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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숙(金文淑)

예술가명
김문숙(金文淑)
활동분야
한국무용
생애(약력)
무용가 김문숙은 선천적으로 무용예술에 걸맞는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음인지 자신의 무용인생을 안무가보다는 무용가로 불리어지기를 더 바랬다. 그래서 한국민속예술단(현 국립무용단) 시절부터 춤을 만드는 일보다 묵묵히 춤꾼으로 무대에 서길 고집했다. <별의 전설>, <심청전>, <왕자호동> 등 국립무용단의 주역은 물론이며, 해외공연에서 살풀이, <사랑가> 등을 추면서 한국의 ‘마크 폰테인’이 되기를 희망했다. 어린시절 문학도를 꿈꾸던 그녀는 뜻밖의 장소에서 무용가 함귀봉(아동무용, 교육무용전공)의 눈에 발탁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엉뚱한 길’로 들어서게 된다. 학교 연극 속의 무용장면을 맡아 무대에 선 어느 날, 예술가 양성문제를 놓고 고민하던 함귀봉의 눈에 띈 것이다. 1947년 곧바로 당시 명동 소재 함귀봉교육무용연구소의 전신인 ‘조선교육무용연구소’에 입소하여 체계적인 무용학습에 들어갔다. 그 밖에 진수방으로부터 발레를, 장추화에게 인도무용을 그리고 김막인의 연구소에서 현대무용 기본 등을 배우며 그녀의 기본기는 탄탄해져 갔다. 그러던 중 6·25를 겪게 되어 부산으로 내려간 김문숙은 그곳에서 최승희의 반주자로 알려져 있는 박성옥을 만나 그를 통해 한국춤과 장단을 배울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그녀의 무용세계는 한국무용으로 정착하게 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연주할 북조차 구하기 힘들어 잡지나 종이무더기를 묶어 연습을 대신했던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김문숙은 단순히 습득한다는 것을 뛰어넘어 체득한 리듬에 어릴 적 배웠던 피아노 리듬을 접목시켜 자신만의 북 리듬을 만들어내는 열성까지 보였다. 이 장단은 1960년대 파리공연에서 절찬을 받았던 <구고무(九鼓舞)>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또한 박성옥으로부터 승무, 검무, 화관무와 민속무용 등을 배웠으며, 이 외에 박금슬, 김보남에게도 무용을 배워 한국창작 무용뿐만 아니라 전통무용까지 그 영역을 넓혀갔다. 1960년 일본 도쿄 공연을 앞두고 그녀는 무용인생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스승인 조택원과을 만나 백년가약을 맺는다. 두 사람은 함께 무대에 설 기회는 없었으나 조택원이 유명을 달리하기 전 그의 예술적 업적과 가치를 이어가기 위해 대표작들을 전수받는데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1992년 <가사호접>이 명작무로 지정 받는 것을 계기로 조택원의 유작들을 발굴, 보존하려는 목적 아래 김문숙을 주축으로 한 ‘서울춤아카데미’가 1993년 결성되었고 그 맥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임무는 여전히 김문숙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1950년 중앙대학교 교육학과 4년 중퇴 1974년 동국대학교 개발대학원 사회교육과 수료 1954년 김문숙 무용예술학원 개설 1974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무용과 강사 1990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직무대행) 1990년 서울춤아카데미 회장 1994년 한국무용협회 고문 1996년 국립중앙극장 명예 종신단원 위촉 1997년 국립중앙극장 국립무용단 자문위원, 무용원로원 회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상훈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1973) /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예술공로상(1991)
대표작
1958년 <성황당> <모란등기> <수궁가> <대궐> <승무> 1960년 <살풀이> <귀의> 1962년 <구고무> 1970년 <무영탑> <가사호접> 1971년 <처녀총각> 1973년 <별의 전설> 1975년 <만종> 1980년 <심청전> 1982년 <썰물> 1990년 <황진이> 1995년 <황혼의 노래> 그 외 조택원 위작 중 <신노심불로>, <춘향조곡> 등 발굴 재현(연도미상)
창작노트
(……)한영숙 선생님하고도 몇 번 같이 갔는데, 내 스승이자 선배이자 동료라면 우습지만 하여간 같이 활동을 많이 했는데 내가 그 양반을 참 존경하는게, 공연 가면은 내가 솔로를 꼭 해. 피날레로 농악을 하는데 농악에는 모두 다 나가니까 옷 갈아입는 시간을 위해서 솔로를 꼭 해야 해. <승무>는 너무 무거우니까 <살풀이>를 하는데 공연 같이 가면 “이번에 나 뭐하지” 그러면 한영숙 선생님이 “얘, 너는 <살풀이> 해라. 니가 그래도 제일 무대에서 크고 <살풀이> 모습이 좋으니까 니가 해라” 그러셔. (……) 내가 그 고마움을 안 잊어버려. “어딜 니가 내 앞에 살풀이를 춰” 해야 할 텐데 그게 아니야. 미국 가서도 유럽 가서도 그렇게 배려를 해 주시더라고. 근데 내 <살풀이>를 한 선생님하고 똑같이 안추는 게, 그 때 배운대로 추니까 조택원씨가 공연을 보시더니 날보고 그래. 너는 창작춤을 추는 사람이다 그 말이야, 이수자가 아니니까. 뭔가 너의 마음을 여기다 넣어라, 그러면 오리지날은 한영숙 <살풀이>지만 김문숙의 <살풀이>가 된다. 너는 창작하는 사람이란 걸 확실히 하라고 그러시더라고. 그리고 조 선생님 말씀이 한국춤에 좋은 가락을 너무 많이 붙여놓으니까 입맛을 모른대. 좋은 가락을 요소요소 집어넣어야지 포인트가 된다고 강조하셨거든. 그래서 내가 거의 비슷하게 하면서 수건을 던지는 장면에 변화를 주었어. 한영숙 선생님은 던져가지고 거기서 그냥 집으시거든 근데 나는 수건을 애인으로 상징을 해 추다가 던질 때 이별로 생각하고 크게 원을 돌고 다시 갈까말까 하다가 다시 집어서 춤을 추는거야. 그랬더니 조 선생님이 “됐다”고 하시더라고. 무대를 크게 활용하고 정지와 동작의 강약을 넣은거야.(……) - <월간 몸>, 문애령, 2000년 5월호, ‘춤과 사람들’
리뷰
(……)그러한 큰 예술가의 아낌없는 지지는 ‘김문숙류 살풀이’를 만들게 하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김문숙은 단순히 살풀이 사사에서 머무르지 않고 그 자신만의 것으로 재창조하는 뛰어난 감각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계기에는 창작춤을 추는 사람이니만큼 있는 그대로의 전수가 아닌 자신의 내면을 불어넣어 새롭게 재창조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택원의 충고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작을 가능한 한 그대로 보존하면서 여기에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그의 사상을 적절하게 불어넣어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청아함을 돋보이게 하였다. 이 작품은 사랑과 이별 그리고 해후를 살풀이 수건과의 대화체 형식으로 풀어가면서 수건은 단순한 소도구가 아닌 인격으로 형상화시켰다. (……) - <한국예술총집-연극·영화·무용편 Ⅲ>, 안병주, 대한민국예술원, 2000
관련도서
<한국예술총집-연극·영화·무용편 Ⅲ>, 안병주, 대한민국예술원, 2000 <몸>, 월간 몸, 2000년 2~5월호 <서원, 김문숙의 춤의 관점>, 오율자, 대한무용학회, 2001 <한국현대무용사의 인물들>, 문애령, 눈빛, 2001
연계정보
-영은 살아 있다
-무용극 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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