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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범(李象範)

예술가명
이상범(李象範)
구분
동양화가
생애
1918년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를 졸업하고 심전(心田)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에게 그림을 배웠다. 1925년부터 선전(鮮展) 특선 10회에 이르렀으며, 1927년부터 동아일보의 미술책임 기자로 근무하다가 1938년 손기정(孫基禎) 선수 일장기말살사건으로 피검되었다. 1938년부터 선전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1947년 종합미전(綜合美展) 심사위원이 되었다. 1949년 홍익대학교 교수, 1949년 이화여자대학교 강사를 겸하고 1953년부터는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54년 예술원회원, 1956년 미술가협회 고문에 추대되고, 1961년 홍익대학교 명예교수를 역임하였다. 1963년 3·1문화상 본상, 1966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다. 작품세계는 초기에는 스승이었던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의 영향을 받아 남북종(南北宗) 절충화풍을 보였으나 점차 독자적 세계를 개척, 향토색 짙은 작품들을 그려냈다.
약력
1918년 서화협회 정회원 1920년 동아일보 창간 휘호로 <송신학성> 그림, 창덕궁 내전의 벽화 제작에 참여 1923년 동연사 조직 1923년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모연募煙> 입선 1925년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 3등상 수상 이후 연속 10회 특선 1928년 이광수의 역사소설 <단종애사> 삽화 1934년 조선미술연구회 설립기념 소품전 출품 1934년 <신동아> 28호에 담배 케이스에 관한 수필 기고 1936년 동아일보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감옥생활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위원 1949년 홍익대학교 교수 /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1953년 국방부 종군화가단 1956년 제5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1960년 제2대 예술원 종신회원 1961년 홍익대학교 명예교수 1962년 대한민국문화훈장 대통령상 수상 1963년 3·1문화상 본상 1966년 서울특별시문화상 1972년 신경성 노환으로 타계
예술활동
초기 청전의 작품은 스승 안중식을 매개로 고전적 규범 답습에 주안을 두었으며, 그 중에서도 전통회화의 중심이던 산수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점차 새로운 화풍의 개척을 주도하여 주변의 실물 자연경관을 서구식 사생 수법을 도입하여 그 외관과 정취를 수묵담채의 전통적인 재료와 필묵법으로 나타내는 시도를 한다. 동서양의 미술을 융합시킨 이러한 사경산수화로의 개량화 작업에서 서양화식 조형수법을 체득하고 응용하는 데는 1925년 초부터 손대기 시작한 신문소설의 삽화제작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본다. 이상범은 이와 같은 새로운 조형성과를 토대로 제작한 작품들을 조선미전의 동양화부에 출품하여 1925년도에 3등상을 수상한 것을 필두로 연속 10회 특선의 대기록을 세우고 최초의 추천작가에 이어 심사참여의 영예를 안게 된다. 또한 신문 삽화가로서도 명성을 높인다. 그리고 1933년경부터 운영하던 ‘청전화숙(靑田畵塾)’을 통해 후진 양성에도 좀 더 힘을 쏟아 배렴, 이현옥, 정용희, 심은택, 심형필 등 조선미전에서 특·입선하는 작가들을 배출하고 자신의 화풍이 확산되는 보람을 맛보기도 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이상범은 금강산의 정취와 기상에 감명받아 사실감을 높이기 위해 기존처럼 미점(米點)과 갈필 덧칠과 가는 단필마준의 집적에 의존하던 다소 획일적이고 단조로운 수법에서 탈피하여 각 경물의 특질에 맞는 다양한 필묵을 구사하면서 수묵화 기법의 여러 효과에 대해 다시 눈뜨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새로운 모색은 8·15해방과 더불어 본격화되어 화면은 반점 모양의 짙은 묵면과 짧은 필획이 액센트 구실을 하면서 맑고 투명한 담채 효과와 어우러져 성글면서도 보다 활기찬 분위기로 변모되어 갔다. 