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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호(趙守鎬)

예술가명
조수호(趙守鎬)
구분
서예가
생애
경북 출생. 서울미대 서양화과를 수학하였으나 대학 3학년에 재학 하던 중 손재형 교수의 지도를 받아 1949년 제1회 국전 서예부에서 특선을 함으로써 추사와 소전을 잇는 걸출한 서예가로 활동을시작한다. 고대 문자와 명필가를 지속적으로 연구하여 논문을 썼으며 후기에는 시·서·화 일치의 높은 문인화격을 일구어낸다. 중등교육 교과서 편찬에 큰 지침이 되었으며 서울교대 교수로 후진을 양성하였다.
약력
1947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수학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國展)에서 <어부사(漁父詞)> 특선 1957년~1960년 대한민국미술대전(國展)에서 특선 1960년 제1회 서예개인전 / 경북문화상 수상 1962년 서울시 교육회 중등미술교육연구회 회장 / 한국교육서예가협회 회장 / 국전 심사위원 이후 초대작가, 심사위원장, 운영위원장 역임 1963년 신인예술상 심사위원 역임 / 문교부 미술과 교육과정 심의위원 1965년 문교부 검인정 서예교과서 편찬 1968년 서울교육대학 전임강사 1969년 제2회 개인전 1972년 제3회 개인전, 서울신문회관 1974년 국전 초대작가상 수상(서예부 제1호) 1975년 <근대 중국회화> 출판 / 국전 초대작가상 수상 / 세계일주 기념전 1976년 제1회 아세아 현대서화명가연합전 대회장, 서울문예진흥원 미술회관 1979년 논문 <예술 창조에 대한 소고> 발표 / 저서 <고법첩 조전비편 해설> 1980년~1983년 KBS TV 서예·사군자 생방송 강의 1981년 <동강 조수호 서화집>(동아출판사) 발간/ 논문 <문인화에 대한 소고> 발표 1985년 교육공로상 수상 1986년~1992년 국제서화협회 이사장 1990년 서울교육대학교 미술과 교수 정년퇴임 / 국민훈장모란장 수상 1992년 한국국제서법연맹 회장(現) 1994년 일본 서인회 서예 대상 수상 1999년 세계서예 전북비엔날레 출품(전라북도 주최, 전북예술회관) 2000년 새천년 대한민국서예·문인화대전 운영위원장
예술활동
1962년 상경하여 1968년 서울교육대학에 교수로 취임한 다음부터는 서예와 문인화 영역으로 국한된 교수와 작가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그가 국정 서예교과서를 집필한 때도 이 시기에 해당된다. 1964년부터 고등학교, 중학교 <서예>를 펴내기 시작하여 5년마다 개정판을 거듭해 1995년까지 30년간 이 나라 서예교육에 이바지하였다. 1977년 동강은 <죽해심허> 대련작품으로 영예의 첫 초대작가상을 수상하였다. 1949년 제1회 때의 특선으로부터 국전에 입문한 지 25년만의 쾌거였다. 작품은 단아한 해서 골격에 행기(行氣)를 섞어 운필의 변화를 준 역작으로, 마치 청대의 명필 유석암을 방불케 하는 육혈고미(肉血高美)의 유덕한 기운을 자아내고 있다. 1974년 이후 안진경과 손과정을 다시 공부한 뒤 1980년대로 넘어서면서 절정을 향해 무르익어 감을 감지할 수 있으며 시·서·화 일치의 높은 수준의 화격을 추구하기에 이른다. 1990년대 그의 문인화는 취의사형(取意捨形)의 사의성이 한층 농후한 일탈의 기상을 담고 있다.
