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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서울

작품명
병든 서울
저자
오장환(吳章煥)
구분
1940년대
저자
오장환(吳章煥)
생애(1918~?)
1918년 충북 보은 출생. 경기도 안성으로 이주하여 1930년 안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동학교 속성과를 거쳐 1931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문예과에서 공부했다. 1933년 <조선문학> 11월호에 시 <목욕간>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1936년 <낭만>·<시인부락>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1937년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했다. 이 기간 동안 도쿄(東京)에서 체류하며 최하층 노동생활을 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이념에 동조하는 습작시를 썼다. 1938년 이후 남만서점을 운영하면서 임화·김기림·김광균 등과 교류하였다. 8·15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해 활동하다가 1948년 2월경 월북하였으나 남로당계로 분류되어 숙청되었다.
주요작품 및 작품세계
1933년 <조선문학> 11월호에 시 <목욕간>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초기에는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성씨보(姓氏譜)>(1936), <여수>(1937) 등 전통적인 행과 연을 무시한 새로운 형식에, 문명을 비판하는 퇴폐적 분위기의 시와 고향을 잃은 지식인의 자의식을 읊었다. 그러다 1939년부터 내면화된 의식과 서정성을 조화시킨 시세계로 변화했는데, < The Last Train >·<헌사(獻詞)>(1938) 등이 그런 시들이다. 이 시들에서 지은이는 운명적 상황의식과 죽음의 비극적 이미지를 통한 시대적 위기상황과 역사적 전망을 보여준다. 이어 발표한 <향토망경시(鄕土望景詩)>(1940), <귀향의 노래>(1941), <성묘하러 가는 길>(1946) 등 ‘귀향’을 소재로 한 시에서는 상실감에 대한 대응방법으로서 고향에 되돌아가려는 탐구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8·15 해방 후에는 해방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어지러운 정치상황을 비판하는 시와 <병든 서울>(1945), <내 나라, 오 사랑하는 내 나라>(1946) 등의 서정시를 썼다. 시집으로 <성벽(城壁)>(1937), <헌사>(1939), <병든 서울>(1946), <나 사는 곳>(1947) 등과 번역시집으로 <에세닌 시집>(1946)이 있다. 1945년 12월 <상아탑>에 발표된 오장환의 시. 1946년 정음사에서 간행된 동명의 시집에 표제시로 수록되어 있다. 광복 직후의 혼란스런 사회를 바라보는 시적 자아의 현실 인식과 새 나라 건설의 의지를 노래하는 작품으로, 해방기 시단의 몇 안 되는 수작 중 한 편으로 손꼽히고 있다. 1~2연은 병상에서 광복을 맞은 시적 자아의 감격을 표현하고 있으나, 뒤로 갈수록 해방정국의 현실이 감격적인 것이 아니라 부패와 분열뿐이라는 현실 인식에 이르고 있다. 6연에서는 이런 현실을 ‘병든 서울’로 진단하고, 그 속에서도 새로운 조국을 세우려 애쓰는 젊은이들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7~9연은 나라를 빼앗겼던, 그리고 고향마저도 없었던 시절에는, 병든 ‘나’와 같았던 한민족이 비굴과 절망만을 느끼고 살았으나, 이제는 모두 “젊은이의 그리는 씩씩한 꿈들이 흰구름처럼 떠도는” 서울을 위하여 떨치고 일어나 새로운 자세로 살 것을 강력하게 권유하고 있다. 흥분과 감격의 노래만이 넘쳐났던 해방기 시단에서, 시적 자아가 보여주는 냉정한 현실 인식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민족현실의 시적 형상화는 광복 후 진보적 시운동의 한 전범으로 간주되어, 당대의 많은 신진시인들이 이 작품의 시 정신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출판부, 2004 (……) <병든 서울>은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8·15 광복을 맞은 지 40여 일 뒤인 9월 27일에 쓴 오장환의 대표적 장시이기도 하다. “8월 15일 밤에 나는 병원에서 울었다./너의들은 다 같은 기쁨에/내가 운 줄 알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일본 천황의 방송도,/기쁨에 넘치는 소문도,/내게는 고지가 들리지 않었다./나는 그저 병든 탕아(蕩兒)로/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하였다.”