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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호(金殷鎬)

예술가명
김은호(金殷鎬)
구분
동양화가
생애
1892년(고종 29) 인천에서 출생하였다. 안중식, 조석진을 사사하고, 한말 최후의 어진화가를 지냈다.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 등에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상하며 등단하였다. 1920년 후반부터 화실을 개방하였고 동경 유학을 떠나 동경 미술학교를 3년 수학하고 한국에 돌아와 1936년 ‘후소회’라는 미술 단체를 창립하여 후진을 양성하며 한국 회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937년 친일 미술인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 평의원이 되어 같은 해 11월 일본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리는 한편, 1942년부터 2년간 반도총후미술전 심사위원을 맡아 친일 활동을 하였다. 광복 후에는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추천작가, 1955년 국전 심사위원을 거쳐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 명예교수를 역임했다. 1962년 서울특별시문화상, 1965년 3·1문화상, 1968년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받았고, 196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작품으로는 <승무(僧舞)>, <간성(看星)>, <향로>, <군리도(群鯉圖)>, <춘향초상>, <충무공 이순신 초상> 등이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인물·화조·산수 등 폭넓은 영역을 다루었으나 특히 인물화를 많이 남겼다. 선전 1회에 출품한 <미인승무도(美人僧舞圖)>를 비롯하여 주로 인물 소재를 다루면서, 종전 스타일과는 다르게 선묘를 억제하고 서양화법의 명암과 원근을 적용하였다. 전통 화법에 일본화의 사생주의(寫生主義)를 흡수하고, 또 양화풍의 화법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인물화 외에 수묵담채의 산수풍경, 문인화에서도 독특한 필력을 발휘하였다.
약력
1892년 경기도 인천 출생 1912년 조선왕실 역대황제 어진 5위 제작 1915년 경성 서화 미술학교 회화과 졸업 1917년 이후 선전에 입선 특선 15회 1919년 3·1운동 참가 1923년 고려미술원 설립 1924년 동경미술학교 3년 수학 1925년 동경제국미술원 제8회 입선 1927년 광풍회전 입상 1930년 조선미술원 설립 1936년 후소회 설립 1956년 국전심사위원 역임 1961년 대한미술전람회 고문 역임 1962년 5월 문예상 심사위원 역임 1965년 3·1문화상 수상 196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68년 제13회 예술원상 수상 1970년 회고전, 신세계화랑 1973년 하와이 방문 1974년 한국 현역 원로작가 회고전 출품
예술활동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에게서 전통화법을 폭넓게 수학하여 일찍부터 특히 세필채색화에서 천부적 재능을 발휘했던 이당은 창덕궁 대조전 안의 동서 벽면에 백학도를 그린다. 이 그림은 전통적 수법과 고귀한 주제에 충실하며 특장의 채색화 기량을 최대한 발휘한 이 작품은 이당의 초기를 대표하는 역작이기도 하다. 인물화를 특히 잘 그렸던 김은호는 궁중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많은 초상화를 그렸다. 초기에 그렸던 작품 <간성>은 1927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으로, 시원한 방안에 앉아서 화투놀이를 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곱게 차리고 앉아 화투놀이를 하는 모습이나, 피우다 둔 담배 등으로 보아 여염집 여인의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여인의 무료함 만큼이나 시든 꽃, 생기 없는 댓잎, 새장에 갇힌 앵무새 등이 여인의 심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그는 1925년 일본에 건너가 3년간 체류하면서 신일본화풍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얼굴은 분을 바른 듯 희게 그리고 전체적으로 무척 화사한 느낌의 밝은 채색을 쓰고 있다. 주요 인물도는 <춘향영정>, <논개 영정>, <미인도>, <무희> 등이 있다. 화조화도 즐겨 그렸는데 문인화풍(文人畵風)의 전통적 묵매수법(墨梅手法)과 잘 조화되면서 전통계승의 독특한 형태를 이루어내고 있다.
