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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

작품명
난초
저자
이병기(李秉岐)
구분
1930년대
저자
이병기(李秉岐)
생애(1891~1968)
호는 가람(嘉藍, 伽藍)·가남(柯南). 1891년 3월 5일 전북 익산 출생.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그후 전남남양공립보통학교·전남제2공립보통학교·여산공립보통학교 등에서 교편생활을 하면서 고문헌 수집, 시조연구 및 창작을 시작했다. 1919년 중국 여행 후 3·1운동을 맞고, 1921년 권덕규, 임경재 등과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해 우리말 연구운동에 앞장섰다. 1926년 시조문학의 구심점이 된 ‘시조회(詩調會)’를 창립하고, 1928년 이를 ‘가요연구회(歌謠硏究會)’로 개명, 조직을 확장했다. 1931년 남부지방을 돌아다니면서 한글과 문학에 관한 강연회를 열었고, 주로 <동아일보>를 통해 문학론을 전개했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 강사로 있었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된 후, 함흥형무소에서 1년 가까이 복역하고 1943년 출감 후 낙향하여 농사와 고문헌 연구에 몰두했다. 해방직후 서울에 올라와 1946년 미군정청 편수관,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고전문학에 나타난 향토성>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뒤 단국대학교, 신문학원, 서라벌예술대학 등에서 강의했다. 6·25전쟁 중 고서(古書)를 트럭에 실어 날라 고향에 보관한 일은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동국대학교·국민대학교·숙명여자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1952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 되었고, 1962년 전북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고향에서 요양하다 1968년 사망하였다.
주요작품 및 작품세계
1920년대 초반부터 시조부흥운동에 가담하면서 전통시가 형태인 시조의 현대화 작업에 앞장섰다. 첫 시조 작품은 1925년 <조선문단>에 선보인 <한강을 지나며>이다. 1939년 초기 작품 72편을 모아 <가람시조집>을 발간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초기 시조들은 대부분 자연관조와 순수서정을 읊은 것이고, 후기 시조에는 당대의 혼란한 사회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 나타나 있다. 그의 작품은 <가람시조집>, <가람문선>에 실린 시조와 발표되지 않은 시조나 일기 등을 모두 합치면 1,000여 수가 넘는 방대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일기는 1906년부터 죽기 전날까지 씌어졌는데, 이는 한국 문학사·국어사·사회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이중 극히 일부만 <가람문선>에 소개되었다. 그는 상당수의 시조를 창작했을 뿐 아니라 시조이론의 확립에도 힘써 <시조란 무엇인고>(1926), <시조와 한시>·<시조는 부흥할 것이냐?>(1927), <시조원류론>(1929), <시조를 혁신하자>(1932) 등 20여 편의 시조론을 발표하는 등 시조부흥에 힘썼다. 이중 <시조란 무엇인고>에서는 시조의 명칭·종류·자수·운율 등 새로운 시조 창작문제를 다루었고, <시조를 혁신하자>에서는 시조는 낡은 규범을 그대로 따르는 게 아니라 창작하는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현실을 표현하고 고어투를 버릴 것, 격조에 변화를 주며 형식에도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할 것 등을 주장했다. 1939년 <문장> 창간호부터 <한중록주해(閑中錄註解)>를 발표하기도 했으며, 1940년 <역대시조선(歷代時調選)>,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을 간행하였다. 주요 저서로 백철과 함께 펴낸 <국문학전사>(1952) 외에 <표준국문학사>(1956), <국문학개론>(1981) 등이 있다. 1960년 대한민국학술원상 등을 받았다. 1939년 간행된 이병기의 <가람시조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난초·1>을 제외하고는 모두 각각 2수로 구성된 연시조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가람 시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난초라는 시적 대상을 섬세한 언어와 감각을 통해 묘사함으로써 시조의 기품과 가락을 살려내어 현대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섬세한 감각과 절제된 언어로 ‘난초’의 고결한 외모와 세속을 초월한 본성의 아름다움을 정결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연시조의 형식을 통해 묘사되고 있는 시적 내용을 보면, 난초가 개화하는 순간의 신비로움, 난초의 새로 나온 잎과 바람을 대비시켜 자연 속에서 자신의 자태를 지키면서 살고 있는 난초의 기품을 그려내며, 궁극적으로는 시적 대상인 난초와 시적화자를 내적으로 결합시켜 난초가 지닌 청아한 모습과 맑고 고결한 성품을 예찬함으로써 시인이 추구하는 고결한 삶의 자세를 암시하고 있다. - 참고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출판부, 2004 <한국현대문학작은사전>,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 2000 (……) 가람과 난초는 분리해 생각할 수 없고 가람시조를 논하는 자리가 있을 때마다 난초시는 그의 작품세계를 해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 <난초> 시는 4편 7수로 짜여진 연작시조다. 가람의 난초 시조를 논할 때, <난초> 1, 2, 3, 4, 전편을 하나의 작품으로 이해하는 경우와 각각 독립된 작품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고 <난초·4>로서 그 전편을 대표하는 경우가 있다. (……) <난초·1>은 바야흐로 벌어지는 난초꽃 두어 봉오리의 피어남을 신선하게 노래하고 있다. (……) <난초·2>는 <난초·1>에 등장하는 ‘서늘바람’, 즉 난초꽃을 피워올린 그 바람이 돌변하여 난초 잎을 휘젓는 상황에 시적 계기가 마련되어 있다. (……) <난초·3>의 시상은 첫 수 중장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대 피어나며’라는 귀절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이 작품의 배경으로 비가 나린다. 