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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렴(裵濂)

예술가명
배렴(裵濂)
구분
동양화가
생애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의 화숙(畵塾)에서 전통화법을 공부하였고, 1929년 제9회 서화협회(書畵協會) 전람회에 처음으로 <만추(晩秋)>를 출품한 뒤 1936년 서화협회의 마지막 전람회까지 해마다 출품하였다. 1930년부터는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도 출품하여 입선하였고, 1936년과 1943년에는 <요원(遼遠)>과 <산전(山田)>이 특선에 올랐다. 이 시기의 전람회 출품작들은 스승 이상범의 화풍을 본받은 수묵담채로 주로 향토적 풍경을 그렸다. 1940년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고, 1942년부터 1943년까지 청전화숙(靑田畵塾) 동문전에 참가하였다. 광복 직후에는 이응로, 장우성, 이유태, 조중현 등과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조직하였고, 1946년 3월 첫 회원 작품전을 개최하였다. 1947년 미군정청 문교부가 개최한 전국종합미술전의 심사위원을 지냈고, 1949년에 시작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처음부터 추천작가·초대작가로 참가하였으며 1953년부터 1967년까지 동양화부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강사와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교수를 지냈다. 1963년 대한민국문화훈장국민장, 1964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67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중년 이후에는 온화하고 유연한 필치로 산수화와 화조화를 그려 전통적 화풍을 실현하는 데 노력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하경산수도>, <녹수청산(綠樹靑山)>(1943), <부귀장춘>(1943) 등이 있다.
약력
1930년~1944년 제9회~23회 조선미전 특선 및 무감사입선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1945년 대한미술협회 상임위원 1948년 문교부예술위원회 미술 분과위원 1949년~1961년 제1회~10회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1956년 미술가협회 최고위원 1964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65년~1968년 홍익대 교수 1970년 유작전, 신세계화랑 1978년 회고전, 신문회관 1986년 한국화100년전, 호암갤러리 1992년 한국현대미술의 한국성모색IV부전, 한원갤러리 1998년 한국근대미술: 수묵·채색화-근대를 보는 눈, 국립현대미술관
예술활동
제당(霽堂) 배렴은 이상범에게 사사했으며 수묵을 중심으로 한 남화산수를 다루어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작품에는 그의 은둔적인 생활과 삶이 그대로 드러난다. 배렴은 사경에 바탕을 둔 새로운 남화를 줄곧 시도하였으며 준법보다는 농담의 조절을 통해 조용하고 그윽한 산수의 분위기를 전달하고자 하였다. 1950년대 산수도에서 보여지는 화면구성은 절제된 간결한 필치로 남화의 유연한 분위기를 잘 나타내며 특히 근경과 중경 그리고 원경의 원근법이 먹의 농담을 통해 정확히 드러난다. 화면 전체로부터 주지적이며 정적인 화가의 고요한 품격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하며 서양화에서 나타나는 대기 원근법에 의한 효과, 즉 보여지는 화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지속될 듯한 공간감의 연출이 돋보인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한국의 산세를 농묵의 대비와 간결한 생략법 그리고 여백을 통해 보여준다.
대표작품
<산수>(1953) <하경산수>(1958) <강촌>(1960)
평론
흔히 말하기를 사람의 가치는 죽고 나야만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예술가의 평가도 그 작가가 죽음으로써 정확한 평가를 할 수가 있다고 본다. 또 사람에 따라 그 예술제작을 단시일 내에 이룩하는 단거리형의 천재가 있는가 하면 인생의 중년에 완성하는 중거리형과 그리고 장수를 누리면서 그야말로 완숙의 경지에 이르는 장거리형 등이 있다. 이렇게 볼 때 제당 배렴은 확실히 중거리형에 속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57년이라는 생애 속에서 꾸준한 노력과 치밀한 자기추진에 따라 살아온 그의 발자취가 그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주지적이고 정적인 작가로서 그의 선비다운 진중한 몸가짐과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고요한 품격은 그의 생활에서도 엿볼 수 있거니와 그의 작품 속에서도 보이는 특징이다. 한결 같은 그의 수묵산수에의 집착이나 탐닉은 그가 양의 예술가가 아니라 질의 예술가라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며, 그가 체계적으로 주지적, 정적인 작가라는 것을 나타낸다. 1911년 경북 금릉에서 태어난 제당은 6남매 중의 장남으로 인습적 풍속에 따라 15세에 결혼을 했다. 그가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란 전부터 공부하고자 한 서예연구의 한 부산물이라고도 한다. 1928년 그가 17세 때에 단신 서울로 올라와 서예와 사군자 공부를 할 무렵 사사한 분이 곧 청전이었다. 그 즈음의 한국화단은 아직도 조선조적인 미의 세계를 무비필적으로 이어받아 남종산수와 실질적인 대상 처리로써 아직도 자아를 발견하지 못하는 그러한 세계를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러한 저조한 전체 분위기 속에서도 근대적 접근으로 새로운 세계를 접근하려는 새로운 작가들이 조용히 태동하고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이상범의 문하생으로 화업을 시작했고 그와 같은 수묵산수 속에서 미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화가 배렴의 경우를 통하여 20세기 전반기의 한국 동양화의 흐름을 알아볼 수 있다. 1945년 광복 이후, 그는 많은 미술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예술활동과 그의 생애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예술원 회원, 홍익대 교수, 국전 심사위원, 문화재 위원 등 이 나라의 미술가로서 누릴 수 있는 온갖 최고의 영예 속에 살다가 갔다. 이같이 그는 1945년 이후 여러 미술 단체에 참여하여 미술운동의 핵심에서 활동하였고 이 현상은 그가 일생을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의 인격으로 보면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한 선비형의 인간이지만 그는 그러한 밀실에서 나와 늘 전체의 핵심구성원으로 지냈는데, 이 사실은 아마 그의 소년시절의 환경이 작용한 오오더리티에 대한 콤플렉스의 발현이라 추리되기도 한다. - ‘수묵산수에 탐닉한 선비형 화가’, 박용숙(미술평론가)
관련도서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선집 배렴>, 문선호 편, 금성출판사, 1979
관련사이트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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