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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무용가

예술가명
한국의 무용가
활동분야
한국무용
개요
은 이렇게 만들어 진 것이다. 당시의 춤 교육의 대부분은 무용연구소에서 이루어졌으며, 각 지역에서는 권번 출신과 민속 연희자들이 춤 교육을 주도하였다. 1953년 가을부터 박외선은 이화여대 체육과 무용전공 교수로 재임하였으며, 김천흥과 김보남이 이화여대에서 한국무용을 가르쳤다. 1960년대 춤계에서는 무용계가 안고있는 영세성을 탈피하고자 국립무용단을 건설하였다. 1962년 소공동의 중앙공보관에서 결단식을 가졌으며, 단장은 임성남, 부단장은 김백봉, 송범이고, 단원은 강선영, 권려성, 김문숙, 김진걸, 이월영, 이인범, 정인방, 조용자, 주리, 진수방 등 13명 이었다. 창단공연은 임성남 안무의 <백의 환상>, <쌍곡선>과 송범 안무의 <영은 살아있다>였으며, 이 단체는 차후에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으로 이원화된다. 1968년에는 멕시코올림픽 파견 한국민속예술단을 구성하여 우리 무용이 세계무대로 나갈 수 있는 획기적인 기회를 갖게 된다. 이때 조택원을 중심으로 송범, 김백봉, 김문숙이 안무지도를 맡았으며, 공연 작품은 <화관무>, <부채춤>, <검무>, <승무>, <무당춤>, <선의 유동>, <연가>, <농악무> 등이었다. 1970년대는 국립무용단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송범은 국립무용단에서 <별의 전설>,<왕자호동>, <춘향전> 등을 안무하면서 무용극을 본격적으로 시도한다. 그는 국립무용단을 통해 국수호, 정재만, 조흥동 등 춤계의 남성 리더를 길러냈으며, 박정목, 손병우, 차효영, 양성옥, 최정임, 이문옥, 김향금 등을 무용수로 키웠다. 한국 창작무용이 등장한 시기도 1970년대이며, 1977년 배정혜의 <타고남은 재>와 김매자의 <비단길>이 초기 창작춤이다. 문일지의 서울시립무용단과 한국무용아카데미, 김매자의 창무회가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한국무용에서 새로 시도될 창작은 이전의 신무용이 직면했던 한계를 타개할 해법으로 여겼으며, 1979년에 창설된 대한민국무용제는 한국무용 분야 창작춤에 대해 새로이 자성할 계기를 조성하였다. 1980년대는 창작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서울의 공간사랑과 창무춤터를 중심으로 활성화된 소극장 운동은 창작춤 인구의 저변을 확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김매자, 문일지, 배정혜, 김현자는 한국 창작춤을 이끌어가는 ‘4두 마차’로 평가되었으며, 김숙자, 국수호와 채상묵, 김근희도 활발히 활동하였다. 또한 1887년 이후 제2의 창작춤 세대라 할 수 있는 윤덕경, 김영희, 강미리 등이 주목할 만한 작품을 발표한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김숙자가 이끄는 한울무용단, 리을무용단과 독립된 오은희, 김말애와 춤타래무용단, 박재희와 청주 새암무용단, 이청자가 이끌던 인천시립무용단, 인천 중심의 이은주무용단, 장유경의 다움무용단, 경희대 출신의 정은혜, 창무회 제2새대의 중요 멤버였던 김영희가 무트댄스를 발족시켰고, 한양대를 근거로 김운미가 무용단을 결성해 활동을 시작한다. 1990년대 한국 창작춤은 1980년대의 발전기와 달리 ‘주제의 심도’, ‘작품의 스케일’, ‘동참 한국 무용인의 수’에서 상당한 폭과 깊이를 갖게 되었다. 앞으로 21세기 한국춤의 과제를 꼽는다면, 보편화된 서구의 미학적 원리에 의해 가려졌던 우리 춤의 독자적인 원리와 특질을 실제화 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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