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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놀이

작품명
불놀이
저자
주요한(朱耀翰)
구분
신문학의 등장~1910년대
저자
주요한(朱耀翰)
생애(1900~1979)
호는 송아(頌兒). 1900년 10월 평양에서 출생. 1912년 숭덕소학교 6학년 때 선교목사로 도쿄에 주재하게 된 부친을 따라 도일,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및 도쿄 제일고교를 졸업했다. 그의 문단활동은 1917년 <청춘>이란 잡지에 소설을 투고하면서 시작되었으며, 1919년 김동인과 함께 <창조>를 발간하면서 본격화되었다. 1919년 5월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신문 기자로 일했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1924년 <조선문단>이 창간되자 시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24년 처녀시집 <아름다운 새벽>을 간행하였다. 1925년 귀국하여 동아일보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 등을 지낸 데 이어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하는 등 언론인으로도 활약했다. 1930년 이후 간혹 시를 쓰기도 하였으나 언론인, 정치가, 상공인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무역협회 회장(1947), 민주당의원(1958), 상공부장관(1960) 등을 지냈다.
주요작품 및 작품세계
일본에 체류하면서 시작활동을 시작한 주요한의 초기 시는 서구 및 일본 근대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산문적 표기와 인상의 감각화 기법으로 나타난 이러한 징후는 <불놀이>에 잘 반영되어 있다. 또한 밝음과 의지의 에너지가 분출하는 이상주의적 지향의 시도 선보이는데, <해의 시절>, <아침처녀> 등이 이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한편, <봄> 연작시에서 민요 및 동요조의 경향을 나타내는데, 이는 민중에 가까이 가려는 시도로 보인다. 이러한 전통 지향적인 민요시 창작은 후기 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상하이 망명시절의 작품들은 망향의 그리움과 이국적 풍물을 서정적으로 노래한 <상해이야기>, <지나 소녀>, <공원에서>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불놀이>, <아침처녀>, <빗소리>는 그 자신이 뽑은 대표작들이다. 한편 평론 <노래를 지으시려는 이에게>에서 민족정서와 사상을 표현하고, 국어의 미와 생명력을 창조할 것을 강조하여 본격적인 시론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김억과 마찬가지로 한국 초기시단의 개척자로서, 서구 모방의 시풍에서 전통 지향의 시풍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1919년 2월 <창조> 창간호의 서시로 실린 주요한의 자유시. 실연한 한 청년을 시적 자아로 하여 가신 님을 그리워하며 회한에 젖는 불안과 감상적 울분을 강렬한 어조로 표출하고 있다. 정형률을 과감히 파괴하여 산문성을 지향하고 있고, 계몽적 설교의 구각에서 벗어나 내적 정서를 분방하게 표출하여 한국시단에 큰 반향을 가져온 작품이다. 이 작품은 주요한이 일본에 체류하면서 일본에 소개된 서구상징시의 영향을 받아 창작된 것이다. <불놀이>에 보이는 애매모호한 느낌의 상징주의 시풍은 이러한 영향으로 볼 수 있는데 특히 산문적 표기, 인상의 감각화 기법은 프랑스 상징시인인 폴 포르(Paul Fort)의 영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도로 내밀한 언어의 음악성을 통해 만상의 내면세계를 조응하는 상징시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으로, 오히려 감정의 과잉 토로와 데카당적 분위기로 인해 감상적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시 장르 면에서 최초의 자유시냐 산문시냐의 논의가 있어왔는데, 최초의 자유시나 산문시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 작품의 평가에 대해서는 ‘자아의 발견과 개성의 발로’(박철희), ‘불의 상징과 리비도의 억압을 통해 당대의 이념적 갈등을 물과 불의 이미지로 형상화’(오세영), ‘낙원 회귀의 의지 표출’(최원규) 등 긍정적 평가가 있는 반면, ‘소박한 내용과 단순구조로 된 감상적 니힐리즘’(김재홍), ‘신파의 변사조 리듬’(김윤식), ‘착란된 감정의 과장과 우발적 감각’(김흥규) 등의 부정적 평가도 있다. 