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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종

작품명
자유종
저자
이해조(李海朝)
구분
신문학의 등장~1910년대
개요
1910년 7월 30일 광학서포에서 출간된 이해조의 신소설. 당시의 사회상과 작가의 개화의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이해조의 초기 작품이다. ‘토론소설’이라는 표제가 붙은 이 작품은 매경부인의 생일잔치에 모인 네 명의 신여성들이 시국문제와 국가의 장래를 토론하는 열 다섯 개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당대 지식인들이 주창한 개화의식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형식면에서는 근대소설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현상으로서, 당시의 토론체 소설과 상통하면서 몽유록과의 연관성도 보여준다. 소설의 완결성면에서보다 그 내용과 사상면에서 주목되는데, 등장인물이 모두 여성이며 여권론 주장을 편다는 점에 선구적 의미가 있고, 자유로운 개인의 결합으로서 국민을 지향하는 사상도 엿보인다. 모두가 양반층 부인의 대화라는 점, 국민을 지향하면서도 유교사상에 의거하고 있는 점 등은 국민계몽에 대한 작자의 의식적 한계를 드러내지만, 당시의 시대정신인 반봉건·반외세사상을 강하게 깔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신소설들과 구분된다.
내용
부인 네 사람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반부는 현실비판적인 토론, 후반부는 이상적 사회건설을 지향하는 꿈 이야기로 되어 있다. 사회자격인 신설헌부인은 토론회를 제의하면서, 먼저 구시대의 유습인 여성의 인종과 예속이 타파되어야 한다고 전제한다. 여성 역시 새시대의 의미와 국가·민족의 앞날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이로써 토론의 내용은 여권문제, 교육을 통한 개화계몽, 국가사회의 부강, 자주책, 미신타파, 신분과 지방색의 타파 등으로 이어진다.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교육·계몽을 통한 자주권의 회복, 일체의 봉건적 질곡의 타파가 필요하다고 논한다. 작품의 주제의식은 신설헌부인의 꿈 이야기를 통해 다음과 같이 집약된다. “나는 어젯밤에 대한제국 자주독립할 꿈을 꾸었소. 활멸사라 하는 사회가 있는데, 그 사회 중에 두 당파가 있으니 하나는 자활당이라 하야, 그 주의인즉 교육을 확장하고 상공을 연구하야 신공기를 흡수하며 부패세상을 타파하야 대포도 무섭지 아니하고 장창도 두렵지 아니하야 국가에 몸을 바치는 사업을 이루고저 할세, 그 말에 외국의뢰도 쓸데없고 한두 개 영웅이 혹 국권을 만회하야도 쓸데없고 오직 전국 남녀 청년이 보통 지식이 있어서 자주권을 회복하여야 확실히 완전하다, 하야 학교도 설시하며 신서적도 발간하야 남이 미쳤다 하든지 못 생겼다 하든지 자주권 회복하기에 골몰 무가하나 그 당파의 수효는 전 사회의 십분지 삼이요.”
저자
이해조(李海朝)
생애(1869~1927)
호는 열재(悅齋)·이열재(怡悅齋)·동농(東濃), 필명으로는 선음자(善飮子)·하관생(遐觀生)·석춘자(惜春子)·신안생(神眼生)·해관자(解觀子)·우산거사(牛山居士). 1869년 경기도 포천군 출생. 어릴 적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19세에는 초시에 합격했으며, 25~26세 무렵에는 대동사문회(한시를 즐기던 유학자들의 모임)를 주관했다. <제국신문>, <황성신문>, <매일신보>에 근무했으며, 1908년 대한협회 교육부 사무장, 실업부 평의원, 기호흥학회 평의원, <기호흥학회월보> 편집인으로 활약하는 한편, 양기탁, 주시경, 이준, 노익형 등과 함께 광무사를 조직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59세를 일기로 포천에서 병사했다.