그리고 1950년대 초반 피난시절의 궁핍 속에서 ‘청전양식’의 개화를 향해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 시기를 통해 무엇보다 제재에 있어서 조선미전의 주류를 이루었던 전답이 보이는 대관적(大觀的)인 향토경에서 탈피하여, 1930년대 중엽을 전후하여 신문에 주로 게재한 바 있는 자연과 인물이 함께 등장하는 소묘풍 계절그림을 확대하여 즐겨 다루기 시작한다. 이러한 관점과 함께 이상범은 더욱 완숙해진 기량 등을 토대로 하여, 1950년대 초에 기존의 발전 맥락에서 질적인 전환을 시도했던 작품을 ‘청전양식’이라는 독보적인 경지로 완성시키면서 근대 한국산수 화풍과 풍토미의 한 전형을 창조해 낸다. 이 무렵부터 우리나라 산천 어디서나 본듯한 평범한 야산과 둔덕,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과 들판, 맑은 계류와 정감어린 수목들과 이처럼 소박한 자연을 무대로 성실히 일하며 강인하게 살아가는 순박한 촌부의 모습이 사계절의 변화 속에서 서정세계를 대변하고 우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환기물로서 정착된다. 이와 같이 경물들이 우리 모두의 정서와 삶을 배태시킨 고향과 같은 친근감을 주는 한국적 정취의 모태로서의 의의와 함께 각박한 세상과 고단한 삶을 순화하고 위로해 주는 안식처와 이상향으로 다루어지면서 현실경보다는 이런 관념을 충족시키는 보편경으로서 정형화를 이루게 된 것이다.
대표작품
<초동>(1926) <조(朝)>(1954) <산수화>(1955)
평론
생활이나 성격이나 교양이나 혹은 취미 같은 것을 투철히 모르고서 한 작가를 논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인지를 모른다. 작가를 논함에 무엇보다 중요한 조건은 그의 작품의 과학적인 비평보다는 그의 인간으로서의 전면을 음미해 보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견해일 것이다. 내가 지금 우리의 유일한 화가 청전을 말하려 함에도 마땅히 이러하여야 하겠거늘 그러나 불행히 나의 청전론은 여상(如上)한 여러 조건을 구비치 못함을 유감으로 여긴다.(……) 무릇 화가가 되는 데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할 것이니 예술에 대한 양심과 열애와 고집인 것이다. 이 셋 중에 하나만이라도 결할 때는 그의 예술은 성가할 수는 없다. 예술에 대한 양심이 없이는 첫째 화격을 갖출 수 없고 예술을 열애하는 근면과 노력이 없이는 대성할 수 없고 예술에 대하여 고집하는 바가 없고서는 자기의 세계를 창조하지 못한다. 그런데 청전은 이 세 가지 요소를 갖추고 있다. 그의 세사에 대하여 말없고 원만한 성격은 그의 예술의 본질을 결정했고 기자생활하는 여가를 얻어 꾸준히 노력해 온 것은 그가 얼마나 예술을 열애하였는가를 반증하는 것이요, 그 수묵이 임리(淋漓) 유원(幽遠)한 화풍은 그의 대통 같은 고집이 아니었던들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잠깐 청전화풍의 특징을 살피면 그는 남화계의 계승자이면서도 남화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선을 구사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선을 자유로 구사할 재주를 갖지 못한 작가다. 그의 전 화면은 대소의 미점만이 혼혼연(渾渾然)하게 늘어서 있어서 그것이 산이 되고 골이 되고 혹은 이지러져가는 초가집이 되고 혹은 소조한 나무들이 되고 또 혹은 초부가 되곤 한다. 그는 화재를 곧잘 모연에 어린 황한적막(荒寒寂寞)한 산간소로(山間小露)에서 취한다. 그가 그리는 산은 웅대하되 뼈대 없는 부드러움을 감춘 듯한 산이며, 이 산과 산들 사이로는 흔히 좁다란 산길이 외로운 초부를 데리고 양장처럼 꼬부라져 사라진다. 때로는 청전도 거울 같은 수면을 그리고 그 위로 한 잎 쪽배를 띄우는 풍류가 없는 바 아니지만 그러나 십중팔구 그의 구도는 천편일률로 똑같은 양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혹 매너리즘이라고 공격하는 이도 있고 너무 보수적이 되어 창작적 정신이 안 보인다고 하는 이도 있지만(사실 이것이 청전의 큰 결점이기도 하나) 아무튼 우리는 청전의 화면에서 옛날 서당취미를 연상하게 되거나 혹은 도포자락 길게 늘인 선비님을 만난 듯 한 순수한 조선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말하자면 이것이 곧 청전의 독자의 세계인 것이다. 청전이 선전(鮮展)의 초창기에서부터 연달아 특선을 거듭할 때 세인은 모두 그 작품이 어느 점이 특선될 곳인가를 의심한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심사원은 진작부터 이 특이한 조선 사람의 예술 감정이 붓끝으로 나타나 있는 것을 무엇보다 반가워하였던 것일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전람회장에서 자기네의 길이 어느 곳에 있는지를 밝히지 못하고 남들이 만들어 놓은 예술을 그대로 추종하지 아니치 못하는 경우에 있는 우리 작가들로 더불어 비탄함을 마지않는 것이거니와 이렇게 혼미한 세대 가운데서 유독 청전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바른 길을 확고히 붙잡고 왔다는 것은 진실로 우리의 공통된 자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는 청전의 화경을 결코 위대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청전만큼 자기의 세계를 순수하게 개척한 사람이 없다는 데 찬사는 불석(不惜)하는 바이다. 