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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우(吳承雨)

예술가명
오승우(吳承雨)
구분
서양화가
생애
1930년 전남 화순 출생, 1957년 조선대학교 미술과를 졸업. 제6회∼9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을 차지하였으며, 국전 초대작가·심사위원,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등을 지냈다. ‘산’의 화가 오승우의 화력은 철저한 독학을 통한 국전에의 진출로 이루어졌다. 국전 6회에서 9회까지 연이어 특선 수상,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을 역임하기까지 그는 이른바 자신이 터득한 인상파적 방법에 의해 한국의 자연을 독자적으로 해석해왔다. 한국의 사찰, 고궁 등의 소재에 천착하며 한국적인 옛 풍정과 역사의 뒤안에 묻힌 분위기를 감상적으로 묘사해 냈던 그가, 우리 산 곳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힘이 넘치는 붓질과 화려한 색상으로 우리의 산하를 타오르게 묘사했었다. 기법면에서는 굵으면서도 투박한 두드러진 선과 순도 높은 색채로 사찰·고궁·산 등 한국 고유의 자연이 지니는 독특함을 표현하였다. 그의 관심은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확대되어 세계 곳곳의 명찰과 풍경에 그 환상적이고 강렬한 필치를 더하고 있다. 서울시문화상·옥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대표작품에 <미륵전>, <인정전>, <산> 등이 있고, 저서로는 <구라파풍경화집>, <남미풍물집> 등이 있다.
약력
1930년 전남 화순 출생 1957년 조선대학교 예술과 졸업 1957년~1960년 국전 6,7,8,9회 특선 1969년~1980년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역임 1976년 오승우 구라파 풍경화집 출간 1977년 경주 통일전 벽화제작(매초성 당군격퇴 100호) 외 7점 1983년~1993년 사단법인 목우회장 역임 1986년∼현재 미술대전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 역임 1993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 1995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 오승우 100산화집 출간 / 오승우 100산전, 예술의전당 1998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수상 2000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 역임 2000년 명예철학박사 수여(원광대학교)
예술활동
오승우는 자연주의에서 출발하면서도 자연 대상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연에서 오는 감동을 기조로 한 표현에 중점을 두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항시 자연에로 향한 열망이 숨쉬고 있으면서도 밝고 화사한 빛과 색채에 의한 표현의 일관성을 유지해 오고 있다. 인상파가 추구한 바의 분할적인 묘법과 순도 높은 색채의 감각을 한국의 자연에 적응시켰다. 이른바 인상파적 방법에 의한 한국 자연에 대한 해석은 그 독자적인 경향으로 심화되었다. 1960년대 초반 그의 작품은 점차 자연의 구체적인 현실성에서 벗어나 환상적인 세계로 기울어졌는데, 이와 같은 소재상의 변화 역시 인상파적 기법의 자연스런 추이로 볼 수 있는 것 같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다시 꿈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 속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 그가 여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현실적인 소재의 범주는 이미 1950년대를 통해 보여준 사찰이나 고궁이 중심이었다. 1980년대에 시작, 대단위로 제작된 한국 100산은 어둡고 굵은 선과 터치로 산의 내면성을 추구하여 산이 가지는 웅장함을 심도 있게 다룬 역작들 이었고, 1990년대 시작한 동방의 고건물 시리즈는 적, 청, 황, 보라의 원색적인 색채와 호방하고 광란적인 터치로 제왕들의 절대 권력과 영화와 번영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어떤 비구상의 추상 방법을 자신의 작품형식의 아이디어로 삼아 10년, 20년 이상을 별 고심 없이 반복적으로 연작하고 있는 현대 화가의 사례는 많다. 그러나 오승우 작가처럼 현실 자연의 명산을 전국적으로 찾아 나서서 반드시 그 정상에까지 오르며 산수와 산세의 모든 것을 직접 현장 체험한 시각과 감흥 및 정감으로 그린, 많은 난관을 거친 연작을 10년 이상 계속한 화가는 달리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단순한 자연풍경이나 이국적인 정서를 찾아서 실경을 묘사하는 이른바 진경산수(眞景山水)의 화가와는 다르다. 탐미의 과정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양적 진리의 근원을 찾아내려는 구도의 순례자다. 대담한 필치와 생략된 구도 속에서 또 다른 생명력의 원천으로 접근하려는 그의 의지도 이를 반증한다. 동양의 자연과 건축을 그렸으되, 그가 그려낸 화폭은 전혀 다른 분위기의 현대 표현주의적 기법으로 재창조된다.