참고: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출판부, 2004 <한국현대문학작은사전>,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 2000 (······) 주요한의 시는 김억에 의해 그 기반이 확보되기 시작한 근대적인 자유시의 시적 형태를 정립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 같은 평가는 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시적 리듬과 그 언어적 표현의 성과에 근거한 것이다. 주요한의 대표작으로 지목되고 있는 <불놀이>와 같은 작품을 보면 이 같은 성과를 확인할 수 있다. (······)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사랑 잃은 청년’으로 표상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랑을 그리워하며 회한에 젖어 있는 서정적 자아의 불안과 감상과 울분이 함께 엉켜 강렬한 어조로 표출되고 있다. 이 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형태적인 자유분방함이다. 고정적인 율격을 과감히 파괴하면서 이 시가 지향하는 것은 자유분방한 정서와 그 정서의 표현에 어울리는 형태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일이다. 계몽이라든지 지식이라든지 하는 관념의 구각을 벗어나고 있는 이 시에서 볼 수 있는 지적 정서의 분방한 표출은 이전의 시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확인되는 형식의 개방성은 근대적인 자유시의 개념과 일치한다. 우선 외형적인 율격의 규칙성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시적 진술의 정서적 통합을 이룩하고 있다. 시행의 구분도 시적 진술의 내용에 따라 자유롭기 때문에 산문적인 특성을 지목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 시의 표현 자체를 산문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 시는 자수율에 구애되지 않고 시행의 구분에도 자유로운 대신에 시구의 반복, 유사한 시구의 대응과 접속, 영탄적인 수사법의 활용 등을 통해서 시적 의미의 전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리듬감을 포착하고 있다. (······) 시행의 구분에서 오는 율격의 패턴을 파괴함으로써 얻어낸 형식적인 개방성은 주요한이 확립하고 있는 자유시 형식의 중요한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원래 시적 운율의 기본적인 단위로서의 율격의 패턴을 하나의 호흡 속에 통제하는 것이 바로 시행의 개념이다. 시의 율격에 관심을 가질 경우에는 누구나 시행의 엄격한 구분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주요한은 <불놀이>에서 율격적인 패턴을 도외시하고 시행의 개념을 무시하고 있다. 그 결과로 <불놀이>와 같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형태의 자유시 형식을 정립하게 된 것이다. 주요한의 시는 시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주관적인 정서의 세계 속으로 끌어들이면서도 그 정조의 폭을 넓히는 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 같은 특징은 그가 이미 최남선의 초기 시작 활동에서 보여준 계몽의식의 시적 한계를 극복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감각적 표현이다. 이것은 시적 언어에 대한 인식의 철저성을 말해주는 동시에 시적 이미지의 형상이 구체화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시적 언어의 감각적 기법은 대상에 대한 선명한 인상을 구현하는 데에 기능적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 같은 감각적 인상은 이 시기의 시들이 빠져들었던 감상성의 정조에서 벗어나 시 정신의 건강성을 지닐 수 있도록 만든 요소가 되기도 한다. (······) 그의 초기 시에는 그 자신도 스스로 인정하고 있듯이 서구 및 일본의 근대시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많이 있다. 특히 시적 형태의 모색과정에서 나타난 산문적 문체의 시적 구현과 고정적인 시 형태, 그리고 인상의 감각화 기법 등은 모두 이 같은 외래적인 영향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런 징후는 <불놀이>에 잘 반영되어 나타난다. (······) 그러나 주요한은 이 같은 초기 시의 시적 지향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한다. 그는 <봄> 연작시에서부터 민요적 정서를 강하게 나타내거니와, 평론 <노래를 지으시려는 이에게>(1924)에서 이미 하나의 새로운 시적 논리가 확립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한국의 근대시가 민족정서와 사상을 표현하고, 국어의 미와 생명력을 창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서구적인 것에서부터 출발했던 자기 시의 세계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전제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민요적인 시형의 탐색 과정을 거쳐 시조 창작에 몰두하면서 근대적인 시적 형식의 추구작업에 나섰던 김억과 마찬가지로 전통지향의 시풍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 - <한국현대문학사 1>, 권영민, 민음사, 2002
