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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작품명
자화상
저자
서정주(徐廷柱)
구분
1940년대
저자
서정주(徐廷柱)
생애(1915~2000)
전북 고창 출생. 마을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줄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앙고보·고창고보에서 수학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고, 김동리·함형수 등과 함께 시전문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면서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결혼 후 일제하의 암담한 현실에 떠밀려 서울을 중심으로 이곳저곳을 방랑하면서 기거했고, 한동안 만주에 가서 양곡주식회사 경리사원으로 일한 적도 있으며, 일제 말기에 귀국해 향리와 서울을 떠돌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에 앞장서 시분과위원장을 맡았고, 정부수립과 함께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창립과 함께 시분과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54년에는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다. 전주의 전시연합대 강사, 서라벌예대 교수, 동국대 교수,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시인협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주요작품 및 작품세계
미당 서정주의 초기시는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아 악마적이며 원색적인 시풍을 보여주고 있다. 첫 시집 <화사집>에서 잘 드러나듯이 토속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여 인간의 원죄의식과 원초적인 생명력을 읊는 것이다. 하지만, 해방이 되면서 인간의 운명적 업고(業苦)에 대한 인식은 동양적인 사상의 세례를 받아 영겁의 생명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 시기의 시집 <귀촉도>는 표제시에 있어서부터 동양적인 귀의를 시사해주는 것으로, 분열이 아니라 화해를 시적 주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전환은 갈등과 화해라는 심리적 리듬 이외에도 <국화 옆에서>, <밀어> 등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토착적인 정서와 고전적인 격조에의 지향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956년에 간행된 <서정주시선>에서는 <풀리는 한강 가에서>, <상리과원> 등의 작품으로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한과 자연과의 화해를 읊었고, <학>, <기도> 등의 작품에서 원숙한 자기 통찰과 달관을 보여주고 있다. 서정주의 시는 <신라초>에 이르면서 새로운 정신적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그의 초월적인 비전의 신화적인 거점이 되고 있는 신라는 역사적인 실체라기보다는 인간과 자연이 완전히 하나가 된 상상력의 고향과도 같다. 서정주는 <신라초>에서 불교사상에 기초를 둔 신라의 설화를 제재로 하여 영원회귀의 이념과 선(禪)의 정서를 부활시켰고, 유치환과 더불어 생명파 시인으로 불려졌다. 그의 사상적 기조는 영원주의, 영생주의이며, 문화사조상의 배경은 주정적 낭만주의, 예술관은 심미주의적 입장이다. <신라초> 이후에 더욱 진경을 보인 작품 50여 편을 모아 1969년에 펴낸 시집 <동천>에서는 불교의 상징세계에 대한 관심이 엿보인다. 이처럼 서정주의 시세계는 전통적인 서정세계에 대한 관심에 바탕을 두고 토착적인 언어의 시적 세련을 달성하였다는 점, 시 형태의 균형과 질서가 내재된 율조로부터 자연스럽게 조성되고 있는 점 등이 커다란 성과로 평가된다. 이 시는 시인이 23세 때 쓴 것으로, 젊은 날의 어두운 자기 인식을 보여준다. 먼저, 화자의 어린 시절 가정 환경이 진술된다. 가족 구성원의 간략한 소묘로 제시되는 어린 시절 집안 풍경은 어둡고 적막하고 가난하다. 집안 어른들은 모두 믿고 의지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는 종 신분의 ‘애비’나 늙고 쇠약한 ‘할머니’, 임신을 하여 풋살구가 먹고 싶어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어매’ 등은 제대로 된 어른 노릇을 할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다. 아버지가 종이었다는 진술은, 그 사실 여부를 떠나서 자기 삶에 대한 모멸감을 드러내는 충격적인 발언이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조차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으므로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집안에는 할머니와 어머니만 있는데, 두 사람 모두 화자에게 정성을 쏟을 만한 여력이 없다. 할머니는 파뿌리처럼 늙었고, 임신을 한 어머니는 오히려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 이런 상황에서 어린 화자는 “손톱이 깜한 에미의아들”로 제시된다. 여기서 화자를 수식한 까만손톱은 삶의 누추하고 비천한 성격을 드러낸다. 그 다음에는 역시 집에 있지 않은 외할아버지에 대하여 진술한다. 외할아버지는 오래 전에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 화자는, 바다라는 미지의 세계로 나가서 돌아오지 못한 외할아버지처럼, 고향의 삶에 안주하지 못하고 멀리 떠돌아다니게 될 운명을 지녔다. 