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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련(許百鍊)

예술가명
허백련(許百鍊)
구분
동양화가
생애
1910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중퇴하고 그림공부에 전념, 1923년 선전 특선과 192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연속 수석 입선하여 화단에 등장하였다. 75년 동안의 긴 작가 생활을 통해 1만여 점에 이르는 많은 작품을 남기며 호남 남종화단을 지킨 남종화의 대가이다. 1953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그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2회부터 13회까지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1958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선임되었다. 1973년 회고전을 가졌고,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비롯 정부로부터 국민훈장무궁화장이 수여되었다. 대표작으로 <계산청하(溪山靑夏)>(1924), <설경(雪景)>(1965), <추경산수(秋景山水)>(1971) 등이 있다.
약력
1891년 전남 진도에서 출생 1898년~1908년 허형으로부터 그림을 배움 1908년 서화연구원 출입 1911년 일본 명치대 법학부 입학, 1년 뒤 중퇴 1912년~1917년 일본 남화의 대가 소실취운(小室翠雲)에게 사사 1919년 일본에서 귀국 1920년 목포에서 첫 개인전 1922년 서울에서 동아일보 주최 개인전 1923년 제2회 선전 특선 / 일본 유학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1932년 2인전: 허백련·김은호 1947년 농촌기술학교 건립 1952년 무등산에 춘설헌을 짓고 은거 1953년~1960년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1959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62년 문화훈장금관장 1966년 제11회 대한민국예술원상 1973년 회고전 / 대한민국문화훈장금관장 1974년 전남대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받음
예술활동
의제는 일본에서 기법을 익혔으면서도 일본 색채에서 탈피하면서 소치와 미산의 남화산수를 계승하여 굳게 토착화시켰다. 처음에는 화조, 송하 등에도 손을 댔으나 만년에 들면서 산수화만을 즐겨 그렸으며, 채색을 하는 듯 마는 듯 엷디엷은 담채(淡彩)가 아니면 묵으로 그린 그의 수묵 산수화는 선이 부드럽고 소박한 것이 특징이다. 짙은 채색이 없어서 화사하지 않은 서민적이고도 토착적인 은은한 분위기를 풍기는 의제의 화풍은 한국적이면서도 호남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소치는 세필을 싫어했으며 형상보다 뜻을 더 중요시했는데 의제는 이러한 소치의 작풍을 따랐으며 그림보다 화찬을 더 중요시하여 화찬을 정한 후 붓을 들었다. 이것은 문인화의 시, 서, 화 3절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시와 서를 우위에 놓기 때문이다. 특히 의제의 산수에서는 밋밋한 황토산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것은 전라도 산의 진경을 그린 것으로 1951년 이후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대표작품
<하경산수>(1940) <유산해조도>(1959) <추경산수>(1971)
전시 리뷰
1977년 2월 15일에 의제 허백련 화백이 87세로 생애를 마쳤을 때, 나는 월간 <공간>에 ‘전통 계승의 마지막 남종 대가’로 표제한 추모의 글을 쓴 바 있었다. 그러한 평가는 그의 고격한 전통적 산수화의 경지 및 그 정신적 내면성에 대한 참된 이해자들에 의해 이의없이 존중되던 의제의 예술의 뚜렷한 본질이었고, 지금도 물론 변함없는 의제의 이미지이다. 내가 의제를 처음 뵌 것은 1961년 5월에 광복 후 처음 서울에서 개인전을 갖게 될 때였다. 당시 신문기자였던 나는 칠순 古稀를 넘긴 백발 노화가의 풍모였던 그를 적선동의 어느 한옥 여관 유숙처로 찾아가 인터뷰를 청했던 것이다. 그 뒤로도 나는 서울과 광주 무등산 기슭의 대숲 우거진 離俗 환경의 산가 춘설헌 화실에서 더욱더 도인 같은 풍채를 보이던 의제를 뵐 기회가 거듭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의 고매한 인품과 전통적 회화 사상, 곧 남종화론 및 그 사상성의 거침없던 강론, 그리고 그의 고격한 화필 생활의 바탕이 되었던 풍부한 한시 교양 등에 감명을 받곤 했었다.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品이다. 본래 品이란 것은 기교가 있은 뒤에 그 기교를 초탈한 자유의 경지에서 나오는 법이다. 따라서 先人 大家들의 전통과 기교를 배우고 난 뒤라야 형상을 벗어난 영원한 생명의 자기예술이 가능한 것이다. 전통을 이어서 공부를 열심히 하면, 처음엔 古人을 본받았다 해도 안 달라질 수가 없는 건데, 그것을 ‘成家’라 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창조’라는 말을 잘 쓰는데, 창조라는 게 그렇게 아무나 해낼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다. 대체로 동양의 그림은 墨筆로 그리는 것으로서, 古人들의 말에 ‘有筆無墨도 不可하고, 또 有墨無筆도 不可하다’ 했다. 그런 이치로 동양화를 말할 때, 筆力이 있어 움직이고, 또한 墨體가 있어야만 氣韻生動의 묘경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앞의 말들은 내가 의제에게서 직접 들으며 받아 적었던 것의 일부이다. 그는 그림에 대한 대화를 아주 깊이있게 즐기며 듣는 사람을 매료시키곤 했었다. 그것이 그의 예술사상 및 회화사상의 자연스런 표명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1920년대 이후의 새로운 전통회화 양상을 주도한 화가들 중에서 古典論과 전통적 古法을 가장 충직하게 존중하면서 자신의 경지를 이룩한 유일한 존재였다. 곧, 그는 정통 남종화법의 자재로운 수렴으로 의제풍의 格 및 정신적 筆意를 실현시켰던 것이다. (……) 의제 허백련의 빛나는 예술생애는 앞에서 거듭 말한 대로 정통의 남종화법과 그 정신을 엄격히 전수하여 소화한 바탕 위에서 그의 세계를 독자풍으로 고격하게 실현시킨 탁월한 경지로 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특질로서의 그의 산수화 작업의 본질 외에 현대적인 의미의 독특한 개성 발휘나 새로운 시대적 표현정신 등이 결여된 면을 들어 형식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무의미하다. 의제는 그가 지향하였던 예술태도를 자신의 방법 및 형식으로 진실되게 구현하는 가운데 그의 예술혼과 필력을 최대한으로 승화시킨 대가였다. 끝으로 의제 자신이 그의 관념적인 산수화 수법에 대한 비판의 시각에 대응하려고 했음이 분명한 현실적 題의 작품도 더러 남긴 사실을 언급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널리 알려져 있는 그 作例로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多島海風靜>(1959년 國展 출품작, 原題는 <海不洋波>) 등이 있고, 그 밖에 비특정 實景 소재로는 한국의 현실적 농촌 풍정(農耕)의 주제가 거듭 그려졌다. 1939년 작품에 붉은 단풍색이 짙게 곁들여진 사실적인 풍경화를 시도한 <廣寒樓 秋色> 같은 예도 있다. - ‘전통적 筆意, 고매한 晝格의 山水 晝家 허백련’, 이구열(미술평론가), 1991년 4∼5월, 호암갤러리
관련도서
<近仁堂唱和集>, 허백련, 교림, 1991 <毅齋 許百鍊: 탄생100주년 기념>, 허백련, 湖巖갤러리, 1991 <韓國近代繪畵選集: 韓國畵>, 안중식, 금성출판사, 1990 <毅齋許百鍊>, 박진주, 藝耕産業社, 1989
관련사이트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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