대표작품
<노안>(1920) <미인도>(1935)
평론
(……)김은호의 이러한 새로운 사실적 재현 기술인 ‘사진회’ 수법은 시각이미지의 정확한 묘사력 증진과 함께 근대적 보편성을 추구하는 과학적 리얼리티 확장에 기여하는 의의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그를 근대 전통 회화 최고의 명수로 이름을 날리게 했다. 1912년 서화미술회화과에 입학한 지 21일 만에 순종의 초상사진을 모사하고 ‘인물 잘 그리는 천재’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으며, ‘사진회’ 수법을 깜짝 놀랄만큼 ‘기묘절묘’하게 구사하여 충격적인 사실감과 함께 장안의 화제가 되면서 30대에 이미 ‘거장’으로 호칭될 정도로 명성이 높아졌다. 김은호는 이와 같은 초상 화가로서의 직인적 기량을 심화시키는 한편, 근대적 창작 미술의 공개 제도로 새롭게 유입된 전람회에 ‘신작품’을 출품하면서 ‘신미’한 경향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1922년 창설된 식민지 정부였던 총독부 주최의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를 통해 메이지기의 미학적 이슈 또는 이상적 미의 추구와 결부되어 부각된 미인화와 화조화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화목의 ‘중앙’화풍인 일본 관전의 신일본화풍을 수용하여 채색화 분야 전통회화의 개량화에 앞장섰으며, 자신의 특기와 지방색(조선색)을 가미하여 조선식 일본화를 재창출하였다. 김은호의 이러한 화풍은 그의 화실인 낙청헌 출신의 백윤문과 장우성, 김기창, 이유태 등의 ‘동양화’ 2세대를 통해 전수되어 조선미전 동양화부의 관학풍으로 중추적 구실을 하기도 했다.(……) 김은호의 사진영상식 초상화는 시미즈에 비해 전신상의 경우 배경의 공간 처리에서 일점 투시 원근법이 다소 미숙하게 구사된 느낌을 주지만, 안면 묘사에서는 훨씬 정교한 세필로 음영을 섬세하게 나타내어 당시의 세평처럼 사진보다 밀도있는 사실감을 자아낸다. (……) 미인들의 이미지는 투명한 비단 단선을 든 모습이나 속살이 살짝 비치게 다룬 얇은 저고리 입은 상체와 새와 벌레가 쌍으로 배치된 배경에서 청대의 사녀도 또는 기녀도의 춘정류 미인상을 부분적으로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는 눈매와 참외형 얼굴에 작은 입술을 특징으로 하는 동아시아 전통 미인도의 전형과는 달리, 쪽진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고 참빗으로 정결하게 빗어서 납작해진 머리부분 때문에 이마를 비롯해 얼굴이 몸에 비해 다소 크고 각지게 보이며, 눈이 크고 입술 양끝도 비교적 길게 묘사되어 있어 청대의 병태 미인상을 비롯한 기존의 연약한 이미지에 비해 강인한 느낌을 준다. 흑백사진에 채색을 입힌 것처럼 다소 경직되고 어색해 보이는 이러한 미인상은 초상화의 차원에서 사진영상식으로 처리한 데 기인되기도 하지만, 일본과 중국의 근대 초기에 유행한 착색 사진과 석판 광고포스터의 미인 이미지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 - <이당 김은호의 삶과 예술>, 홍선표(이화여대교수, 한국근대미술사학회 회장), 인천광역시립박물관, 2003, ‘근대 채색화의 개량화와 관학화의 선두’
관련도서
<이당 김은호의 삶과 예술>, 인천광역시립박물관, 2003 <韓國近代繪畵選集 : 韓國畵>, 안중식, 금성출판사, 1990 <이당 김은호>, 박용숙, 藝耕産業社, 1989 <이당 김은호>, 이구열, 國際文化社, 1978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선집 김은호>, 문선호 편, 금성출판사, 1976
관련사이트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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