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윤명로(尹明老)

예술가명
윤명로(尹明老)
구분
서양화가
생애
화가 윤명로는 1960년대 초부터 무형파 또는 비정형파로도 일컬어지는 앵포르멜 운동에 참여했던 전후 추상미술의 핵심적 인물이다. 윤명로는 1960년대 미협의 창립 멤버로서 출발하였다. 당시 국전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적인 경향이 압도적이던 화단에서 전통의 무거운 벽을 깨고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기치를 내걸었던 것은 바로 윤명로를 비롯한 젊은 작가들이었다. 이들은 1960년 미술가협회, 악뜌엘 등 전위적인 집단을 중심으로 거의 전투적으로 기존 화단과 대결하고 이를 극복하였던 것이다. 1969년 록펠러재단의 초청으로 프레트그래픽센터에서 판화를 전공하고 귀국한 후에는 판화를 통해서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최근 그의 작품을 보면 개념에서의 탈피로 그린다는 행위가 뚜렷해졌는데, 그린다는 행위가 서양적인 붓의 터치가 아니라, 동양적인 준법을 연상케 하는 속도를 머금고 있다. 어떤 그림을 보면 거의 댓잎을 연상하리만큼 많은 형상과 그려진 준법이 중복해서 존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서양과 동양의 만남을 볼 수가 있고, 동시에 화가 윤명로의 독자적인 미의 세계를 확인하게 된다. <균열> 연작, <얼레짓> 연작, <익명의 땅> 연작 등 10년 단위로 옛것을 주제로 화두를 바꾸어 왔으며 근년에 보여주고 있는 <겸재예찬>은 동서양의 조화를 잘 담아낸 그의 작품의 결정체이다. 무수한 선과 점과 형상이 이룩한 독창적인 그의 작품은 우리를 환상적이고 내밀한 이야기의 세계로 끌고 간다.
약력
1960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1960년 60년 미술가협회 창립전, 덕수궁벽(서울) 1963년 제3회 파리비엔날레(그랑팔레, 파리) 1966년 제5회 도쿄 국제판화비엔날레,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일본) / 한국현대작가전, 말레이시아국립미술관(쿠알라룸푸르) / 극동작가초대전, 메이시백화점(뉴욕) 1967년 제9회 상파울루비엔날레(브라질) 1977년 견지화랑(서울) 1984년 동산방화랑(서울) 1984년 아트코아갤러리(로스앤젤레스) 1991년 호암갤러리(서울) 1992년 선재미술관(경주) 1995년 박영덕화랑(서울) 1996년 마이애미아트페어(미국 플로리다) 2000년 가나아트센터(서울) 2001년 조현갤러리(부산)
예술활동
서울대 미술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덕수궁 돌담에서, 기성 화단의 권위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벽전(壁展)을 꾸미고 참여하면서 등단한 윤명로는 누구보다 왕성하고 자유로운 실험정신의 소유자였다. 당시 격동기의 뿌리뽑힌 상황을 실존적으로 증언했던 앵포르멜 운동 이후, 그는 지금까지 왕성한 실험정신을 지속해 오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미술의 큰 흐름이 되었던 앵포르멜 미술은 6·25동란 등, 당시 한국의 비극적 상황에 의해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의 화단에도 공유되었던 미술사조였다. 윤명로는 196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어두운 색조와 두터운 질감을 강조하는 화면에서 앵포르멜 미학을 자기나름대로 성숙시켜 나간 새로운 작업을 선보였다. 화면에서 구체적인 형상이 나타나는 <회화 M10>(1963)은 제3회 파리비엔날레 출품작으로 석고와 접착제를 사용하여 저부조의 느낌을 주는 표면처리를 하고 그 위에 은색, 군청색 등을 입혀 마치 은박이 얹혀진 점토 같기도 한 금속의 질감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실제로 고대 중국의 청동기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작품으로 제한된 색채와 질감을 얹어가는 작업 등에서 그가 단단한 표면에의 관심을 지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균열> 연작, <얼레짓> 연작, <익명의 땅> 연작 등 10년 단위로 옛것을 주제로 화두를 바꾸어 왔다. <균열> 연작은 땅 표면이 갈라 터지듯, 분청의 재질감이 그대로 인위성이 배제된 채 시간성의 추이에 의해 작품화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며, 연작 <얼레짓>의 구상을 회화화하기 시작한 것은 균열의 연작 이후 1970년대 말부터 비롯된다. 그 발상의 원천은 그리는 회화로 되돌아가겠다는 데 두고 있다. 그리하여 균열의 연작에서 보여준 하나의 현상으로부터 그는 조심스럽게 색체에로 접근해 가며 동시에 마티에르의 회복을 시도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그는 합당한 재료와 기법을 안출해 냈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얼레짓’은 곧 작가 자신의 내적 심성을 감거나 풀고자 하는 신체의 행위를 상징하며,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자기자신을 열어 보이고 진솔하게 표현하려는 의도와 통하고 있다. <익명의 땅> 연작은 분출하는 에너지를 담은 격렬한 붓질과 육중한 질료의 흘러넘침을 보여주었다. <겸재예찬>은 조선의 성리학 이념을 철저히 이행하고 외세로부터 독자성을 지켰던 강인함과 고고함에 심취한 겸재 정선의 정신세계를 예찬하고 있다. 철가루를 사용한 독특한 재료가 주는 재질감으로 인해 평면에서의 추상적 공간이 더욱 맑고 투명한 운치와 음률을 더하고 있다. 300년을 뛰어넘는 우리의 정체성을 유희공간으로서 선적 사유에 의한 한국의 자연을 전통 회화방식에 바탕을 둔 현대적 감각과 언어로 재해석한 기품이 가치를 더하고 있다.