이러한 환경과 운명의 존재이기 때문에 “스믈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팔할이 바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스믈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팔할이 바람이다”라는 구절은 탁월한 시적 진술이다. 이것은 그가 따스한 보살핌이나 제대로 된 교육과는 거의 무관하게 자랐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바람’은 단순히 그러한 것들이 결핍된 거친 성장 환경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다 근본적으로 세상의 질서나 제도나 규범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 이성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돌발적이고 충동적인 혼돈 속에서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화자는 이러한 ‘바람’에 이끌려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것처럼 자라온 사정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데, 이런 태도 자체가 자신과 같은 존재를 멸시하는 세상에 대한 그의 오기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오기는 이어지는 시행에서, 자신의 ‘죄인’과 ‘천치’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뉘우치지는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로 나타난다. 그것은 애초에 주어진 존재 조건이 그러했으므로 자신이 뉘우칠 것은 없다는, 운명과 세상에 대한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화자의 이러한 태도에는 세상의 질서에 안주할 수 없고, 세상의 제도로부터 보호받지도 못하고, 세상의 규범과 갈등을 일으키며 떠돌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적 삶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부여의 의도가 담겨 있다. (……) 바람 속에서 성장한 삶, 세상으로부터 죄인과 천치로 멸시당하는 삶, 어쩔 수 없이 불순한 충동에 이끌리는 삶, 그래서 불순한 피가 섞인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삶이라는 것이 화자의 자기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은 마지막 구절에서 “볓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을 느러트린/병든 수캐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라는 자기 모멸적 진술로 마무리된다. 자신의 삶을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에 비유한 것은 충격적이다. 여기에는, 불순한 피로 인하여 스스로 지치고 소외된 실존의 길을 걸어온 화자의 모습과 함께 그러한 자신의 삶과 세상에 대한 화자의 오기 어린 심정이 나타나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한 모멸적 인식을 이처럼 강렬한 언어로 당당하게 드러낸 경우는 달리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 참고: <서정주의 화사집을 읽는다>, 이남호, 열림원, 2003(……) <시인부락>의 <후기>가 미당이 지닌 의식의 지향성과 시 세계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었다면, 그의 대표작 <자화상>은 미당 자신에 대한 의식을 여러 겹으로 드러내고 있는 주요한 작품이다. 시집 <화사집>의 맨 처음에 실려 있는 이 작품은 “애비는 종이었다”는 구절에서 보는 것처럼 시적 자아의 설정부터가 다분히 문제적이거니와, 시인 서정주가 일개 자연인으로 성장해온 가족 환경뿐 아니라 그가 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살아가는 방식, 시와 시인에 대한 인식 등을 포괄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결과적이긴 해도 이 작품에 미당의 숙명적인 어떤 운명의 행로가 이미 예언되어 있다는 점에서 평자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의 주목을 요하는 것은 이 시가 시인 자신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거울’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자화상’이란, 말 그대로 시인 자신에 대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가 그림이 아니라 기표와 기의로 짝지워진 언어로 되어 있다는 것은 시에 나타난 자아의 모습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의 정신이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에 있다고 볼 때 <자화상>에서 ‘세계’는 곧 시인 자신의 세계이며, 자아가 동일성을 추구하는 대상 역시 시인 자신에게로 향한다. 이는 <자화상>이 이중으로 중첩된 자아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이 그려내려고 하는 세계로서의 자아와, 시 자체에 드러나 있는 서정적 자아가 그것이다. 그러나 서정적 자아가 주관과 객관, 이성과 감성의 구분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의 것이고, 세계와의 접촉 없이도 존재하는 자아라는 점에서 이 둘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다. 