신의 표본쯤으로 독자들에게는 알려져 있다고 본다. 이런 뜻으로, 필자는 시인 김남조를 시의 전당을 지키는 여사제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의 시, 기도의 시를 누구보다도 많이 또 철저하게 써온 이 시인은, 들끓어 오르는 정념을 순백의 사제복으로 감싸고, 영과 육의 갈등,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과의 양면성을 변증법적으로 합일시키는 과정을 보이고 있는 것 같이도 생각되는 것이다. (……) 김남조의 등단은, 여느 시인들처럼 누구의 추천으로 신문이나 잡지에 그의 시가 실렸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단행본으로 시집을 간행함으로써 단번에 이루어졌다는 데 묘미가 있다. 단독으로 시집을 간행했다고 해서 문단인의 관심을 끈다거나, 독자들에게 널리 읽힌다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의 시는, 처음부터 완성도가 높은, 만만찮은 것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폐침윤을 앓고 있던 젊은 여성의 감수성, 이성에 대한 막연한 설렘, 전화(戰火)로 황폐하게 된 조국의 산하, 피난민의 물결과 생존의 몸부림,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생명에 대한 본능적인 집착으로 삶의 절실함을 목청 높이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 전란이 가라앉고 사회가 안정되고, 물질적 풍요가 찾아와 그의 관심사도 자신의 내면세계, 영혼의 문제에 돌려져도, 젊은 날의 상흔은 아물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리하여 ‘사랑과 기독의 시인’으로 통하는 이 시인답지 않게, 전화 속에 산화한 젊은이들에게 시를 헌정하기도 한다. 그 젊은이들은, 국군묘지에 잠든 사람일 수도, 4·19 희생자 묘역에 묻힌 자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초기 시는 작가 자신의 말처럼 정돈이 덜 된 채로 원색적 언어가 정열에 휩쓸려 쏟아지는 느낌이 없지 않다. 중기의 시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친과의 사별이 분기점이 된다. 그를 탄생시키고, 또 오직 그만을 위해 살아왔고, 사랑했던 분의 별세가 가져다 준 충격이 그의 시에 큰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는 죽음을, 생명의 사멸이 아니라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믿는다. 그리하여 초기 시에도 그런 빛깔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종교시적 지향이 한결 뚜렷해진다. (……) 김남조 시가 사랑의 시, 기도의 시라는 말은 옳다. 그는 끊임없이 사랑하고, 절망하고, 기도를 한다. 진홍의 관능에 몸서리치는가 하면 추위를 탄다. 그의 시는 사포의 그것처럼 연가로 일관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위에 인용한 <여인>에서처럼 신화적 모티프가 다루어지기고 하고, 혹은 <촛불>에서 보듯 형이상학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는 문학사에 있어서는 광복 이전의 모윤숙, 노천명과 1960년대 이후의 여류시인들 사이를 이어 주는 교량의 위치에 있는 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여타의 여류들의 밑거름에 그치지 않고, 높은 봉우리로 솟아 있는 까닭은, 상원외 교수의 말마따나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신앙인으로서, 마침내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정념의 존재 양식, 무릇 인류가 시라는 것을 손에 넣은 이래로 되풀이하여 노래해온 인생의 애환을 순한 말로 읊조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 이에 더하여 자기 시가 지향해야 할 존재양식에 대한 중엄한 성찰과 시인으로서 자신에게 과하는 계율 때문이 아닌가 한다. (……) - ‘김남조론: 정념의 시인’, 김은전, <한국현대시연구> 민음사, 1989
관련도서
<김남조 시전집>, 김남조, 서문당, 1991 <한국대표시인 101인선집: 김남조>, 김남조, 문학사상사, 2002 <한국현대시연구>, 김용직 외, 민음사, 1989 <한국현대여류시에 나타난 애정의식 연구: 모윤숙, 노천명, 김남조, 홍윤숙 시를 중심으로>, 김복순, 서울여대 박사논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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