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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金鍾瑛)

예술가명
김종영(金鍾瑛)
구분
조각가
생애
우리나라 조각의 근대와 현대를 잇는 조각가이자 추상조각의 도입과 전개에 있어 선구적 역할을 한 김종영은 1936년 도쿄[東京]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하였다. 1943년 귀국하여 은둔생활을 하다가, 1948년 서울대학에 미술대학이 창설되자 1980년까지 교수로 재직하면서 초창기 한국미술의 건설과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다. 1953년 런던의 테이트갤러리가 공모한 국제조각전에서 <무명 정치수를 위한 모뉴먼트>가 입선하면서 조각계에 충격과 함께 구상조각에서 벗어나 추상조각으로 전환하였다. 1953~1980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추천작가 및 심사위원을 지냈고, 197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작품으로는 <전설>(1958), <전몰학생위령탑>(1958), <3·1운동 기념상>(1963), <가족>(1965) 등의 조각 작품 외에 유화, 수채화, 콜라주, 드로잉 등의 회화도 남겼다. 유족과 친지들이 뜻을 합쳐 2002년 김종영미술관을 개관하였다.
약력
1932년 전국학생서예 실기대회 일등상 1948년~1980년 서울미대 조소과 교수 및 학장 1949년~1977년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운영위원 1953년 ‘무명정치수를 위한 모뉴먼트’로 국제 공모전(영국) 입상 1955년~1965년 서울시 문화위원 1959년 김종영·장우성 2인전 1959년~1961년 문화재 보존위원 1960년~1961년 한국미술협회 대표위원 1960년 녹조소성 훈장년 / 서울시문화상 1963년 국민재건운동본부 공로상 / 1963년 3·1 운동기념탑 제작 1965년 상파울루비엔날레(브라질 상파울루) 1968년 한국디자인포장센타 이사장 1968년~1969년 유네스코 초청으로 파리, 로마의 미술을 시찰, 연구 1972년 서울대학교 공적기념상 1974년 국민훈장동백장 1975년 환갑 기념 작품 초대전 197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78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897년 초대 회고전, 호암갤러리 1989년 유족, 친지, 제자, 후학들의 뜻을 모아 우성 김종영 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우성 김종영 조각상을 제정, 격년마다 수상자를 선정하여 시상 1992년 10주기 추모 기념전 1994년 개인전 긴 봄날 1998년 김종영 특별전-그림과 조각 2002년 김종영미술관 개관
예술활동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인 김종영은 초기에는 사실적인 인체와 인물상을 다루는 작업을 하였다. 그러다가 1953년 런던의 테이트갤러리가 공모한 국제조각전에서 <무명 정치수를 위한 모뉴먼트>가 입선한 이후 그의 작업도 추상조각으로 바뀌었다. 그의 조형적인 특성은 구성적이며 공간적이고, 유기적인 생명감을 가지는 다양성을 이루었고, 자연과 인간에 대한 창조적인 통찰을 바탕으로 한 순수조형의 본질을 실현하였다. 한국에 철 조각이 도입되는 시기부터 철을 이용한 추상조각을 실험하여 조각계에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켰으나, 정작 그의 작품적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은 석조나 목조로서 재료 그 자체가 지닌 본질이 조형상의 절대적 요인이 되면서 자신의 추상적 표현욕구를 재료의 속성과 조화시켰다. 이는 김종영의 예술철학, 즉 자연 현상에서 구조의 원리와 공간의 변화를 경험하고 조형의 방법을 탐구하는 방법론의 필연적인 귀결이며 1960년대 이후 추상조각에서 나타난 생명주의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자연의 형상 속에서 양, 선, 면을 이끌어내 유기체적인 곡선으로 연결하였고, 정교하고 복잡한 기교를 멀리하여 단순한 기법으로 표현을 응축시켜 마치 하나의 생명이 있는 대상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대표작품
<작품58-8>(1958) <작품>(1965) <작품76-14>(1976)
작품 리뷰
<작품>(1965) 김종영(1915~1982)은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이다. 그는 초기에는 아카데믹한 사실주의 기법의 작품들을 제작하였으나 1950년대 후반부터는 종래의 인체상에서 벗어나 재료의 법칙과 구조에 따르는 순수한 조형적 공간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재료가 가진 천연 그대로의 성질을 살려 최소한의 조각방법과 구성요소를 가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움과 한치의 군더더기도 없는 ‘不刻의 美’를 구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원시주의적 단순성과 간결미를 느낄 수 있다. 1965년 대리석으로 제작한 이 조각은 자연현상에서 경험한 구조원리와 공간의 변화를 작품화하겠다는 작가의 조형관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자라나는 식물을 연상케하는 이 작품은 돌이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질료의 속성을 최대한으로 표현하였다. 미묘한 굴절과 곡선의 우아한 율동감, 양감의 점진적인 증가와 감촉에서 오는 부드러운 느낌은 감상자들이 현대추상조각에서 맛볼 수 있는 묘미이다. - <현대미술관 뉴스>, 송미숙, 64호
평론
