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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원

작품명
우리의 소원
작곡가
안병원
개요
이 곡은 8분의 6박자, 내림마장조의 서정적인 가락이다. 노랫말에서 표출되는 간절한 소망과 겨레의 의지가 이 노래를 박력 있고 힘찬 노래로 불리게 한다. 작사자는 작곡가의 아버지로서, 부자 합작의 3·1절 특집 어린이 오페레타 <우리의 소원>에 들어있는 몇 곡 중에서 이 곡만이 오늘날까지 애창되고 있다. 참고: <한국동요음악사>, 한용희, 세광음악출판사, 1987
해설
이 노래는 1947년에 만들어졌다. 그 해 정월의 어느 날 서울중앙방송의 배준호씨가 동요작곡가이자 ‘봉선화동요회’ 지도자인 안병원씨를 찾았다. “얼마후 3·1절이 다가오는데 어린이시간 특집을 만들고 싶다. 좋은 게 없느냐…”는 배씨의 상의를 받은 안병원씨는 노래극을 만들기로 배씨와 의견이 일치됐다. 그런데 당시 방송국의 사정이 어려워 대본료를 줄 형편이 안됐다. 그래서 안씨는 아버지인 안석주씨에게 대본을 부탁했다. 안석주씨는 해방 전부터 삽화가,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으로 활동한 문화인이었다. 아들의 청을 받은 안석주씨는 25분짜리 노래극 대본 <우리의 소원은 독립>을 탈고한다. 그 주제가가 <우리의 소원>이었다. 우리의 소원은 독립 꿈에도 소원은 독립 이 목숨 바쳐서 독립 독립이여 오라 이 겨레 살리는 독립 이 나라 살리는 독립 독립이여 어서 오라 독립이여 오라
작사가
안석주(安碩柱, 1901~1950) 안석주는 1901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삽화가, 문필가, 영화감독, 서양화가, 무대장치 미술가, 미술평론가, 만화·시·소설·희곡·시나리오 작가 등 다방면에서 폭넓게 활동했다. 아호는 석영(夕影).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인 서울교동보통학교를 마치고 1916년 휘문고보에 입학한 그는 재학 중에 화가 장발 등과 함께 ‘고려화회’를 만들어 미술의 대가인 고희동으로부터 서양화 수업을 받았다. 졸업 후 일본 동경혼고의 양화연구소에서 미술 수업을 받던 중 건강이 나빠져 1921년에 귀국했다. 그 후 우리나라 만화의 대가인 김동성(천리구)으로부터 노수현, 이상범 등과 함께 만화를 배웠다. 동아일보에 연재 중이던 나도향의 소설 <환희>의 삽화를 맡아 우리나라 신문소설 삽화계의 선구자가 되었다. 1922년 1월 ‘백조’ 동인이 되었으며, 1923년 김복진·김기진 형제, 화가 이승만 등과 함께 활동했다. 안석영은 극단 ‘토월회’에도 가입, 신극 운동에도 참가하였는데, 1923년 9월 토월회 제2회 공연 때 <부활>의 ‘프류도프 백작’으로 분하여 박승희와 같은 무대에 섰었다. 1923년 모교인 휘문고보 미술교사가 된 그는 그 해 7월 ‘토월회’의 무대미술을 담당하였으며, 8월에는 김복진 등과 함께 ‘토월미술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작곡가
안병원(安丙元 1926~) 서울대학교 음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1945년 12월 어린이 노래 단체인 ‘봉선화 동요회’를 창설, 지휘하였다. 한국어린이 음악사절단 단장 겸 미국 순회공연을 가진 바 있으며, 숙명여대 강사를 지냈다. 보관문화훈장을 받았고, 현재 캐나다 토론토 YMCA 합창단 지휘자와 캐나다 한인상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다. 작품으로는 <우리의 소원>, <구슬비>, <푸른 바람>, <물방아>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안병원 동요 50곡집>, <석창 안석주 문선> 등이 있다. <한국작곡가사전1>, 한국예술연구소, 한국예술종합학교한국예술연구소, 1995
리뷰
“조선신보가 전한 <우리의 소원> 유래” 온 겨레가 애창하는 통일을 열망하는 노래 <우리의 소원>의 유래에 대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21일 소개해 관심을 끌었다. 조선신보는 동요작곡가인 안병원씨가 작곡하고 안씨의 아버지 안석주씨가 작사한 이 노래는 지난 1947년 3월 방송전파를 타게 되면서 처음 소개됐고 지난 1970년대 널리 퍼져 1990년대에는 온 민족이 애창하게 됐다고 전했다. 신문은 이어 이 노래의 원제목은 <우리의 소원>이며 남측에서는 <우리의 소원>으로 부르고 북측에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부르고 있는데 “북측에서는 ‘통일’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노래를 작사한 안석주씨는 지난 1950년에 사망했으며 작곡을 한 안병원(74)씨는 지난 1974년 캐나다로 이주해 현재는 토론토에서 살고 있다고 조선신보는 전했다. (……) 노래 <우리의 소원>은 당시의 복잡한 정세와 조선전쟁, 전후의 어려운 정세하에서 한 때 불온시 되어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960년 4·19 인민봉기 때 청년 학생들은 ‘독립’을 ‘민주’, ‘통일’이라고 바꾸어 <우리의 소원>을 불렀다고 한다. 1970년대 후반기에는 남조선 민주화 투쟁을 지원하는 재일동포청년학생들 속에서도 이 노래가 불리기 시작했다. 1989년 7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임수경 청년이 <우리의 소원>을 목청껏 부른 것이 계기가 돼 북측에서도 널리 애창되었다. 특히 1990년 8월에 판문점에서 진행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범민족대회를 계기로 1990년대 통일을 이룩하자는 북과 남, 해외 동포들의 통일열망을 반영하여 우리 민족 속에서 널리 불리게 되었다. ‘조선신보가 전한 <우리의 소원> 유래’, <연합뉴스>, 2000년 7월 22일
관련음반
<신나는 동요나라 135곡>, 블루마인드, 2005 <한국동요>, 선명회어린이합창단, 성음, 1976 <유치원 노래>, 현대음반, 1982 <오케스트라로 들어보는 우리동요>, 하나인터뮤직, 1994
관련도서
<안병원 동요 50곡집>, 안병원, 세광출판사, 1970 <석창 안석주 문선>, 안병원, 관동출판사. <한국동요음악사>, 한용희, 세광음악출판사, 1987 <한국작곡가사전1>, 한국예술연구소, 한국예술종합학교한국예술연구소, 1995
연계정보
-구슬비
관련사이트
한국동요음악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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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음악교육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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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음악협회
관련사이트
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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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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