대표작품
<균열> <문신>(1963) <얼레짓>(1986) <익명의 땅>(1991) <겸재예찬>
전시 리뷰
서구의 현대미학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왜 겸재 정선인가. 겸재와 현대미술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가. 전통적인 수묵산수화에서 겸재를 그 중심에 놓은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추상회화에서 겸재를 불러들이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진경산수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겸재가 추상회화에서 부활하고 있다면 응당 놀랄 일이다. 하지만 만일 겸재가 지금 살아 있다면 추상주의의 예찬론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개연성을 담보로 윤명로의 작업과 마주했다. 그러고 보니 윤명로의 작업은 필연적으로 겸재의 현대적인 작업이 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윤명로는 ‘선의 유희’라고 할 수 있는 최근 작업에서 겸재와의 연관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자연을 해석하고 있다. 순수추상이면서도 겸재가 그랬듯이 그 조형적인 근거를 한국의 산하에서 취하고 있다는 뜻이다. 겸재가 한국 산하를 보고 묘사했다면 그는 가슴으로 느낀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겸재는 진경산수라는 형식에다 한국 산하를 담은 반면, 그는 형식을 초월하여 단지 감성의 순수성에 의탁하여 자연의 이미지를 표출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애초에 지적 조작의 가능성을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선의 자유로운 리듬만을 촉발하고 있다. 그 리듬이란 당연히 한국 산수가 가지고 있는 조형적인 율동미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 율동미가 반복되고 또는 겹쳐지는 가운데 유기적인 이미지를 창출하면서 자연미에 육박하는 추상적인 공간을 열어놓는 것이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의도하는 이미지가 없다. 단지 작업하는 그 순간의 흥취에 붓을 맡길 따름이다. 그 흥취는 아름다운 산수경을 보면 그림으로 옮겨보고 싶다는 자연스러운 자기표현에 대한 욕구다. 거기에 신명을 실음으로써 작업이 이루어진다. 그는 무엇을 표현하겠다는 작의로부터 스스로 해방된다. 그럼으로써 붓의 움직임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전개될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작업에서 단지 리드미컬한 선의 흐름만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전체에서는 아릿한 산수화의 이미지를 읽어낼 듯도 싶다.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의도하지 않은 이미지이기에 시각적인 개방성이 느껴진다. 막연한 추상이 아니라 자연미에 근거를 둔, 인간적이면서도 따뜻한 추상인 셈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간적이라는 표현은 억지스러운 인위성이 아니라 인간적인 체취에 가까운 것이다. 이렇듯 그의 추상 언어는 <얼레짓> 연작 이후 <익명의 땅>을 거쳐 전통적이고 한국적인 정서와 연관을 맺어왔다. 이처럼 작업의 기본적인 개념은 한국인으로서의 자의식을 표출하는 형태가 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겸재예찬>은 맹목적인 서구 지향적인 경향의 추상과는 엄연히 다른 토종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겸재의 현대적인 부활’이라는 수식어가 그의 작업이 가지고 있는 진실에 가장 근접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 - ‘겸재의 현대적인 부활’, 신항섭(미술비평가), 가나아트센터, 윤명로전
평론