대표작품
<추국>(1989)
평론
(……) 유년기인 5, 6세 때 입춘서를 쓸 정도였다는 것은 앞서 언급했거니와 이 당시 가학으로 구성궁예천명을 배운 것으로 시작하여 대구사범학교 재학 때 우당 김용하(愚堂 金容河)의 훈도로 서예가의 자질을 키워 나갔다. 이때 왕희지의 <집자성교서>, <난정서>, <십칠첩>과 구양순의 <예천명>, 우세남의 <공자묘당비>를 비롯하여 <조전비>, <예기비>, <장천비> 등 한비(漢碑)에까지 접하였으며, 이후 서울 미대 시절에는 소전에게 서예가의 풍모와 자세, 폭넓은 안목과 걸출한 감각 등에 대하여 큰 영향을 받은 것이 매우 중요한 기조가 되었다. 다만 소전의 애제자이면서도 국전 출품작품은 내 글씨를 쓴다는 정신으로 고전을 천착하며 독자의 길을 추구하는 남다름이 있었다. 이때 심취한 글씨는 갑골(甲骨)과 석고문(石鼓文)이었는데, 석고문은 일생에 가장 애호하는 것이 되었다. 졸업 이후에는 조상(造像)·마애(摩崖)·묘지(墓誌)·목간(木簡) 등을 비롯, 석문명(石門銘)·장맹룡(張猛龍) 등 북위(北魏)의 글씨를 연구하였고 나아가 당·송·원·명·청 제명가(諸名家)의 법첩을 섭렵하면서 다시 진·한의 체세(體勢)와 위·진의 풍운(風韻)을 누수(累修)하여 마침내 동강의 특장이라 할 수 있는 행초에 침잠하였다. 왕희지를 존경해마지 않으며 손과정의 서보(書譜)와 석도(石濤)의 <화론(畵論)>을 유독 선호하면서 지금도 변신을 위하여 ‘무엇을 쓸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쓸 것인가’를 화두로 삼아 가치추구의 진실을 체험하기 위하여 고뇌한다. 동강의 학서관(學書觀)은 초월절진(超越絶塵)의 기품과 일탈(逸脫)의 기상에 두고 있으며, 학문적으로 접근하면서도 ‘자연위사(自然爲師)’·’조화위사(造化爲師)’를 종법으로 삼고 있고, 늘 서론을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하는 예리한 분석력과 높은 안목을 추구한다. 또한 서예관은 군자의 풍도가 있는 유덕한 글씨, 독자적인 자기만의 글씨를 쓴다는 것과 차원 높은 지적 세계에서 도출되는 다채로운 가치관을 견지하며 대자연의 생명력을 구가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학서의 자세는 서법의 원류는 간파하되 고금명가의 중법(衆法)·법박(法縛)을 지양하는 정신을 가지고 넓은 가슴과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그의 서법 연원과 학서관, 서예관, 학서 자세 등이 어우러져 예술조예가 신장되면서 행초에 있어 독특함과 기품을 겸비한 승고신화(承古新花)의 동강체를 이루니 이는 조박(糟粕)을 물리치고 진수를 체회(體會)하려는 고행의 결과인 것이며, 그 이면에 면면히 이어져온 시·서·화에 대한 박섭(博涉)·박람(博覽), 국제적 거장과의 교류, 인간과 예술에 대한 역사의식의 정립, 반골의 냉엄한 자아실현, 과묵 솔진한 성격 등의 뭉뚱그러짐 그 자체인 것이다. 대만의 국립역사박물관 관장인 하호천(何浩天)은 <동강 조수호 서화집> 서문에서 “대한민국 조수호 선생은 그 의경(意境)을 엿보고 그 신운을 승습(承襲)하면서 자가(自家)의 풍격을 창작하였던 바, 그 행초와 해서는 기세가 방박(磅儁)하고 심후주경(深厚壬勁)하며, 전서는 균칭정발(均稱挺拔)하고 난죽의 조예는 다시 탈속됨을 볼 수 있으니 깊고 두터운 학문과 소양이 있지 아니하고서야 어찌 능히 여기에 이르렀겠는가!”라 하였고, 또 요몽곡은 대만 국가화랑서화전에 부쳐 쓴 ‘동강거사 서여기인(書如其人)’이란 글에서 “그 사람됨을 보면 문질빈빈(文質彬彬)하고, 그 글씨를 보면 고아(古雅)하며 생운(生韻)하다. 결구의 호응과 선획의 유미(流美), 그리고 용묵의 윤택은 이미 송명(宋明)의 서림(書林)에 직탐(直探)하였다”라고 술회한 것 등에서 동강의 세계를 가히 엿볼 수 있다. 동강은 붓 잡은 지 70년이 지난 이제서야 글씨가 무엇인지 좀 알 것 같은 안목이 생긴 것 같다고 술회한 바 있다. 진정한 승고신화는 이제부터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나 할까! - ‘이 시대의 一大雅士 東江’, 선주선(원광대교수)
관련도서
<서예>, 조수호, 문호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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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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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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