명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뒤섞여 있다고 보는게 옳은 것이다. 미당의 <자화상>에서 ‘천치’와 ‘죄인’은 일차적으로 남들이 바라본 ‘나’의 모습, 다시 말해 ‘어떤 이’의 눈을 거친 세계로서의 자아상이지만, 이는 다시 서정적 자아의 주체인 시인(‘나’)이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자아상(그림자)이기도 한 것이다. 시에서 세계로서의 자아는 자연스레 서정적 자아의 눈을 거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상과 지향성의 관계로 볼 때 우리가 살펴볼 것은 서정적 자아가 세계로서의 자아를 드러내는 형식과 태도의 문제일 것이다. 이 시는 두 개의 탄생이 앞뒤로 놓여 있다. 시인의 탄생과 시의 탄생이다. 첫 행부터 제6행까지가 시적 화자인 ‘나’의 출생이며, 제12행부터 제16행(제2연)까지가 시의 창조이다. 대부분의 논자들이 서정주 초기 시가 지닌 이원적인 대립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주로 제2연에 논의를 집중시켰다. 즉, 정신과 육체, 성과 속, 선과 악, 미와 추, 천상과 지상, 상승과 하강, 개인과 사회 등 상호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동시에 껴안고 있는 초기 시의 특성이 바로 제2연의 ‘이슬’과 ‘피’에 집약돼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1연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었다. 물론 “애비는 종이었다”는 충격적인 진술이 갖는 도전적 개인주의나 식민지 현실과 맞물린 사회 역사적 파장, 그리고 “나를 키운건 팔할이 바람”이라는 구절이 함의하고 있는 떠돌이 의식이나 풍류 정신 역시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연의 전반부에 집중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시인의 탄생은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 부분이 미당의 전기적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고, 작품 전체의 의미로 보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또 앞에서 언급했듯이 대부분의 논자들이 이 작품을 서정주 시 전반을 이해하기 위한 징검다리로 삼았기 때문에 작품 전체의 의미에 대해서는 거의 천착하지 않았던 점도 하나의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확실히 미당의 대표작 <자화상>은 그의 시 전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다. 그것은 삶의 모순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대립의 원리에 의해 펼쳐지는 초기 시의 전개 과정이나, ‘바람의 숙명’으로 요약되는 그의 현실적인 삶의 여정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금으로선 비약이겠지만 이 작품은 그의 시가 후기에 동양의 일원적 감정주의로 후퇴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이나, 미당 시의 핵심이랄 수 있는 생명 탐구와 영원주의, 시인으로서의 정치적 이력 등의 이면을 살펴보는 데 꽤 유력한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특히 <자화상> 서두에 제시된 시인의 탄생이 그런 내용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 따라서 <자화상>의 앞부분은 시인 자신의 출생을 분명히 의식하고 그린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그렇게 볼 경우 “밤이기퍼도 오지 않”는 ‘종’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났음에도 집으로 들어오지 않는 데 대한 원망의 대상으로 그려지며, “파뿌리같이 늙은할머니”가 우두커니 서 있는 것 역시 아이가 태어났는데도 이를 지켜보지 못하는 집 나간 아들을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행위로 읽힌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은 이제 막 태어난 시인 자신보다 출산의 당사자인 어머니나 이를 도와야 했던 할머니에게 훨씬 깊이 각인되었던 것이며, 이를 시인에게 그대로 들려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5행의 “않는다하는”과 제6행의 “닮었다한다”의 간접화법이 이를 뒷받침한다. 시 전반부가 시인의 탄생을 의미하고 있다면 후반부인 2연은 시의 탄생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이 둘을 겹쳐놓고 읽을 때 새로운 의미가 발생한다. 즉 ‘에미’로부터 ‘아들’이 태어나듯이 시인에게서 ‘시’가 창조된다는 사실을 겹쳐놓으면, ‘에미’와 ‘시인’, ‘아들’과 ‘시’가 동일한 계열로 묶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시적 화자인 ‘나’이므로 ‘나’와 ‘에미’는 창조와 출산의 주체로서 등가의 위치에 놓인다. 이는 흔히 문인들이 작품 창조 과정을 ‘순산’ 혹은 ‘난산’에 비유한다는 사실에서도 그 유사성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미당의 의식 지향성이 모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에미의아들’인 ‘나’가 외할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은 시인이 자신의 유전적 기질을 부계 혈통이 아니라 모계 혈통에서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며, 시인 자신의 출생을 할머니의 어투에 기대고 있다는 것도 모성 지향성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자화상>에는 생명의 탄생과 대극에 놓이는 죽음의 그림자가 얼비치고 있다. 