작가의 말
(……) 과거 우리 사회에 노래라는 형식으로 된 문학이 있었다면 대개 세 가지가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중국을 순전히 모방한 한시요, 둘째는 형식은 다르나 내용으로는 역시 중국을 모방한 시조요, 셋째는 그래도 국민적 정조를 어지간히 나타낸 민요와 동요입니다. (……) 그런데 근래에 와서 새로운 풍물이 수입되어 문체가 한문의 전제에서 벗어나는 동시에(아직까지 그 전제를 아주 벗지는 못하였으나) 지금 우리가 토론하려는 신체시가 생겨났습니다. 그 신체시를 이하부터는 간단히 신시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 신시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이 문제는 역사적으로 관찰할 때 명백히 대답됩니다. 산문학의 시작을 말하려면 반드시 예수교의 성경을 들지 않을 수 없음 같이 신시의 기원을 말하려면 ‘찬미가’를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미가는 예수교인들이 예배하러 모일 때에 부르기 위하여 서양곡조에 맞추어서 조선말로 쓴 노래입니다. (……) 찬미가 다음으로 신시의 형식을 가진 것이 소년잡지 등에 실린 칠오조(7·5조)의 신체시와 갑오 이후에 유행한 창가라고 보겠습니다. 그 가운데는 아직도 한문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것도 있었고 또 혹 조선 옛말을 그대로 써보는 국수적 작품도 있었는 듯 합니다. 그 가운데 혹은 웅장한 군가적 색채를 가진 것도 있고 교훈적·종교적·애국적 여러 가지 색채를 가진 것이 있었으나 내용으로 보아 예술적·독창적 가치가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고 봄이 옳겠습니다. 다만 형식상으로 찬미가와 창가와 일본 신체시를 모방한 조선 신체시가 조선 고래의 한시조 민요와 판이하게 다른 것을 보아 신시의 효시라 볼 수 있습니다. (……) 1919년 봄에 동인 문예잡지 <창조>가 역시 동경에서 창간되었습니다. (……) 그 창간호에 필자가 <불놀이> 이하 네 편인가를 시험으로 발표하였습니다. 그 작품들의 내용은 불란서 및 일본 현대작가의 영향을 받아 외래적 기분이 가득하고(그렇기 때문에 조선문학상으로는 독창적이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아무 본뜰 데 없는 당시에 어린 필자의 경우로는 그 이상을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 형식도 역시 아주 형식을 깨뜨린 자유시의 형식이었습니다. 자유시라는 형식으로 말하면 당시 주로 불란서 상징파의 주장으로 고래로 내려오는 작법과 ‘라임’을 폐하고 작자의 자연스런 리듬에 맞추어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 이 초창기에 있는 우리는 기성시대의 세력을 가진 것도 없고 일반 독서 계급의 빠른 감상력을 가짐도 없고 또 기성 시가의 형식도 없이 다만 빈 손으로 무슨 새로운 문학의 창조를 꾀하는 것입니다. 일이 어렵기도 하려니와 그 동시에 흥미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신시운동의 전도의 목표는 무엇인가, 적어도 나의 생각으론 두 가지의 목표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민족적 정조와 사상을 바로 해석하고 표현하는 것, 둘째는 조선말의 미와 힘을 서로 찾아내고 지어내는 것입니다. (1924년 8월) - ‘노래를 지으시려는 이에게’, 주요한, <한국현대시요람>, 박영사, 1974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사 1>, 권영민, 민음사, 2002 <주요한 연구>, 이용호, 동광문화사, 2002 <한국 현대시 작품론: 최남선에서 김수영까지>, 김용직·박철희 공편, 문장, 1996 <한국현대시사 연구>, 조창환 외, 일지사, 1987 <한국근대시사>, 김용직, 학연사, 1986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출판부, 2004 <한국현대문학작은사전>,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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