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임성남(林聖男)

예술가명
임성남(林聖男)
활동분야
발레
생애(약력)
임성남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임영규, 어려서부터 집에서 부르던 이름인 ‘성남’을 공연장에서 우연히 쓰게 된 것이 예명이 되고 말았다. 아홉 형제 중 네 번째로 위로 딸만 셋이 있는 장남으로 전주사범학교를 다니던 임성남의 포부는 음악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4학년 때 전주 도립극장에서 한동인(韓東人)발레단 공연을 보고, 움직임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의 제자가 되었다. 첫 발표회를 가진 것은 1947년 부민관이었는데, 그의 나이 18세였다. 연습복이 없어 남대문 시장에서 미군 내복을 사다 검정 염색을 한 후 앞뒤 꿰매서 입는 등 모든 조건이 열악했으나 발레를 향한 열정만으로 버텨낼 수 있었던 시기였었다. 1950년 6월 한동인발레단 제5회 공연이 6·25 전쟁으로 중단되었고, 임성남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일본에서 백성규에게 사사받으며, 핫도리 시마다 발레단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핫도리 시마다 발레단에는 남자 무용수도 많았다. 그러나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공연 시작을 얼마 남기지않고 주역 무용수에게 사고가 생긴 것이었다. 순서를 모두 아는 사람은 무용단에서 임성남 하나 뿐이었고, 그 날 배운 순서와 동작은 집에 가서도 완벽히 외우고 연습하던 노력이 그렇게 그를 <세레나데> 주역으로 만들어 주었다. 귀국 후, 그는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며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1959년 임성남발레단 제 3회 공연 <회색인간>은 인간의 콤플렉스를 표현하는데 성공했고, 본격적인 모던발레가 무엇인가를 설명해주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1964년 제4회 공연에 민족발레를 만들어 보려고 실험작품을 선보여 왔던 그는 <허도령>을 공연했다. 1960년대 임성남의 전체적인 작품 경향은 주제면에 있어 민족적인 발레를 시도하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기간이다. 즉 발레의 새로운 정립을 모색하면서 우리의 전통적인 춤사위에 발레 테크닉을 접목시킨 한국적 창작 발레의 시도를 꾀하였다. 1974년 <지귀의 꿈>은 처음으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창작지원금을 수혜받았는데, 이는 전에 없었던 정부 지원의 차원이라는 점에서 무용사에 뜻깊은 의미가 있다. 1974년부터 임성남은 한국 관객들에게 서구 발레 재안무를 시도해 소개하기 시작하는데, <백조의 호수>를 비롯해서 <호두까지 인형>, <지젤> 등이 그 대표작들이다. 1960년대에 시도되었던 한국적 창작발레는 1980년대에 이르러 한층 고조되는 분위기가 되었다. 예술 창작활동의 지원이 정착되면서 작품 소재부터 국악과 양악의 접목, 의상의 색과 선 활용까지 고려하는 무용문화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임성남의 활동은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며 발레의 한국화 작업의 정착기였다고 볼 수 있다. ‘쉼없는 안무가’ 이기를 바랬던 임성남은 국립발레단 단장 생활을 마치고도 예술고등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가르치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2002년 거목 임성남은 ‘한국 발레계에 주춧돌 놓은 선구자’, ‘52년 외길 한국발레단의 산 역사’, ‘한국 발레의 대부’ 등 화려한 수식어를 뒤로 한 채 영면했다. 1949년 일본 도쿄[東京] 핫토리시마타[腹部島田] 발레연구소 수료 1951년 도쿄[東京] 일본음악학교 피아노과 수업 1954년 수도여자사범대학 교수, 도쿄청년발레단 창단 1955년 임성남발레연구소 설립 1959년 한국발레단 창단 1961년 한양대학교 교수 1962년 국립무용단 단장 1964년 서울예술고등학교 무용과장 1972년 국립발레단 단장 1974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1980년 한국발레협회 회장 1990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상훈
