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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색 고향

작품명
하늘색 고향
제작
김소영
감독
김소영
장르구분
다큐멘터리
출연
신순남, 김리사, 우희순, 김올가, 박내봉, 김소야, 신성남, 라 블라디미르, 김이반, 이 알렉세이, 황송만, 장영신
스태프
제작,감독,각본,편집/김소영 촬영/니꼴라이 게라시모브,정정훈 조명/최석재 동시녹음/하미드,한철희
내용
21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무심한 아버지, 그후 어머니의 재가로 홀로 남겨진 그에게 있어 부모란 ‘할머니’ 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늘진 유년시절이 흘러가던 1937년 가을 어느 날, 그는 선생님으로부터 “이제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어이없는 소식을 듣는다. 곧 시작된 ‘강제이주’. 이주명령이 떨어지자 마을의 수많은 남자들은 어디론가 끌려가고... 어린아이들과 노약자, 그리고 부녀자들이 화물열차에 몸을 싣는다. 목적지도 모르는 그들에게 기차 안에서의 체포는 또 이어지고, 기본적인 생존여건 조차 갖춰지지 않은 기차의 열악한 여건에 많은 노약자들은 숨져간다. 도착지라곤 갈대만이 왕성한 황무지 벌판. 그 곳에선 ‘풍토병’이 또다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통곡할 시간도 없이 그들은 피붙이들의 시신을 내가야 했으며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을 치러야 했다. 1953년까지 그들은 우리말 사용은 물론 우리 고유의 풍습도 금지 당했으며,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어 도시에 있는 학교조차 다닐 수 없었다. 또한 대부분의 고려인들은 도시를 벗어난 시골부근의 ‘꼴호즈’ 라는 협동농장에 밀집해 살아야 했고, 수도인 ‘타쉬켄트’시(우즈베키스탄의 경우)의 주민으로 등록되지도 못했다. 이러한 비극은 자연히 우리말과 문화의 소멸로 서서히 진행되어 부모와 자식간에도 러시아어로 의사소통을 해야하는 현재의 그들로 이어진다. 이러한 서러운 운명을 떠 안은 그들을 신순남은 그의 그림 속에서 ‘살아있는 시체’라 명한다. 물론 예술가의 창작에 있어서도 ‘민족성’에 대한 주제는 금기시 되었고, 당시 정치권력 하에선 신순남의 작품은 당연 인정받을 수 없었으며 이것은 그의 나이 60이 넘어서야 그의 첫 개인전을 가진 이유와 연결된다. 이러한 배경 속에게 시작된 그의 <레퀴엠>은 단순 하나의 작품을 너머 후대를 위한 기록이자 모든 고려인들과 그의 한 맺힌 ‘소리없는 절규’인 것이다.
김소영
1992년 한국 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하고 무작정 충무로를 찾아가 영화 평론과 실무를 배웠다. 이른바 연출부의 ‘서드(Third)’를 하며 기록도 하고 허드렛일도 했다. 그러다 어느 일간지에 난 신순남 화백에 대한 특집기사를 보고 6백만원 짜리 통장 하나로 3년 8개월 동안 우즈베키스탄과 한국에서 신순남 화백이 <레퀴엠>을 통해 ‘고려인’들의 강제 이주사에 대한 증언을 감동의 영상으로 담아냈다.
작품정보
한 도시 이야기 (1992) 하늘색 고향 (2000)
작품해설
1937년 스탈린 시대에 17∼20여 만 명에 달하는 러시아 국경지대(블라디보스톡, 연해주 등 )의 한인들이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로 갑자기 강제 이주 된 사건이 이 영화의 배경으로, 영문도 모른 채 강제 이주 열차에 몸을 실어야만 했던 당시 고려인들의 비운은 당시 9살의 어린 나이였던 한 소년의 삶을 비껴가지 않는다. 이런 역사의 아픔을 그림으로 토해낸 그의 이름 니꼴라이 세르게이예비치, 한국이름 신순남 ! 소연방의 전체 인구 중 1%(현재 43만 여 명)도 되지 않는 소수민족으로서, 또 평생을 바쳐 이 사건을 그림으로 기록해 조국에 무상기증한 고집스런 예술가로서의 그를 통해, 당시 한인 강제이주사에 얽힌 그들의 수난과 극복의 드라마를 담아낸다. 현재 신순남의 작품 <레퀴엠>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 작품으로 그는 1997년 대한민국 금관문화예술훈장을 수상했다.
평론
마치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는 듯한 <레퀴엠>의 화폭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재소 한인들의 거대한 공동묘지이다.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는 할머니. 어느 곳에서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어머니. 검은색과 회색, 황토색과 백색으로 이루어진 <레퀴엠>은 절절하게 그 날의 비극을 증언한다. 그리고 그것이 주는 현실감은 바로 그 <레퀴엠>의 모델이 된 화폭의 사람들이 바로 눈앞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증언하는 기이함 때문에 더욱 배가되고 있다. - < KAFAI > (한국영화인회의 기관지), 심영섭, 2000년 11월호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의 진정한 가치는 한 인정받은 화가의 성공담이나 해탈의 과정을 보여준 것에 있지 않다. 대부분의 해외 동포 다큐멘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여기에서도 증인들의 마지막 증언은 죽기 전에 고향 땅을 밟고 고향의 쪽빛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신화백과 특별히 친분이 있어 보이지 않는 우즈베키스탄의 동포들... 그들의 절절한 사연들이 신화백의 성공담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신화백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면서도 너무나도 강렬하고 충격적인 증언으로 시작한 이 다큐멘터리의 위험한 전략은 마지막 4분에 승부수를 던진다. 영화의 마지막, <하늘색 고향>의 ‘존재의 이유’는 무엇일까 자문해본다. 카메라는 <레퀴엠>을 화폭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고, 그 곳에는 얼굴 없는 사람들의 삶이 있다. 그 빈 얼굴들 속에 증인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신화백이 차마 그려 넣을 수 없었던 얼굴들. 그들에게 얼굴을 준 것이야말로 <하늘색 고향>의 ‘존재의 이유’일 것이다. - < KAFAI >(한국영화인회의 기관지), 조영정, 2000년 11월호 우리는 니콜라이 신의 그림, 30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닮긴 <레퀴엠>을 만나지 못했다. 조금씩 조금씩 보여질 뿐, 그 전체 모습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껴둔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는 그 순간 드디어 그의 그림과 만난다. 한 벽면 전체를 메꾸고 있는 그 긴 그림의 이쪽 끝에서 저 끝까지 카메라는 천천히 이동해나간다. 10여분에 이르는 롱테이크로. 그곳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진실과, 의지와, 뼈아픈 쓰라림과 눈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 있는 모든 자들의 역사이다. “이것이야말로 <레퀴엠>의 내용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당신 자신의 이야기. 신화백이 그렇게 오랫동안 그 그림을 그렸던 이유도, 그리고 내가 그를 처음부터 등장시키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화백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그들을 알아야 했다. 살아있는 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림 속의 죽어간 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그것을 그린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레퀴엠>이다.” - < KINO >, 이영재, 2000년 10월호
수상내역
2000년 서울국제다큐멘터리 영상제 대상 2000년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부문 운파상 2001년 제13회 암스테르담 국제다큐영화제 경쟁부문 초청 2001년 야마가타다큐멘터리필름페스티벌 Special Mention상 2002년 제3회 대만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아시아영화진흥기구(NETPAC)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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