그는 일찍이 심전 안중식 문하에 사사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화면에서 털올만큼도 심전의 화법을 그대로 전수한 곳은 없다. 오히려 화보식인 그야말로 매너리즘의 화가라 할 수 있으나 청전에 있어서는 그 평원한 취재로부터 고갈한 점획과 유원한 발묵법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청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 (……) - <화단춘추>, 김용준, ‘청전 이상범론’
작가의 글
나의 화실: 전 생활을 여기에서 모색 누하동 오가리(五街里) 구불구불 구부러진 골목길 막바지에 조그마한 화실 하나 장만한 지도 벌써 십여 년이 되었다. 나는 이 화실의 장치에 대한 관심보다도 내가 이 화실에서 작품을 구상하고 제작하기 위해서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에 무엇보다도 행복감을 느낀다. 참으로 나의 이 조그마한 화실은 나의 모든 창조적인 계기를 계시해 주고 정리해주면서 실현에 옮겨주는 유일한 일터이다. 나의 모든 생활과 생명이 이 곳에서 이루어지고 이 곳에서 모색된다. 나이 육십이 가까워 가니 사고방법과 화풍이 젊은 사람들과 자연히 달라진다. 그러나 나는 항상 낡은 형식에 그대로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진격(進擊)하도록 모색하는 과정에 있다. 이러한 모색이 나의 화실의 최근의 분위기다. 나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현대를 이해하고 현대를 연구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나라의 고유한 민족성을 토대로 해야 한다고 본다. 어떻게 하면 서양사람과 또는 중국이나 일본과도 다른 우리나라의 독특한 정취를 나타낼 수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화실의 창 너머로 물건 팔러 온 여인이나 또는 시골사람들이 지나가다가 구경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반드시 그 분들에게 “이 그림을 보시고 어떻게 느끼십니까” 하고 그 감상을 물어본다. 이리하여 어떠한 사람이라도 우리나라의 것이라고 느껴질 수 있고 알아볼 수 있는 그러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나타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 정서가 어떻게 하면 현대라는 이 시대에서 창조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내가 지금 화실에서 모색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나는 이 화실에서 이와 같이 하나의 새로운 것을 우리의 고유한 전통 밑에서 찾고 연구해 나아가려는 학도의 마음을 갖는다. 이러한 마음이 나를 항상 젊게 하고 언제나 진격한 작풍을 갖게 하며 또 앞으로도 내가 더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북돋워 주는 것이다. 아직 한 번도 갖지 못한 개인전을 나는 또 이 화실에서 꿈꾸어 본다. 참으로 단체전에 비해서 개인전이란 한 작가를 온전히 알 수 있을 것이며 또 그 작품의 진가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개인전을 퍽이나 어렵게 보게 되고 좀처럼 열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일생에 한 번은 반드시 가져 보겠다는 꿈이 살아 있다. 그것이 앞으로 1년이 될지 2, 3년이 될지 모르나 꼭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개인전은 그 작가의 생명과 생활의 숨김없는 결정체를 그대로 내놓게 되기 때문이다. - <조선일보>, 1955년 6월 24일(전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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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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