주요작품 및 작품세계
미완의 한문소설 <잠상태>(1906)를 쓴 이후 신소설 창작에 임하여 <강명화실기>(1925)에 이르기까지 4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해조의 문학은 1910년을 분기점으로 구분될 수 있다. 전기에 해당하는 소설로서 미신타파를 주장한 <구마검>(1908), 정치소설적 성향의 토론체 소설 <자유종>(1910) 등은 우리 소설을 근대소설로 일보 전진시킨 귀중한 업적이었다. 1910년을 기점으로 국권의 상실은 이해조의 전반기문학을 규정했던 애국계몽사상의 고양을 가로막게 된다. 1910년 이후에도 일제와 타협한 작가의 착잡한 심경을 흥미롭게 드러낸 <만월대>(1910)와 <화세계>(1911), 동학봉기의 역사적 의미를 진지하게 반성한 <화의 혈>(1912) 등 뛰어난 작품을 생산하기도 했다. 그러나 추리소설적 요소를 지닌 <구의산>(1912)을 경계로 이해조의 소설은 애국계몽기에 보여주었던 독자적 특징을 버리고 상투적 구소설과 신화로 복수담을 무잡하게 혼합한 통속소설을 창작하기에 이른다. 한편, 명창 박기홍, 심정순 등의 구술을 산정하여 판소리계 소설들을 개작하기도 했는데,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등을 개작한 <옥중화>·<강상련>·<연의 각>(1912), <토의 간>(1916) 등이 그것이다. 초기의 정치소설적 형태로부터 후기로 갈수록 대중적인 흥미를 강조하는 쪽으로 변화하였으며, 특별히 당대 풍속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리뷰
(······) <자유종(自由鍾)>은 광학서포에서 1910년 7월 30일, 그러니까 국치(國恥) 직전에 간행된 애국계몽기 최고의 정치소설의 하나이다. 작가가 ‘토론소설’이라고 명명했듯이, 최소한의 소설적 의장마저 벗은 채 직접적인 정치토론으로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이 때문에 혹자는 이 작품을 소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일종의 백과사전적 특성을 지닌 소설 장르 자체의 잡식성에 유의해야 할 뿐더러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계몽주의 시대에는 토론체 소설이 흔한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맞이하게 될 토착정권의 완전한 상실을 눈앞에 둔 이 절박한 위기의 시대를 염두에 둔다면 이 소설이 왜 이런 모양으로 출현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 소설에 등장하는 토론 참가자가 모두 여성이라는 점도 이채롭다. 작가는 왜 여성의 관점을 채택했을까? 국권회복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의 메시지를 결합하고 있는 이 선구적 페미니스트의 작품은 남성에 의해 독점돼온 당시의 민족운동들이 참담한 실패로 귀결되는 것에 대한 뼈아픈 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근본적 관점에서 그는 여성 토론자를 내세워 민족운동의 다양한 형태들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퍼부어댄다. 작가는 네 명의 개명한 양반 부인들의 수준 높은 토론을 통해서 기존의 개화파·위정척사파·민중적 저항파(갑오농민군)에 의해 주도되었던 일체의 급진적 운동방법에 회의를 표명하면서, 근대적 국민의 창출을 지향하는 국민주의를 꿈꾸었다. 요컨대 백성으로부터 국민으로-그의 계몽주의는 바로 여기에 근본 뜻이 있는 것이다. 중세적 의미의 백성이 근대적인 국민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무엇이 요구되는가? 그는 여기서 사람다움의 본바탕인 자유의 문제를 제기한다. 외부적으로는 중세적 보편주의 즉 화이론(華夷論)에서 해방되고, 내부적으로는 신분적·지역적·성적 차별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결합으로서의 국민의 출현을 열망하는 데서 이해조의 부르주아민주주의적 지향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면 국권회복의 주체를 국민에 두는 그의 사상은 국민혁명론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의 계몽주의는 흥미롭게도 서구 기독교를 모형으로 계급적인 유교를 국민적인 공자교로 개혁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일종의 종교개혁을 통해 국권회복을 꿈꾸는 것이다. 우리는 나라의 식민지화라는 미증유의 위기에 직면해서 자연스럽게 솟아오른 이 실험적인 공자교 구상의 충정을 미루어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이 또한 깨지기 쉬운 공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안다. 여기에 상승하는 평민의 사상이 아니라 개명한 양반층에 기초한 이해조 계몽주의의 한계가 또렷한데, 한편 오늘날 횡행하는 유교자본주의론이 공자교 구상의 한 변형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 ‘애국계몽기의 이해조 소설’, 최원식, <자유종>, 창작과비평사, 1996
관련도서
<한국근대소설사론>, 최원식, 창작과비평사, 1986 <이해조와 그의 작품세계>, 이용남, 동성사, 1986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출판부, 2004 <한국문학명작사전>, 임헌영·김재용, 한길사, 1994 <한국근대문인대사전>, 권영민 편, 아세아문화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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