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금산사 대적광전(金山寺 大寂光殿)

작품명
금산사 대적광전(金山寺 大寂光殿)
소재지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지정종목
보물 제476호 (1984년 화재로 지정취소)
장르구분
불교건축
개요
금산사는 모악산(母嶽山) 기슭에 있는 산지가람(山地伽藍)이다. 사적기에 의하면 600년(백제 법왕 1)에 왕의 복을 비는 사찰로서 창건되었다고 전하나 작은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734년(신라 성덕왕 33)에 진표(眞表) 율사가 이곳에서 순제(順濟) 법사에게 출가하여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부사의방장(不思義方丈)에 들어가 미륵(彌勒)과 지장보살(地藏菩薩)으로부터 계법을 전수받고 다시 돌아와 762년(경덕왕 21)부터 766년(혜공왕 2)에 걸쳐 금산사를 중창하였는데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을 조성하여 주존으로 모셨다고 한다. 이후 금산사는 법상종(法相宗)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그 후 후백제 견훤(甄萱)의 지원으로 사찰을 일신 중창하였고 고려시대에는 1079년(고려 문종 33)에 혜덕(慧德) 왕사가 주석하며 사찰을 중창하였다. 혜덕의 뒤를 이어 도생(導生) 승통과 원명(圓明)대사가 불사를 계속하여 이때 이루어진 대가람이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졌다. 1598년(선조 31)의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모든 전각과 산내 암자까지 회진되었는데 전후 1601년(선조 34) 수문(守文) 대사가 중창을 시작하여 1635년(인조 13)에 낙성을 보았다. 미륵전과 대적광전(大寂光殿), 만세루(萬歲樓), 대장전(大藏殿) 등 현존하는 건물들이 이때 중건되었으나 중창의 범위가 대사구(大寺區)에 한정되어 광교원과 봉천원은 복구되지 못하였으며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와 개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적광전은 1986년에 화재로 불탄 것을 1994년에 복원한 금산사의 중심 사원이다.
건축물의 구조와 특징
대적광전은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대광전(大光殿)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곳의 주불(主佛)인 비로자나부처님이 두루 비치는 빛, 즉 광명이나 적광의 성질을 갖고 있어 이렇게 이름지어진 것이다. 또한 화엄종 사찰의 주불전일 경우 이 이름을 붙이지만, 주불전이 아닐 경우에는 비로전(毘盧殿)이라 한다. 금산사의 대적광전은 미륵전의 서쪽에 위치하며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다포식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누각 아래를 통과해 들어간 진입 축에서 마주 보이며 7칸이나 되는 긴 건물이라서 장중하고도 깊숙하다.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귀솟음기둥을 올렸는데, 처마 끝이 하늘로 향하고 있으며 넓은 대지에 착 가라앉은 듯한 차분함이 있다. 불당 면적이 90여 평이나 되는 건물내부 또한 툭 트여있어 더욱 넓어 보이는데, 둥근 대들보가 연속 배치되었고 청초한 단청의 공포가 현란하다. 기다란 불단위에는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5구의 목조 불상과 6구의 보살상이 봉안되어있고 불상의 머리위에는 각각 닫집이 있다. 이 곳에 모셔진 불상들을 보면 아미타-석가-비로자나-노사나-약사여래의 5부처와 이들 사이에 모셔진 대세지-관음-문수-보현-일관-월광보살의 6보살로 이루어져 있으며, 화엄 도량이 갖추고 있는 대웅보전과 대적명전, 극락전, 약사전 등의 여래 전각들이 한군데 합쳐진 것과 같다. 그래서 불교학자들은 금산사가 대승 불교의 신앙체계를 모두 갖춘 종합사찰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해석한다. 불타기 전 대적광전 후불벽 뒷면에 그려졌던 관음보살상은 조선 중기에 제작된 불화로 우수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1994년 불보살상과 닫집을 새로 봉안하면서 이전에 있던 목조 나한상은 복원되지 않았다. 금산사 대적광전은 현존 불전건축 중 가장 평활한 건물로 꼽힌다.
도면 및 이미지
연계정보
관련도서 <전국 건축문화자산 전북편>, 건축가협회, 1999 <한국의 건축>, 김봉렬, 공간사, 1994 관련사이트
관련사이트
문화재청
관련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련멀티미디어(전체4건)
이미지 4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