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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길기(裵吉基)

예술가명
배길기(裵吉基)
구분
서예가
생애
1941년 일본 니혼[日本]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57년 예술원 회원, 1965년 서예가협회 초대 회장이 되었으며 1958∼1983년 동국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를 비롯, 한글·전각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연구하였고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독보적인 경지를 이룩하였다. 예술원상·국민훈장 석류장·보관문화훈장 등을 받았으며 대표작품에 <의암 손병희 선생 유허비(향리)>, <외솔 최현배 선생 묘비> 등이 있고 저서로 <서예의 예술성>, <한국서예사> 등이 있다. 1964년 한국서예가협회를 조직, 초대회장을 맡으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1970년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비롯, 국민훈장 석류장1941년 일본 니혼[日本]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57년 예술원 회원, 1965년 서예가협회 초대회장이 되었으며 1958∼1983년 동국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를 비롯, 한글·전각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연구하였고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독보적인 경지를 이룩하였다. 1964년 한국서예가협회를 조직, 초대회장을 맡으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대한민국예술원상·국민훈장석류장·보관문화훈장 등을 받았으며 대표작품에 <의암 손병희 선생 유허비(향리)>, <외솔 최현배 선생 묘비> 등이 있고 저서로 <서예의 예술성>, <한국서예사> 등이 있다. 과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대표작품
<칠언대련>(1984)
약력
1941년 일본 니혼[日本]대학 법학과 졸업 1952년 개인전, 부산 1953년~1954년 국전, 국립현대미술관 1953년~1955년 문교부예술과장 1953년~1981년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운영위원 1957년~1983년 동국대학교 교수 1965년~1966년 일본서예계 시찰(일본 동경) 1966년 서도개인전, 중앙화랑(일본 동경) 1970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72년 서도개인전, 부사화랑(일본 오사카) 1982년~1987년 현대미술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1983년 국민훈장석류장 1985년 한국현대미술40년전, 국립현대미술관 1985년 한·일 서예교류전, 미술회관 1986년 한국현대 미술의 어제와 오늘전, 국립현대미술관 1987년 일·한 서예교류전, 모리미술관(일본 동경) 1988년 국제현대서예전, 예술의전당 1988년 한국서예100년전, 예술의전당 1989년~1991년 현대미술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1990년 문화훈장보관장 수상 / 한국서예국전 30년전, 예술의전당 1993년 엑스포’93 국제서예전, 대전엑스포문예전시관 1993년 한국서예100인초대전, 예술의전당
평론
시암 배길기(是菴 裵吉基, 1917∼1999) 선생님은 20세기 한국 서단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서예가였다. 그의 생애가 바로 20세기 한국 서단의 산 증인이었기 때문에 이에 따른 많은 수식어가 붙는다. 이것을 종합하면 세 방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학자형 선비라는 의견이다. 이는 거의 모든 서예인들이 서실을 열고 서예를 상품화하는 풍토에서도 시암은 오직 서예 학문을 추구하면서 대학의 연구실에서 연구에 몰두하다가 정년퇴임을 하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가 뛰어난 서예 행정가라는 것이다. 그는 건국 초기 예술과장을 지내면서 우리나라 예술 행정의 토대를 쌓았으며 이어서 1957년에는 최연소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또한 그는 1960년부터 국전 심사위원과 운영위원을 지내면서 서단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년이나 계속 이어졌다. 이것을 보면 그가 서예 행정가로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야말로 ‘국전선생’ 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셋째는 전서의 대가이며 서예가로서의 평가이다. 그가 작가로 출발한 것은 6·25사변을 전후한 시기이며 이것의 결정은 1952년에서 1975년까지 6차례의 전시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후 그는 매년 각종 전람회에 초대 또는 회원전 작품을 출품하면서 서단 발전에 앞장섰다. 