로 시작되는 <병든 서울>은 다분히 자전적인 서술로 되어 있다. 오장환이 광복 당시 입원하고 있었던 병실에서 그 소식을 들었으나, 처음에는 그게 전혀 믿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룻밤을 지나 잠에서 깨어보니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가슴터지는 기쁨과 울음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나갔으나, 거리마다 “싱싱한 사람, 굳건한 청년, 씩씩한 웃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손과 손에 깃발을 들고 만세를 부르던 것도 잠시의 흥분이었고,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병든 서울’ 뿐이었다. 눈을 부릅뜬 장사치와 무슨 당, 무슨 본부가 세워져 정상배들이 날뛰기 시작한 것을 개탄하고 있다. 지난 날의 서울은 병들어 잡놈들이 떼지어 들끓었는데, 따지고 보면 자기도 그런 놈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나라없는 청춘의 반항은 눈물나게 신명났는데, 이제는 아름다운 서울로 바뀌어졌을 것이라고 조급히 병원문을 뛰쳐 나왔지만, 여전히 돼지구유같이 더러웠다. 병든 서울, 아름답고 미칠 것 같은 네 품에 춤추는 바보와 망종이 들끓어도 시인이 또 다시 본 서울은 인민(人民)의 이름으로 세워질 씩씩한 새 나라였다. “나는 또 보았다./우리들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랴 힘쓰는 이들을……/그리고 나는 웨친다./우리 모든 인민의 이름으로/우리네 인민의 공통된 행복을 위하야/우리들은 얼마나 이것을 바라는 것이냐./아, 인민의 힘으로 피는 새 나라” 여기서 ‘인민’은 그 당시 국민을 대신해서 통용된 용어이다. 이런 용어, 곧 ‘인민’이나 ‘조선’ 등과 같은 용어의 구사만으로 좌경적이니 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이때 ‘people’을 ‘인민’으로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남북이 분단되어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는 대체로 이런 용어들이 통용되고 있었던 사실은 당시의 신문이나 잡지 및 출판물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오장환이 말하는 ‘인민의 힘으로 피는 새 나라’는 좌경적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한 것이 아니다. 그 당시 오장환이 사회주의 이념에 경도되었다면 좀 뒤의 일이고, 또 있었다손 치더라도 소박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7연에서 “나는 죽기가 싫다고 몸부림치며 울겠다”고 한 오장환의 울음은 오로지 시골서 그를 돌봐주다 늙으신 홀어머니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큰물이 지나간 뒤의 맑게 개인 서울의 하늘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두에서 병든 탕아가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하다는 것과 대조적으로 대국적인 것을 이상으로 한 젊음의 꿈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서울, 사모치는, 그리고, 자랑스런 나의 서울아,/나라 없이 자라난 서른 해/나는 고향까지 없었다./그리고, 내가 길거리에서 자빠져 죽는 날,/그곳은 넓은 하눌과 푸른 솔밭이나 잔디 한 뼘도 없는/너의 가장 번화한 거리/종로의 뒷골목 썩은 냄새 나는 선술집 문턱으로 알았다.//그러나 나는 이처럼 살았다./그리고 나의 반항은 잠시 끝났다.//아 그 동안 슬픔에 울기만 하여 이냥 질척어리는 내 눈/아 그 동안 독한 술과 끝없는 비굴과 절망에 물들어진 내 씰개/내 눈깔을 뽑아버리랴, 내 씰개를 잡아떼어 길거리에 팽개치랴.”