대표작품
<법당내부>(1957) <민속놀이 진주 소싸움>(1981) <인정전>(1983)
전시 리뷰
노화백의 열정은 끝이 없었다. 화가로서 치명적인 시력의 저하와 칠순을 넘긴 나이지만 뜨거운 가슴과 집념, 자신에 대한 팽팽한 긴장과 성실함으로 회화예술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는 원로화가 오승우 씨(71).그가 ‘동양의 원형’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8일부터 19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작품전을 갖는다.6년 전 보여주었던 <한국의 백산전(百山展)>에 이어 동양정신의 근원을 새롭게 해석해내는 대형 전시회다. 이번에 출품하는 그림들은 모두 동양의 고건축과 고적들을 오화백 특유의 힘 있는 필치로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동양건축전’으로 이름 붙여도 좋을 만큼 아시아 각국을 돌며 80호에서 100호에 이르는 대작 120여 점을 생산한 작품들을 모았다. 나이가 들수록 소품 제작에 안주하거나 매너리즘에 빠지는 현실을 감안할 때 ‘원로의 승리’로 기록될 일이다. 작가가 건축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선친인 오지호 화백의 권유를 받은 20대 후반부터. 금산사 미륵전, 법주사 팔상전, 통도사 금강계단 등으로 국전에서 네 차례 입상한 그는 30대 중반까지 전국을 돌며 고건축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아냈다. 1990년대 들어 국내에서 더이상 대상을 찾지 못하자 눈길을 외국으로 돌려 몽골, 티베트, 태국, 인도, 네팔, 캄보디아, 라오스, 일본, 부탄 등 동아시아 전역을 뒤지고 다녔으며 중국에서는 아예 1년여를 살면서 캔버스와 씨름했다. 이번 전시작의 절반이 중국 그림인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 제작기간도 한국 건축을 제작한 1956년부터 1962년까지, 동양 각국을 돈 1996년부터 2001년까지 등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오씨는 “동양의 전통건축은 고유의 민족정신이 꿈틀거리는 곳”이라며 “역사 속에서 심미의식을 찾으면서 스스로를 성찰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고 말했다. 출품작 중 한국 건축 그림은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돈화문, 종묘, 수원성, 석굴암, 해인사 장경각 등 30여 점이 나온다. 외국 건축물로는 중국 베이징(北京)의 자금성과 이화원은 물론 티베트 라사의 포탈라 궁전,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일본 나라의 호류지(法隆寺)와 도다이지(東大寺) 그림 등 동양권 13개국 작품은 90여 점을 선별했다. 화면을 통해 드러난 동양의 고건물과 고적들은 대상의 재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굵은 터치와 속도감 있는 필력으로 동양 혼을 불러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작가는 “여러 나라를 돌아본 결과 건축물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일본밖에 없었다”면서 “이번 전시가 건축회화를 국내에서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국민일보>, 손수호, 2001년 6월, ‘오승우전… 붓끝으로 다시 쌓은 동양의 건축미학’
평론
우리 국토의 70%를 차지하는 산, 오승우가 이 산들의 정상을 발로 딛고 서서 산의 겉모양이 아닌 속살을 느끼며 그려 나간 것이 130여 산을 누빈 중에서 100산. 그가 여기에 뜻을 세운 지 10여 년, 때로는 조난의 위기를 겪기도 하면서 드디어 이루어지게 된 <백산전>. 이것이 다 우리 조국의 산들이다. 