온종일 나리는 비가 시중 화자의 외로움을 돕고 있다. 그 외로움은 난꽃을 볼 수 없음에서 온 것이며, 꽃이 시든 난초가 다시 한대 피어나 고적한 마음을 위로해 준다고 진술하고 있다. (……) <난초·1>은 개화를, <난초·2>가 그 향기를, <난초·3>이 두 번째의 개화를 노래하고 있다. 시인의 생명의식과 한떨기 꽃을 피우는 난초와의 교감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속과 변화의 양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예민한 생명감각이 난초의 생리를 고결한 기품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 <난초·4>는 정한 모래 틈에 서려있는 뿌리, 그것도 햇볕에 맨살을 드러낸 뿌리를 들여다보는 순간의 발견(오도)을 노래하고 있다. 첫째 수는 난초의 모습이다. 그 잎새와 하얀 꽃 그리고 줄기에 매달린 이슬이 간명하면서도 영롱하게 그려져 있다. 그 가는 잎새의 굳은 듯 보드라움과 ‘가짓빛 대공’, ‘하얀 꽃’의 대조가 난초의 모습과 성격을 선명하게 드러내며 이슬이 구슬로 비치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것은 난초가 아닌 것으로부터도 난초에로의 조화를 이루어냄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둘째 수는 의인법을 사용하여 그 탈속하고 고적한 난초의 성품을 노래하고 있다. 최자(崔滋)의 말을 빌면, 첫째 수는 눈을 놀라게 한다는 ‘경어안(驚於眼)’이요, 둘째 수는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는 ‘경어심(驚於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식물은 흙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 그러나 난초는 모래, 그것도 깨끗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도 가까이 하지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산다. 그것이 난초의 생리며 기품이다. 그리고 그 기품의 발견은 바람불고 비오는 날들의 오랜 시간을 거쳐 비로소 깨닫게 된 시인의 인생에 대한 관조며 오도로 풀이되는 것이다. 모든 식물들이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살듯이 세상 사람들이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몸과 마음을 더럽혀가고 있을 때, 고결한 정신을 꿋꿋이 지켜가며 살아온 가람을 상기하고, 바람불고 비가 내리는 <난초>시의 개화배경을 주목할 때, 난초시의 의미는 보다 구체화될 수 있다. 첫 수의 ‘이슬’이 둘째 수 종장에 이르러 ‘우로’로 변용됨으로써 삶의 이미지를 포용하게 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난초의 생리와 기품은 곧 시인의 삶이나 기품과 일치하게 만든다. (……) - <이병기>, 김제현, 건국대출판부, 1995
작가의 말
시조(時調)의 나이 오백 년을 헤어오건만 아직도 많은 사람의 것으로서 시조가 읽혀지지 않는 데는 그 이유가 여러 가지 있을 것이다. 이의 보급이나 해석을 위해서 그동안 고시조(古時調)를 정해(精解)한 서적의 출판이 없지 않았으나 대개 그 내용하는 바를 보면 천편일률(千篇一律) 고어(古語)의 해석이나 맞춤법을 바로 잡는 데 그치고, 그 시조가 지니고 있는 정신이나 한국적 리리시즘이 풍기는 그 진한 향기를 전하는 데 충실하기보다는 마치 한시(漢詩)를 새겨나가듯이 풀이한 것이 거의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시조라면 언필칭(言必稱) 진부(陳腐)한 옛날 학자들이 한학의 여기(餘技)로 또는 취여(醉餘)의 흥(興)으로 화조월석(花朝月夕)에 음풍영월(吟風咏月)로써 한시에 토(吐)를 붙인 정도로 인생의 무상(無常)을 탁의(托意)서회한 ‘어즈버’, ‘하노라’의 체념적(諦念的) 영탄(咏嘆)을 비난하는가 하면, 그 시형(詩形)이 가지고 있는 제약(制約)의 압축된 묘미(妙味)는 알아보기도 전에 복잡다기(複雜多岐)한 현대 감정을 담기에는 너무 부자유한 그릇이기 때문에 자유분방(自由奔放)한 현대 감정을 구태여 이런 구차한 그릇에 몰아넣는 고역(苦役)을 하기에 전설(傳設)을 추존(追尊)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시조를 경원하는 또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고조(古調)가 지닌 여사(如斯)한 진부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형의 제약적 부자유를 탓하기 전에 그 형이 간소(簡素)하여 짓기에 쉽고 외우기에 쉬울 뿐 아니라 얼마던지 생활주변을 읊을 수 있어 서민성(庶民性)이 풍부한 것은 이 부자유를 통해서 얻어진 절조(節調)의 자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더구나 근래에 뜻있는 시조시인들이 고조의 경지를 뛰어넘어 삼장시형(三章詩形)의 전통을 새로히 계승하여 정형시(整形詩)로서의 드높은 비약적 발전을 꾀하고 있는 데는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느낄 따름이다. 여기 모은 작품을 고대 현대로 구분한 것은 육당(六堂)을 분수령으로 나누었을 뿐으로 오로지 독자의 흥미있는 이해를 돕기 위하여 새로운 기식(氣息)을 불어넣고 싶은 의도에서 그 시조가 지닌 향기와 정신을 감상하기에 힘썼으나, 한 시인의 심오한 세계를 편력하기란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닌 것을 새삼 느낄 따름이다. (……) (1958년 3월) - ‘서문’, 이병기, <명시조감상>, 박영사, 1958
관련도서
<한국 현대 시조작가론>, 김제현 외, 태학사, 2002 <스승 가람 이병기>, 최승범, 범우사, 2001 <한국 현대시와 동양적 생명사상>, 최승호, 다운샘, 1995 <이병기: 그 난초 같은 삶과 문학>, 김제현, 건국대출판부, 1995 <한국 근대 시조시인 연구: 시조작가론 편>, 이우재·한춘섭, 광운대출판부, 1993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출판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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