사실은 바로 이 점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인데, 시인 자신의 탄생과 시의 탄생에는 그에 버금가는 죽음의 이미지가 서려 있다. ‘나’가 닮았다고 하는 외할아버지는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도라오지 않는” 것으로 수식되는데 이는 곧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 (……)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자화상>에서 드러나는 죽음의 이미지나 죽음의 그림자 역시 시인의 지향성으로 보아야 하는가? 암스트롱은 지향적 상태와 표상을 거의 같은 개념으로 보면서 “지향적 상태 또는 표상의 핵심적인 특징은, 그것이 자신을 넘어서 무엇인가를 향해 있지만(또는 무엇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이 향해 있는 것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데 있다”고 한다. 그는 또 유리의 깨지기 쉬운 성질을 예로 들어 지향적 상태와 지향적 대상이 맺는 관계를 설명하면서, 유리는 당장 깨지지는 않지만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 성향은 원시적 종류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부연한다. 그러니까 <자화상>의 주요한 지향적 상태, 즉 표상은 생명의 탄생과 그 성장 과정이지만 죽음 또한 하나의 ‘성향’으로 지니고 있는 만큼 지향성의 내용에 포함시켜야 옳은 것이다. 사실 이는 하나의 생명체가 죽음과 관계 맺는 절대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하나의 생명 현상은 우리 몸의 세포나 나무의 잎과 꽃, 열매, 씨앗 등과 같이 크고 작은 무수한 단위 생명체들의 죽음을 딛고 진행되는데, 이 점은 하나의 생명 단위를 태양계 전체로 간주하는 온생명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생명과 죽음의 관계는 이처럼 ‘이슬’에 섞인 ‘피’처럼 모순적이고 역설적인데, 이는 미당 초기의 지향성이 근원적인 모순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게 본다면 “나를 키운건 팔할이 바람이다”는 진술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의식 주체가 그와 같은 지향적 모순 속에 놓여 있는 한, 그 바람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며, 그런 맥락에서 시인 서정주가 자기 내면의 ‘바람’에 휘둘렸다는 진술은 적절한 지적이었다고 동의할 수 있다. (……) - 참고: ‘서정주 시의 시적 환상과 미의식’, 김점용, <시적 환상과 미의식>, 국학자료원, 2003
작가의 말
(……) 나는 내가 누구임을 잘 안다. 똥도 제대로는 안 나올 만큼 전신이 마르고 말라붙은 가난뱅이여서, 아들딸 기르려고 푼돈 모으기에만 골몰하다 간 촌서당의 훈장의 장남, 그렇지만 우리 서가(徐哥)가 이 나라에 호적을 가진 이후로는 그래도 이조의 서거정(徐居正) 하나 다음은 갈 만한 시의 실력은 그래도 지니고 있는 것도 똑똑히 족보 다 뒤적여 보고 잘 알고 있다. 내가 내 일생에 제일 믿었던 한문책의 이해자인 고 범부 김정설의 말을 빌리면 ‘서거정은 이조 제1시인이다’하니, 이런 말 남 듣는데 말하기는 무엇하지만 나는 우리 민족시사 속에서는 그래도 꽤나 쓸모있게 쓴 시인놈의 하나에는 틀림없다는 것도 그래저래 자인을 하고 또 자위도 하고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 밝은 객관의 눈이 내게 열려 나를 또다시 깊숙이 들여다보면, 역시 할 수 없는 나는 떠돌이로다. 병신 같은 놈! 오죽 못났으면 저 인도의 그 빠진 이빨도 못 박고 살다 간 친구-마하트마 간디만큼한 능력 하나도 착용하지 못하고 그 얄량한 사상 하나 만들어주지 못하고 ‘야, 국이 끓나 밥이 끓나 두고 보기나 하자’ 할 줄 밖에는 속수무책짜리의 저능하디저능한 나는 결국 한 개 떠돌이로다. 그래 나는 솔직하게 말하자면은 그래도 겨우 자연인 자격이나 하나를 완전한 걸로 여기면서 지금 살고 있다. (……) - ‘떠돌이의 글’, 서정주, <미당산문>, 민음사, 1993
관련도서
<미당 시 전집>, 서정주, 민음사, 1994 <미당 자서전>, 서정주, 민음사, 1994 <서정주의 화사집을 읽는다>, 이남호, 열림원, 2003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 손진은, 새매, 2003 <서정주: 영원주의와 떠돌이 의식>, 박호영, 건국대출판부, 2003 <미당과 목월의 시적 상상력>, 엄경희, 보고사, 2003 <오봉옥의 서정주 다시 읽기>, 오봉옥, 박이정, 2003 <미당의 어법과 김동리의 어법>, 김윤식, 서울대출판부, 2002 <서정주 시정신>, 김정신, 국학자료원, 2002 <서정주 시와 영원지향성>, 김종호, 보고사, 2002 <서정주 예술언어: 그의 삶과 문학, 그리고 대표작 해설>, 송하선, 국학자료원, 2000 <미당 서정주>, 윤재웅, 태학사, 1998 <서정주 시 연구>, 육근웅, 국학자료원, 1997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출판부, 2004 <한국현대문학작은사전>,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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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徐廷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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