“부지런히 일하고 정직한 것은 예술가와 농부의 미덕이다.”(김종영) 김종영(金鐘瑛)의 작가적 편력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심플한 편이다. 그의 예술가로서의 생애는 지나치리만큼 평탄한 면을 드러내 놓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김종영의 개인적인 체질과 무관하지 않을 듯한데, 그가 살았던 시대적 굴곡에서 볼 때 확실히 이 점은 예외적인 사항으로 돋보인다. 그의 예술을 독특한 위상으로 바라보게 하는 요인도 여기서 먼저 찾아져야 할 것이다. 김종영의 조각가로서의 위치는, 우리나라 최고의 근대조각가인 김복진(金復鎭)에 이은, 선구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먼저 파악되어질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의 근대조각은 1919년 김복진이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함으로써 출발된다고 할 수 있는데 , 김종영은 바로 그 후속부대로서 1936년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서 근대조각을 수학하였다. 그와 비슷한 연배로서 알려져 있는 조각가로선 윤승욱(尹承旭), 김경승(金景承), 윤효중(尹孝重) 등이 있다. 김종영은 이들에 비한다면 훨씬 뒤늦게야 알려진 편이다. 이유는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개인적인 체질에서 먼저 찾아질 수 있을 것 같다. 대부분의 그의 동료들이 당시 관전이었던 문전(文展)이나 선전(鮮展) 등을 통해 명성을 얻어가고 있을 때에도 그는 홀로 작품제작에만 골몰하였고 자기세계에 자적하기를 즐겼다. 이 같은, 자신에 성실한 과묵한 성향은 해방이후 작가적 편력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종전이 가까워올 무렵인 1943년에 향리로 돌아온 그는 1948년 서울대 미대 교수로 나아가기까지의 한동안을 시골에 파묻혀 그야말로 주경야독을 실천하고 살았다. 옛 선비들의 소박한 삶을 재현해 놓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난세를 맞은 고격한 선비가 취했던 태도를 엿보여주기 때문이다. (……) 김종영의 작품은 먼저 환원적인 특성으로 인해 심플한 인상을 드러내고 있다. 환원적 특성은 구조적인 단순화의 지향에서 연유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체질론에서 본 그의 생애의 평탄함과도 결코 무관치 않을 듯하다. 환원적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항상 본질론적인 것에의 접근을 환기시키며, 모든 외화적인 것을 배제한 에센스를 향한 열망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환원적이라고 했을 때 거기서 오는 단순함은 세부에 집착치 않고 언제나 전체로서 볼 때는 동양인의 관조적 사유에도 크게 기인함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는 가장 근대적 형식의 예술을 추구했지만 그의 사유세계는 전통적인 인생관, 전통적인 우주관에서 결코 벗어나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수학한 것은 다름아닌 로댕 이후의 근대조각의 방법이었으며 그것을 계승한 브랑쿠시, 아르프의 문맥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동양인의 사유체계였으며, 그러한 사유체계로써 근대조각을 접근했으며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그의 작품이 때때로 브랑쿠시나 아르프를 연상시킨다고 하는 지적은 단순한 외형적 인상에 불과할 뿐이다. 어떤 면으로 본다면, 전체로서 보려는 단순화의 방법론에서 기인하는 의식의 교차현상이 그러한 인상을 빚어내고 있을 뿐이라고 할 수 있다. (……) 그의 작품에서 만나는 재질에 대한 높은 인식에서 거듭 확인되어진다. 그가 다루었던 소재는 돌, 브론즈, 나무, 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편이다. 이런 다양함 속에서도 주로 많이 취급했던 것은 돌과 나무라고 할 수 있다. 돌과 나무에 편중되어 있다는 것은 우선 방법적으로 조각, 즉 밖에서 쪼아내는 방법에 지지되어 있음을 반영해주고 있다. 1950년대 한동안 다루었던 용접에 의한 철조 역시 떠내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가해지는 수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가 소조의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지 않은 것도 어떤 면에서는 이미 일정한 형태를 만들어놓고 떠낸다는 방법에 대한 기피에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한다. 밖에서 각을 한다는 것은 애초에 어떤 완벽한 형태를 상정한 것이기보다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 놓여 있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언제나 자연스러움 속에 놓여 있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란 말이 거듭되지만, 이 경우에서의 자연이란 본래적인 질서의 회복 또는 전체적인 질서 속에 무리 없이 편입될 수 있는 회귀의 논리에서의 자연스러움이다. 돌이면 돌, 나무면 나무가 지니는 질료적 속성을 최대로 드러내 놓는 방법, 그것이야말로 자연스러움으로 대변되는 것이다. 다음의 언급은 그의 예술을 이해하는 바로미터가 되기에 충분하다. (……) - ‘金鐘瑛-긴 봄날’, 오광수(미술평론가), 1994년 5월
관련도서
<회상 나의 스승 김종영>, 최종태, 가나아트, 1999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 조각가 金鍾瑛의 소묘와 산문>, 김종영, 열화당, 1983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선집 김종영>, 문선호, 금성출판사, 1976
관련사이트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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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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