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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헤라 노아라

작품/자료명
에헤라 노아라
안무가
최승희
장르구분
1926년~1945년
출연/스태프
출연 최승희 스태프 안무 / 최승희
내용
조선고전의 관현편곡에 따라서 추는 춤이다. 조선 고유의 갓을 쓰고 관할한 장의를 입고 가는 끈으로 허리를 매고 지극히 유장하게 끝없이 웃어가면서 허리를 중심으로 신체를 좌우로 흔들고 숙이면서 추는 경쾌한 춤이다. 반도의 사람들은 주연석에서 술잔을 거듭하면 반듯이 일어서서 춤을 추는 것을 기초로 해 가지고 예술적으로 양화한 것이 이 작품이다.
최승희
최승희의 무용작품은 삼백열다섯 종목에 이른다. 최승희의 작품을 분석해보자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최승희의 작품은 세속적인 주제보다는 역사와 민족을 다루는 내용을 주제로 한 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한국춤이거나, 중국춤이거나, 일본춤이거나 춤들이 대개 민족적 배경을 깔고 있었으며 동양 정신을 강하게 풍겼다. 둘째로 최승희는 작품 이름을 조금씩 바꾸면서 무용 구성도 조금씩 달리하여 새로운 작품이 되게 하는 방법으로 그이 나름대로 개성이 있는 프로그램을 형성하였다. 이를테면 <보살춤>으로 살펴보자면 한국에서는 한국 팬들을 위한<보살춤>이 창작되었고, 중국 공연 때에는 중국의<보살춤>이라는 작품이 창착되었다. 이와 같이 <코리안 멜로디>의 작품이 두 가지에서 세 가지로, <무당춤>이 <쌍부채춤>으로,<검무>가 <쌍검무>로 일본의 <거리의 애인>이 한국의 <유랑 예인패>로, 일본의 <이게니에>가 <희생>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최승희의 무용 작품은 대략 31가지로 추산되는 작품들이 유사성을 띠고 있다. 셋째로 최승희의 작품은 시대적 환경과 공연 지역에 따라 거기에 맞는 무용 종목을 형성했다. 이런 것으로 보아도, 최승희는 한 곳에 생활한 것이 아니라 공연 위주의 생활을 하면서 작품 자체와 흥행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작품 <에헤라 노아라>, <보살춤>, <왕무>, <청춘>, <금지의 춤>, <가면의 춤>, <세가지 코리아 멜로디>, <승무>, <호니호로사>
리뷰
한 인간을 평가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평가의 대상은 많은 시간에 걸쳐서 관찰해야 접근이 가능하다. 그리고 인간 평가는 윤리와 도덕의 책임이 따라야 하기 때문에 함부로 하기가 어렵거니와 더군다나 흑백 논리로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최승희에 대한 재평가는 그녀의 예술을 재조명하여 바르게 기록된 역사를 만들어 보려는 것이다. 최승희를 정치적으로 평가하느냐, 예술가로 평가하느냐의 문제가 확실해야 한다. 최승희가 무용으로 세계적 인물이 되었지 정치가로서 세계적 인물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여자를 정치권에 집어넣어서 사상적 압박을 주는 평가를 한다면 그 예술의 본질과 특수성을 침해하게 되므로 이는 근본 출발이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를 평가하면서는 이데올로기 요소를 앞세우지 말고 그 예술가 노릇을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단순 논리의 사고에 빠져 부분 진리를 전체 진리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승희의 경우에 과거에 한국말고도 일본,중국,북한 네 나라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친일과 반일, 친공과 반공들의 행위가 교차되는 특수 상황에 살아야 했으므로 최승희의 행동을 평가하면서 그 어느 한 행위만을 보고 친일이다, 반일이다 하면 모순이 생길 우려가 충분히 있다. 따라서 최승희의 평가에는 이것을 예술을 해 가는 과정에서 생긴 이데올로기 교차로 보고 총체적 평가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최승희는 우리나라 예술사(무용사)에 기록되어야 할 업적과 공적을 세운 사람이다. 일제시대에서부터 해방이 된 뒤로 육십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춤꾼인 광대나 기생들은 사회에서 천대를 받았기 때무에 그 사람들에게 춤을 배우는 사람들은 극히 적었다.그렇기 때문에 한국 무용을 배우는 사람들은 그때에 무용연구소를 하고 있던 사람에게서 주로 최승희의 한국춤을, 아니면 이른바 동양 무용과 남방의 무용들을 배웠다. 이 중에는 일제 시대의 춤도 있었고, 북한에서 남하한 무용가들이 소개한 북한 창작 춤들도 있었다. 최승희의 근대 한국춤은 일제 시대부터 계속해서 젊은 무용가들에게 받아들여져 그것이 교육계말고도 국립무용단이나 직업무용단 그리고 무용콩쿠르에서 이른바 신한국 무용이라 해서 전파되어 갔던 것의 결과였다. 또 최승희는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경이로운 공연을 했고 동양 무용을 내세워 서양 무용에 도전한 앞서가는 예술가였다. 최승희가 동양 무용을 내세운 것은 서양 사람들의 관심을 모아 스스로 세계적 무용가가 되고자 하는 욕심과 무관하지 않았겠지만 동양 무용의 세계화를 이슈로 내세운 셈이어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할 수 있다. (참고:최승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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