이제 처음으로 <시암배길기서집(是菴裵吉基書集)>이 나와 그의 작품세계의 전모를 알 수 있게 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서집에 수록된 130점의 작품과 논문, 그리고 연보를 근거로 하여 필자는 서툰 솜씨지만 시암의 서예관과 작품세계에 대하여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분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 전서가 압도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예서와 행초서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후 전서 일변도의 작품만 해온 그가 이 당시에는 각 서체를 골고루 연마하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시암하면 전서를 떠올리는 일반적인 통념을 깨뜨리는 좋은 분석이라 하겠다. 그의 작품을 보면 고결한 인품처럼 차분하고 안정되어 있다. 작품에 나타난 전체적 특징은 강렬한 개성이나 넘치는 활력보다는 매끄럽게 갈고 다듬고 과장 없이 절제된 세련미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성을 두드러지게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며 조화와 균형 속에서 또한 자신만이 지닌 독특한 작품세계를 열어 나가는 것은 더욱 어려운 작업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작품 특징을 한 마디로 압축한다면 바로 ‘중화미(中和美)’의 수호자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전통서예에서는 중화의 미를 최고의 이상으로 삼았다. 이른바 ‘중화’라는 것은 바로 가운데에 적중하는 것으로 대립적인 조화와 통일을 강조한다. 따라서 정감을 펴낼 때에는 합리적인 규범에 따라 분수에 지나치지 않도록 한다. 그리고 양강(陽剛)과 음유(陰柔)의 아름다움을 서로 보완하여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것도, 강유(剛柔)와 골육(骨肉)을 서로 고르게 하는 중화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중화미를 이상으로 삼는 서예는 반드시 형식미의 규범에 부합하도록 요구하며, 그러한 형식미의 모든 요소들은 조화와 통일을 강조하고 있다. 즉 용필에 있어서는 굽은 것과 곧은 것, 장봉과 노봉, 방필과 원필, 끊어진 것과 연결된 것, 더딘 것과 빠른 것, 질(疾)과 삽(澁), 평평한 것과 기운 것 등의 대립적인 통일을 요구하고 있다. 결체상으로 볼 때에는 소밀(疏密), 흑백(黑白), 허실(虛實), 주차(主次), 향배(向背), 위화(違和), 의정(癬正) 등으로 변증적 통일을 꾀하고 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을 ‘중화미’의 수호자로 표현한 것은 전혀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20세기 한국 전통서예의 대표자이고, 제2회 국전 추천작가가 되어 1960년부터 1981년까지 국전심사와 운영위원을 역임하였고, 1957년 대한민국 최연소자로 예술원 회원이 되어 종신하였으며, 1965년 한국서예가협회가 창립되어 초대 대표위원을 맡은 뒤 세상을 뜨기 전까지 회장을 지내면서 서단에 영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바로 한쪽으로 쓸리지 않고 화이부동(和而不同)하면서 중화의 미덕을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실로 한 사람이 40년 동안 서단의 정상에 서서 오로지 할 수 있었던 것도 보통 인품과 중화의 미덕을 갖추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것은 조화와 통일을 이루면서 중화미를 나타내고 있는 그의 작품을 보면 더욱 실감할 수 있다.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변화를 안으로 수용하면서 외길로 달리며 부단히 연마하여 조화와 통일을 이루어 서예의 완성도를 높이는 그의 작품 성향은 정말 ‘중화미’의 수호자라고 할 수 있다. (……) <심원명창(深院明窓)>을 예로 들어보겠다. 이는 시암풍 전서의 전형을 이루고 있는 작품으로 1987년에 제작되었다. 이 작품을 보면 먼저 앞에서 말한 유형과는 완전히 다른 면모로 오창석 전서에서 근거를 마련한 것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전체적 결구는 소전의 전통 모습인 조금 길쭉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면서 글자의 상반부는 비교적 빽빽하고 하반부는 늘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용필은 모두 중봉을 취하여 둥글면서 굵고 가는 변화가 적으며 마치 붓 속에 철을 품고 쓴 것처럼 부드러운 가운데도 강함을 볼 수 있다. 부수와 변도 일정한 법칙을 갖추면서 고른 간격과 좌우대칭을 이루어 안정된 조화와 통일을 이룬 전통적 중화미를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낙관과 인장의 처리에도 빈틈을 보이지 않고 있어 만약 이러한 요소들 중에 하나만 빠지거나 필획의 가감이 발생하여도 금방 안정된 조화와 통일을 이룬 중화미를 깨뜨릴 것만 같다. 그러면서 작품에서 풍겨나는 작가의 고결한 선비정신은 그만큼 그의 인품이 작품에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실로 인품과 서품이 잘 드러나면서 당대 전서의 대가라는 명성에 걸맞는 작품이라 하겠다. (……) - ‘中和美의 수호자’-是菴 裵吉基’, 郭魯鳳(서법이론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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