라고 한 결미단락에서 오장환 자신의 광복을 맞이하는 결의를 읽을 수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지나간 자신의 삶에 대한 비판이 예리하게 가해지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고향까지 빼앗겨 죽어서 묻힐 한 뼘의 땅도 못 가진 채로 번화한 종로 뒷골목의 썩은 냄새나는 선술집만 드나들던 일들이 후회스럽다는 것이다. 이렇듯 어렵게 살아온 자신의 방황도 이미 끝났고, 그동안 울기만 했던 질척어리는 내 눈, 독한 술과 비굴한 절망 속에 문드러진 쓸개를 뽑아 길거리에 버리고 인민, 곧 민중이 세울 새나라 건설에 참여하자는 것이다. 그때에야 내가 생각하던 병든 서울이 아닌 아름다운 서울, 사랑스런 서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고 한 오장환의 결의는 과거의 자기를 청산하고 새로운 자기를 갱생시키려는 다분히 그가 후에 전향하게 된 좌경이념과 사회주의 사상과 맞물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병든 서울’에서 살았기에 자신도 병들었다는 자기비판을 가하고 있는 점이 오히려 이 시의 강점이 되기도 한다. 그 시대 이 시집에 대한 반향과 문제성이 크게 제기된 것도 바로 이점에 있는 것이다. (……) - <오장환 연구>, 김학동, 시문학사, 1990
작가의 말
여기에 모은 것이 8월 15일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의 쓴 시의 전부이다. 처음부터 서문 같은 것은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일기처럼 날짜를 박아가며 써 나온 이 시편, 이 속에 불려진 노래가 모든 것을 해답할 것이다. 대체로 전일 내가 쓴 시들이 어드런 큰 욕심과 자기를 떠난 보람을 구한 것에 비하면 여기 이 시집 속에 있는 것은 어떻게 하면 자신에 충실하고 어떻게 하면 이 현실을 똑바를 수 있을까를 찾기 위하여 다만 시밖에는 쓸 줄 모르는 내가 울부짖고 느끼며 혹은 크게 결의를 맹세하려던 그날그날을 조목조목 일기로 적은 것이 이 시편들이다. 거듭 말할 필요도 없다. 나의 시 속에 아직도 의심하고 설워하는, 아직도 굳건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내 시를 사랑하는 이들은 두말없이 나의 온몸에 채찍을 날리라. 그러나 다만 보잘것없는 나의 성실이 어떠한 찌꺼기를 버리지 못한 것이라 하면 그대들도 나의 타고난 이 문제에 대하여 또 이 똑바로 보지 않으면 안 될 현실에 대하여 따뜻한 이해를 가지라. 옳은 일이나 옳은 말이란 아무 때이고 남에게 곯림을 받는 것임을 이 중에도 뼈아프게 돌이킨다. 언론 자유, 출판 자유, 이렇게 휘번들한 간판 밑에도 용기 없는 사람은 자유를 갖지 못한다. 이로 인하여 나는 <지도자>와 <너는 보았느냐>의 두 작품을 비굴한 신문 기자 때문에 발표치 못할 뻔하였다. 그러나 훌륭한 우리의 선배와 동무들은 이것을 세상에 물어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 어이없는 일은 <연합군 입성 환영의 노래>의 수난인데, 이것을 그 당시 방송국에서 갖다가 어느 편의 의도인지는 모르나 그들이 작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연합군’이란 문구를 ‘미국군’이라고 전부 고쳐 방송한 일이다. 내가 이 시집을 하루바삐 내어 세상에 묻고자 함은, 이 어려운 세월을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또 이렇게 살려고 한다고 외치고 싶음이겠으나,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문화전선을 좀먹는 무리들의 악의를 벗어나 진실로 속여지지 않는 내 의사를 이렇게 표시할 수 있음을 그들에게 알리기도 위함이다. (시집 <병든 서울>, 1946년 7월) - <오장환 전집>, 김재용 편, 실천문학사, 2002
관련도서
<오장환 전집>, 김학동 편, 국학자료원, 2003 <오장환 전집>, 김재용 편, 실천문학사, 2002 <오장환 전집>, 최두석 편, 창작과비평사, 1989 <다시 읽는 한국시인>, 유종호, 문학동네, 2002 <오장환 연구>, 김학동, 시문학사, 1990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출판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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