서울시문화상(1964) / 보관문화훈장(1980) / 대한민국예술원상(1986) /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92) / 대한무용학회 예술상(1999)
안무작
1959년 <회색인간> 1960년 <춘향전> 1961년 <일곱색의 바리아숑> <체스 플레이> <화씨 2400도> <아프리카 봉고> 1962년 <백의 환상> <쌍곡선> 1963년 <사신의 독백> 1964년 <허도령> 1965년 <제3의 영상> 1966년 <화려한 왈츠> 1967년 <까치의 죽음> 1970년 <콘체르트 1번> <예불> <파사카리아> <카리프소> <랩소디 인 블루> 1974년 <지귀의 꿈> <피아노 콘체르토 2번> <재즈콘서트> <막간> <클래식 바리에이션> 1975년 <공기의 정> <지젤> 한국초연 안무 1976년 <목신의 오후> <코펠리아> <카르멘> 1977년 <백조의 호수> 한국초연 안무 1980년 <호두까기 인형> <대비> 1981년 <처용> 1984년 <배비장> 1986년 <춘향의 사랑> 1988년 <왕자호동> 1990년 <고려애가>
리뷰
(……)임성남은 민속무용과 발레를 접목시켜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그의 연구소에서 김진옥을 통해 봉산탈춤을 전수하게 하였다.(……)한국춤은 상체 중심으로 곡선을 많이 사용하는 형식인 반면 발레는 하체 중심으로 직선적이고 감각적인 미, 우아함을 바탕으로 하는 미 형식을 갖는다. 또한 한국 춤사위와 발레는 근본적으로 원리가 다르므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임성남은 말한다. 이러한 작업은 단순히 우리의 것을 찾는다는 목적이 아니고, 시대적으로 보았을 때 6·25 이후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예술가의 의식 속에 우리의 문화예술을 찾자는 민족적 각성으로부터 온 무용가들의 굳은 의지와 신념을 갖는 미래지향적 창작활동이었다.(……) - <살아있는 춤 눈으로 쓴 시>, 김영태, 눈빛, 2004 (……)그의 창작작업에 대한 열정과 책임의식은 국립발레단의 창단을 이끌어, 1972년에 비로소 국립발레단이 탄생되었다. 임성남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노력에 의한 국립발레단의 출범은 우리나라에서도 발레가 하나의 무대예술로서 인정받는 계기가 됨과 동시에 한국적 현실을 감안하면서 발레운동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시기로서 우리나라 발레운동의 상징이며 발레정착의 이정표라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임성남의 정통발레 교육이 올바른 발레 기교를 심어 준 것은 물론 그의 국제적인 안무능력이 우리의 발레를 발전시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1972년 국립발레단 13회 공연 <공기의 정>, <발레학교>, <발레명작집>, <오줌싸게 향연>이었는데 임성남의 그랑주테와 아다지오는 우리 무용계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 <국립극장 30년>, 중앙국립극장, 1981 (……)한국적인 소재로 임성남이 안무한 작품으로는 1980년 국립발레단 제27회 공연이었던 <대비>가 있는데 한국춤의 테마와 리듬을 추상적으로 살려 음악에서 느끼는 인상을 발레로 표현한 작품으로 음악악기 편성의 대비가 돋보였다. 1981년 제28회 공연에는 우리나라의 탈을 도입해서 3막 7장의 <처용>이라는 작품이 김희조 작곡, 김동진 미술, 최성학 의상으로 이뤄졌다. 이 작품은 삼국유사의 처용설화를 소재로 한 창작발레로 <허도령>, <예불>, <지귀의 꿈>, <사신의 독백>에 이어 그의 다섯 번째 창작발레로써 발레를 우리의 것으로 정립시켜 보려는 그의 집념의 결실을 의미하는 공연이었다. 1984년에는 <배비장>이라는 3막 9장의 작품을 안무했는데 이는 서구적 시선이나 관점을 과감하게 탈피하고 발레기법을 수단으로 한국의 고전인 배비장을 발레화한 작품으로 이를 코믹하게 엮은 일종의 코믹발레였다. 1986년 아시안게임 문화예술축전 행사에서 임성남 안무, 국립발레단 출연의 <춘향의 사랑>은 고전 춘향전을 발레화 한 작품으로 발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환상적이고 추상적인 면을 살리면서 한국적인 배경과 바탕, 민족적인 감각과 정신을 가미시킨 것인데 이 작품의 특이사항은 꼭두각시와 탈춤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이에 세계무대를 겨냥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 <서울신문>, 1986년 9월 11일
관련도서
<살아있는 춤 눈으로 쓴 시>, 김영태, 눈빛, 2004
연계정보
-지귀의 꿈
관련사이트
대한민국예술원
관련멀티미디어(전체0건)
이미지 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