1977년의 <균열> 연작을 묶은 첫 개인전 이후 7년 만에 열리는 이번의 윤명로 개인전은 <얼레짓> 연작이다. 한 화가에게 특히 한 중견작가에 있어 7년이라는 세월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세월은 40대 중반기에 들어선 작가들에게 있어서는 변모와 심화의 두 기로에 선 갈등의 시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화가들 가운데서도 회화에 대한 어떤 특정의 시각에서 외곬으로 꾸준히 자신의 회화세계를 추구해 가고 있는 작가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변모를 되풀이하며 진정한 자신의 세계를 끈질기게 모색하고 있는 작가들도 있다. 윤명로는 후자에 속하는 작가로 생각된다. 그리고 실제로 이번의 작품전은 이 화가의 그간의 모색과 변모의 새로운 결실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윤명로가 첫 개인전에서 보여 주었던 <균열>의 연작은 하나의 물리적인 현상을 타블로라고 하는 평면에 시각화한 것이었다. 그의 작업은 그 작업 나름의 문제성을 제기하고 있었으나 화가와 화포와의 관계에 있어 화가의 능동적 참여가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거기에는 컨셉(개념)이 앞서고 신체성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번의 <얼레짓> 연작에서는 회화에 있어서 물리적인 것으로부터의 탈피와 개념의 극복이라는 방향으로 그의 회화는 크게 전환하고 있다. 윤명로가 새로운 연작 얼레짓(이 단어는 작가 자신이 새로이 만든 말로 우리나라 고유의 옛 빗인 얼레빗에서 따온 것이다)의 구상을 회화화하기 시작한 것은 <균열>의 연작 이후 1970년대 말부터 비롯된다. 그 발상의 원천은 그리는 회화로 되돌아가겠다는 데 두고 있다. 그리하여 <균열>의 연작에서 보여준 하나의 현상으로부터 그는 조심스럽게 색채에로 접근해 가며 동시에 마티에르의 회복을 시도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그는 합당한 재료와 기법을 안출해 냈다. <얼레짓> 연작에서 윤명로는 흔히 쓰이고 있는 캔버스 대신에 무명을 택하고 있다. 이 무명은 수용력을 가지고 있으며 물감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그는 물감으로서 먹과 아크릴을 동시에 상용하면서 짓거리(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선들(얼레빗 모양의 화필을 손수 만들었다)과 덤덤한 붓자국의 채색을 대비시키면서 화면 전체를 빛과 그늘, 이를테면 있는 것과 있으려는 것의 양의성을 화포 속에 실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곧 이 화가가 되찾으려고 하는 회화적 표현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윤명로는 이른바 초월적인 선적세계를 거부한다. 몸과 마음이 같이 부딪치며 시작도 끝도 없는 화면 속에서 예술을 몸소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찾아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는 예술가인지 모른다. - ‘모색과 변모의 새로운 결산’, 이일(미술평론가)
작가의 글
설령, 역사의 붕괴와 영광들로 떠들썩한 이 세계에서 인간의 분노와 희망에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는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나는 괘념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의 사건이나 사물을 바라보듯 나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를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무척 고통스러움에 빠져들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그림과 더불어 그림에 의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폭력과 외설, 잡다한 재료와 저속한 생산물의 차용, 첨단과학에 의한 온갖 이미지의 난무로 자연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에 우리가 되찾아야 할 사상은 불멸의 자연에 대한 경외와 마음이다. 나는 텅 빈 여백을 기초로 해서 하나의 형, 하나의 색을 본다. 이름지울 수 없는 이러한 형과 색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이는 것, 들리지 않으면서도 들리는 것, 황홀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보이지 않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보며, 들리지 않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들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나타내려는 나의 행위를 나는 격이라 부르며 영원히 익명의 땅으로 있기를 바라고 있다.
관련사이트
국립현대미술관
관련멀티미디어(전체0건)
이미지 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