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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작품명
명동성당
건축가
G. 코스트
장르구분
1930년 이전
내용
명동성당은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주어온 터전이 되는 곳이다. 원래 터는 민간인의 집자리였는데 그 집을 헐고 언덕을 깎아내 성당의 대지를 이루었다. 13,241㎡의 대지구입이 이루어진 것은 1883년이다. 프랑스 신부 코스트가 설계자로서 또한 공사책임자로 공헌했다. 그는 약현성당, 용산신학교 등도 설계하였는데 명동성당이 대표적이다. 중앙에 종탑을 갖는 벽돌조 성당은 뮈텔주교에 의해 고종 29년(1892년) 8월 5일 정초되었다. 청일전쟁과 코스트 신부의 별세(1896년) 등으로 중단되었다가 프와넬 신부에 의해 1898년 5월 29일 축성되었다. 고딕양식으로 벽돌 종탑은 높이가 46.7m까지 솟아 올라 있다. 쓰여진 벽돌은 ‘용산 한강통 연와소에서’ 김요왕에 의해 제조된 것들이다. 성당은 그동안 4-5회에 걸쳐 보수공사를 했으나 여전히 성당건축의 전형이 되고 있다. 사적 258호
건축가
코스트 신부 Eugene Jean Georges Coste* 개인정보한국명 고의선(高宜善, 1842-1896). 1842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코스트는 1966년 한국에서는 병인사옥이 일어날 때 외방 전도 신학교에 입학해 사제로 서품이 되면서 극동으로 향하였다. 1874년 중국, 만주, 일본 등지에서 일하다가 우리나라에 온 코스트는 조선교구 당가부를 담당하였다. 당가부는 건축 일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코스트 신부가 서울에서 첫 건축일로 지은 주교관은 1890년에 준공됨으로써 명동에서도 제일 오래된 이양 건축물이 되었다. 현재 명동성당 진입로 우측에 있는 사도회관이 그것이다. 그 후 코스트는 본격적인 성당 건축일에 나서 1888년부터 성당, 주교관, 신학교, 사제관, 수녀원, 고아원 등이 그에 의해 신축되기 시작하였는데 모두 프랑스 고딕 양식이며 붉은 벽돌과 화강석이 사용되었다. 후에 서울 중심부에 성당터를 매입하여 성당축성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재료와 기술의 부족으로 코스트 신부가 직접 벽돌 모형을 만들고, 감독하였다. 전문기술의 부재와 자금난에도 불구하고 명동성당은 코스트 신부가 죽은 지 2년 후에 프아넬 신부에 의해 준공되었고 지금까지 성당건축의 전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코스트 신부는 1896년 우리가 암흑기 속에 멈춰 있을 때 우리에게 프랑스식 건축의 한 면모를 보여주었고, 이 땅에서 그 삶을 마쳤다.
리뷰
고딕 양식은 19세기 조선에까지 전파되어 <명동성당>으로 표현되었다. <명동성당>은 프랑스인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1898년에 완성되어 이후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을 서술하는 대명사가 되어 왔다. <명동성당>은 격동기의 제한된 생산력에 의하여 훨씬 적은 재료로, 또 훨씬 작은 규모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적어도 고딕 성당의 공간 비례는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건물이다. (서현,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연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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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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