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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풍의상

작품명
고풍의상
저자
조지훈(趙芝薰)
구분
1930년대
저자
조지훈(趙芝薰)
생애(1920~1968)
본명은 동탁(東卓). 1920년 12월 경북 영양 출생.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운 뒤, 3년간 영양보통학교를 다녔다. 서울로 올라와 1939년 혜화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해 <백지> 동인으로 참여했고, 조연현 등과 친하게 지냈다. 1941년 대학을 졸업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로 있었는데, 이때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화엄경> 등의 불교서적과 노장사상, 당시(唐詩)를 즐겨 읽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신문을 받았다. 이듬해 고향으로 내려가 지내다 8·15 해방이 되자 다시 서울로 와서 명륜전문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에서 강의했다. 1946년 전국문필가협회 중앙위원 및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고전문학부장을 역임했고, 1947년 동국대학교 강사를 거쳐 고려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6·25 전쟁 때는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장으로 중부전선에서 종군했고, 1961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시인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1963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소장이 되면서 시쓰기보다 <한국문화사대계>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데 힘썼다. 그 뒤 1965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편찬위원, 1966년 민족문화추진위원회 편집위원,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작품 및 문학세계
1939~40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장>에 시 <고풍의상(古風衣裳)>·<승무>(1939), <봉황수(鳳凰愁)>(1940)가 발표되어 문단에 나왔다. 이어 <백지>에 <계산표>, <귀곡지(鬼哭誌)>, <진단서> 등을 발표했는데, 이 시들은 회고적·민속적인 것을 소재로 민족적 정서와 전통에 대한 향수를 읊은 것이다. 그밖에 불교적 인간의식을 보여준 시로 <고사(古寺) 1>, <고사 2>, <낙화> 등이 있고, 박목월의 <나그네>에 화답하는 시 <완화삼>을 발표했다. 1946년 박두진, 박목월과 시집 <청록집>을 펴낸 뒤로는 ‘청록파’ 시인으로 불렸다. 이어 시 <색시>·<편지>(1949), <그리움>(1950) 등을 발표하고, 시집 <풀잎단장>(1952), <조지훈시선>(1956)을 펴냈다. 여기에 실린 시편들은 <청록집>에서 보인 전통지향적 시세계를 심화시켰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1959년 시집 <역사 앞에서>에서는 종래의 시세계와 달리 현실에 대응하는 시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광복과 전쟁으로 이어진 현실에 대한 시적 감회는 <역사 앞에서>, <다부원(多富院)에서>, <패강무정(浿江無情)>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그밖에 시집 <여운>(1964)과 수필집으로 <창에 기대어>(1958), <시와 인생>(1959), <지조론>(1963), <돌의 미학>(1964) 등이 있으며, 평론집으로 <시의 원리>(1953), <한국문화사서설>(1964) 등을 저술하였다. 1939년 4월 <문장(文章)>에 발표된 조지훈의 작품. 조지훈·박목월·박두진이 함께 펴낸 시집 <청록집>에도 수록된 작품으로서, 일제 치하의 한국문화와 전통적 가치를 시화한 조지훈의 초기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한국의 전통적 건축물이 지닌 선의 아름다움을 부연의 곡선으로 대표하면서 그 처마 밑으로 구슬로 만든 발을 내린 운치 있는 달밤의 광경과 한복을 입은 미인의 요조하고 품위있는 동작을 묘사하고 있다. 작품의 율격 또한, 6박률과 3·4박률이 자유롭게 넘나들며 유려한 형태를 이룬 점이 높게 평가된다. 고전적인 한국문화를 세련된 감각어로 써낸 데에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맞서 문화주체성과 역사주체성을 드러내려는 시인의 시적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 참고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출판부, 2004 <한국현대문학작은사전>,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2000(······) 그는 한국예술의 원형을 ‘힘의 예술’, ‘꿈의 예술’, ‘슬픔의 예술’, ‘멋의 예술’ 등 네 가지로 분류하면서 특히 ‘슬픔의 예술’과 ‘멋의 예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슬픔의 예술’이 정토사상(淨土思想)과 선사상(禪思想)에 연결되고, (······) ‘멋의 예술’은 먼저 소박미와 율동미를 그 바탕으로 마련되었던 것이다. (······) ‘멋의 예술’은 슬픔 속에 신념의 힘을 갖춘 것이 그 특징이다. (······) ‘멋의 예술’은 ‘슬픔의 예술’의 고고성(孤高性)보다는 오히려 평민성(平民性)에 통하는 것으로 속(俗)과 아(雅)의 경계선 위에 넘나드는 자연적 율동인 것이다. (······) ‘슬픔의 예술’이 자조(自嘲)·절망(絶望)·원한(怨恨)에 사무쳐 퇴폐 또는 기원(祈願)에 살았음에 반하여 ‘멋의 예술’은 은둔(隱遁), 반발(反撥), 기대(期待)에 잇기어 강개(慷慨)와 신념(信念)에 일관됨을 또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그의 예술론은 그의 시세계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기초적 이론이 된다. 