그는 알프스, 안데스, 후지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에도 올라갔으나 흥이 솟지 않아 그림은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강토의 산들만을, 그러니까 조국의 얼굴을 그린 것이고 이 점, 그는 풍토성이 강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 10여 년 전 조국의 명산 100산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은 뒤, 그의 화도 편력의 전부를 토로하고자 하는 염원과 날로 두터워지는 산에 대한 신앙에 가까운 사랑으로, 보다 본질적이고 강한 것을 추구하며 주장하려 하는 그의 강인한 성격이 배어 있는 산의 대작들은 하나하나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다양한 감동을 안겨 주는 것이다. 술을 좋아하는 그다. 분위기 좋게 취하면 배꼽을 내보이기도 하고 쥐어짜는 목소리로 노래도 뽑는다.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법. 그는 기법에 큰 변화를 주면서 자기가 발로 딛고 선 산들의 정상에서 과감하고 극적인 회화세계를 열어 가고 있는 것이다. 몸으로 부딪친 기백이 담긴 산, 그의 체취가 느껴지는 산을, 덥석 그 큰 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듯이 보인다. 오랜 세월 동안의 교의를 통해 필자는 어느 자리에서고 늘, 재치 있게 말을 받아 주어 자리를 활기 있는 분위기로 만들어 주는 그가 즐거웠다. 한마디로 그는 해학과 멋을 아는 사람이다. 이번 그의 집요한 작가정신과 정진의 성과로 열리는〈백산전>에 그가 얼마만큼이나 정신적인 만족감을 느낄지? 아마도 오승우, 그는 이를 계기로 또 다른 새로운 드라마의 구상에 몰두할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 ‘오승우 백산전에 부쳐’, 유경채(대한민국 예술원회원)
작가의 글
(……) 이곳 진달래나무는 육지 야산에서 보는 진달래나무와 같이 키가 크지 않고 아무리 오래된 나무도 키가 30cm 안팎인데 세찬 바람으로 반원모양으로 곱게 다듬어져 있다. 잔가지가 빽빽히 나 있고, 따라서 꽃망울도 가지가지마다 다닥다닥 붙어 개화가 되면 바늘 하나 꽂을 틈이 없어 나무 전체가 분홍빛 반달로 변신하면서 온 산을 덮는다. 바위틈에 어쩌다 뿌리내린 진달래는 더욱더 악조건에서 생명을 부지해야 한다. 수분을 흡수하기 어려우니 키가 자랄 수 없고 줄기는 마치 가는 철사 같으면서도 봄이 되면 몇 송이 타오를 듯한 붉은 꽃을 피운다. 참으로 모진 생명력이다. 그 옆에는 실목(失木)과 잡목이 역시 바위틈 사이에 뿌리를 박아 마치 분아(盆我)로 만든 고목(古木)과 같이 몽당하다. 어느 것은 수령 100년이 훨씬 넘는 것도 많다고 들었다. 이런 나무도 봄이면 어김없이 새싹을 트게 하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고 종족을 번식하면서 모진 생명을 이어나간다. 과연 생명이란 무엇인지. 생명의 신비는 아마 영원히 헤아릴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것으로 남을 것만 같다. 여하간 생명분이란 아무리 미물일지라도 살아 있다는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요, 희망과 활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신장과 번영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반면, 아무리 예쁜 꽃도, 아무리 예쁜 미인도 아무리 아름다운 생명체라 할지라도 죽는다는 것은 두려움이요, 공포요, 절망이요, 단절이다. 그래서 생명은 천하(天下)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다. 산정에는 새 생명이 가득 차 있다. 가장 왕성한 생명이 넘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아름다운가보다. 생의 희열, 생의 환희를 나는 가슴 가득히 안고 있다. - <주간미술>, 오승우, 1988년 10월 24일, ‘한라산 여행 중에 남긴 기록’
관련도서
<오승우 한국 100산>, 오승우, 동서문화, 1995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선집 오승우>, 문선호, 금성출판사, 1982
관련사이트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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