예컨대 시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향문(香紋)>, <봉황수(鳳凰愁)>, <무고(舞鼓)>, <고조(古調)>, <가야금>은 소박미와 율동미를 바탕으로 마련된 ‘멋의 예술’에 속하는 작품으로 슬픔 속에서 신념의 힘을 끌어내는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조지훈이 탐미와 주지에의 탐색에서 탈피하여 민족문화와 민속, 그리고 민족정서에 경도된 원인을 그의 정신사에서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지훈은 철저한 유교적 전통과 정신을 계승하고 성장했기 때문이다. (······) 우리가 전통적인 선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지훈의 시 <고풍의상>, <봉황수> 들을 읽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그의 초기 시에서 발견되는 시형 곧 산문시의 형식이다. 이러한 시형은 위의 시들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둘째는 제재에 대한 개인적인 태도인데, 위의 시들은 그렇지 못하다. 이 시들은 객관적 인식태도가 다만 주관적 정서에 의존하여 형상화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시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이 시들은 묘사적 언어에 의해 형상화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시작품들은 동일한 구성원칙과 통일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것은 시형에 있어서 산문성, 언어에 있어서 묘사성, 제재에 대한 인식태도에 있어서 객관성이다. 다만 간과해서는 안될 점은 지훈은 전통적인 선(線)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고풍의상>, <봉황수>에서 대상에 대한 주관적 정서를 표현할 뿐 역설과 은유가 주는 모호성과 미묘함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고풍의상>은 하나의 구성원칙을 가지고 통일성을 획득한 작품이다. (······) 그러면 이 시에서 시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들이 진술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전통적인 선의 아름다움이다. 그는 민족전통예술의 특성이 수려한 선의 미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선의 미를 ‘멋의 예술’로 해석하면서, 여기에 도자기, 의복, 건축물의 선을 포함시킨다. 이러한 뜻에서 <고풍의상>에서의 의복의 선과 건축물의 선, <봉황수>에서의 건축물의 선, <향문>에서의 도자기의 선은 ‘멋의 예술’에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멋의 예술’에 포함되는 선의 미를 시적인 심연으로 이끄는 언어가 “풍경이 운다”라는 표현인데, ‘멋의 예술’이 슬픔 속에서 신념의 힘을 이끌어내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보면 “풍경이 운다”는 단순히 풍경소리를 의미하는 청각적 언어라기보다는 상징적 언어로서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지훈은 사라져가는 민족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처럼 자신의 시를 상징으로 시작하고 있다. “풍경이 운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두견이 소리’와 ‘거문고’로 이어지면서 하나의 의미 구조를 형성한다. 이런 관점에서 서술어 ‘울다’는 슬픔과 그리움을 상징하는 동시에 ‘사랑과 기쁨’을 상징하는 역설적 의미를 내포한다. 여기서 우리는 화자가 어떤 비장한 슬픔과 멋을 ‘울다’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자가 건물의 선과 전통의상을 입은 여인의 미와 밤의 고요함을 바라보는 동안 ‘풍경’이 울고 ‘두견’이 운다. 그리고 화자 자신은 ‘거문고줄’을 고른다. (······) 여기서 화자인 ‘나’는 과거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실체가 되어 자신이 끝없이 추구한 민족문화와 민족정서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표현한다. “옛날에 살아”는 바로 화자가 과거적 존재로 돌아가고 싶은 심경을 표출한 것이다. 이러한 심경은 민족적인 것에 대한 애착과 슬픔에 근원한다. 화자는 민족문화와 민족정서가 이민족의 침략으로 상실되어가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심경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이러한 심경을 잘 나타내는 것이 “이 밤”과 “옛날에 살아”라는 표현이다.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이 같은 시간성 속에서 화자는 거문고줄을 고르며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여기서 화자가 ‘눈 감고 흰 손을 흔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분명 상실되어가는 민족적인 것에 대한 아픔과 비애일 것이다. 그러므로 <고풍의상>은 지훈의 전통문화에 대한 애수와 민족정서에 대한 애착이 시각심상과 청각심상을 통해 형상화된 시로서 ‘슬픔의 멋’의 미학을 보여주는 하나의 구조물이다. (······) - <조지훈 시와 자아, 자연의 심연>, 서익환, 국학자료원, 1998
작가의 말
영혼의 기갈(飢渴)이란 것이 있다면 시(詩)는 바로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작위(作爲)의 소산(所産)이다. 시인에게는 정신의 파괴된 균형을 복구하는 방도가 시를 쓴다는 그 어쩔 수 없는 ‘제작의 진실’ 이외에는 달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에게는 시를 제작한다는 사실이 전부요, 제작된 시란 이미 다시 그 시인을 충족시켜줄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시 쓰는 고통 그 자체가 시의 최대 열락(悅樂)이라는 말이다. 그대로 남겨 두기에는 너무 초라하여 차라리 분뇨(糞尿)와 같이 꺼림칙하고 아주 버리기에는 좀 서운하여 못난 자식에 대한 애착(愛着)과도 같은 환멸(幻滅)-이것이 바로 시인으로 하여금 제가 쓴 시를 제 손으로 다시 만지지 못하게 하는 까닭이 되는 것이다. 시에 대한 이러한 견해 때문에 나는 나 개인의 단독시집(單獨詩集) 내는 것을 회피하여왔다. 아니 회피했다기보다는 시집에 대해서 그다지 성의를 가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번에 시우(詩友)들의 권고(勸告)로 졸(拙)한 시들을 자선(自選)하면서 느낀 것은 쓰는 대로 시집을 내어버리지 않은 것이 나를 난경(難境)에 빠뜨렸다는 생각이었다. 20년 세월을 시를 써 오는 동안에 나의 작품세계는 그 변이(變移)가 매우 심해서 도저히 한 권의 시집 속에는 같이 앉힐 수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쓰는 대로 시집을 내어서 자기 정리를 감행했던들 이런 부질없는 고충은 사지 않았을 것이기에 말이다. 이미 써 놓은 시는 좋든 나쁘든 제 것이 아닌 것을 내가 괜히 시를 너무 두려워한 것이 아니던가. (······) 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연대순으로 놓여져 있지를 않다. 같은 계열의 작품을 한데 모아 5부에 나누고 그 다섯 부류가 이 시집 안에서 자연히 변이(變移)되는 하나의 모습을 만들기 위하여 그 차서(次序)를 새로 배정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내 시를 읽어주는 이에게 참고가 될까 하여 ‘작품연표’를 따로이 붙였거니와 나의 시의 순차적(順次的) 변천에 대하여서도 조금 언급해두는 것이 나의 예의일 것 같다. 내가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할 때, 이를테면 습작시대(習作時代)의 바탕을 이루었던 작품세계와 그에 혈맥(血脈)이 닿는 작품들을 제1부로 모았다. ‘지옥기(地獄記)’의 시편(詩篇)이 그것이다. 동인지 <백지(白紙)>에 참가했던 무렵을 전후해서부터 지금까지 간헐적으로나마 지속되어 온 작품세계이니 나의 암울과 회의, 화사(華奢)를 쓰면서부터 일변하였다. 이 시기는 <문장>지의 추천을 받을 무렵이니 내 자신의 시를 정립하기 위한 발판은 이 때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제5부 ‘고풍의상(古風衣裳)’의 시편들이 그것이다.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의 애수, 민족정서에 대한 애착이 나를 이 세계로 끌어넣었던 줄로 안다. 그 다음이 곧 내가 오대산 월정사로 들어간 시기이다. 주로 소품의 서경시(敍景詩), 선미(禪味)와 관조(觀照)에 뜻을 두어 슬프지 않은 몇 편을 이 때에 얻었으니 제3부 ‘달밤’에 수록한 것이 그것이다. 그 다음이 절간에서 돌아와 ‘조선어 학회’에 있을 무렵의 시 또는 경주 순례를 비롯하여 낙향 중의 방랑시편을 수록한 것이니 제4부의 ‘산우집(山雨集)’이 그것이다. 한만(閑漫)한 동양적 정서, 이것은 그 시절의 나의 향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 해방을 맞는 동안에 쓰기 시작한 작품세계를 제2부 ‘풀잎 단장’에 거두었다. 해방 후 사회적 혼란이 다소 가라앉은 후 다시 쓴 시편들 중에 이 계열에 속하는 것이 가장 많은 편이다. 자연과 인생, 사랑과 미움에 대한 고요한 서정이 그 중심이 되어 있었다. 대개 이와 같은 순서로 나의 작품세계는 옮겨왔지만 작품연표에 보이는 바와 같이 전체적으로는 이러한 여러 계열이 뒤섞여서 씌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그러한 여러 작품계열의 바탕은 이미 해방 전에 마련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이러고 보면 나의 시는 별로 변한 것이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 ‘<조지훈 시선> 후기’, 조지훈, <조지훈 전집: 시>, 나남출판, 1996
관련도서
<조지훈 전집>, 조지훈, 일지사, 1973 <조지훈문학연구>, 강양희, 충남대출판부, 2003 <조지훈>, 최승호 편, 새미, 2003 <조지훈 시와 자아, 자연의 심연>, 서익환, 국학자료원, 1998 <조지훈: 전인적 삶의 시화>, 윤석성, 건국대출판부, 1997 <조지훈 연구>, 신동욱, 고려대출판부, 1979 <조지훈 연구>, 김종길, 고려대출판부, 1978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출판부, 2004 <한국현대문학작은사전>,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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