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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려(金生麗)

예술가명
김생려(金生麗)
분야
지휘자
생애
김생려는 1912년 11월 25일 평안북도 영변군에서 1남 4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장로직에 있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교회를 접할 수 있었고, 특히 오르간은 그에게 큰 호기심의 대상이기도 했다. 부친은 김생려가 태어난 후 얼마 안되어 북청에다 교회를 짓고 이사함으로써 김생려의 어린 시절도 북청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오르간과 하모니카에 남다른 재주가 있어 틈만 나면 악기를 만지곤 했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음악에 대한 호기심은 계속되어 수업 시간에도 몰래 빠져나와 교회로 가서는 음악 속에 빠져들곤 했다. 그러나 그가 음악에 보다 구체적인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로 유학을 와 지금의 경복고등학교인 제2고보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는 규율을 잘 지키며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그 회오리바람이 제2고보에도 불어와 학생들은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몰려나갔고 김생려 역시 앞줄에 서서 만세 소리를 드높였다. 이 일로 인해 김생려는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었고 서대문에 있던 피어선선교학원에 피신하며 무기정학까지 받았다가 시말서를 쓰고서야 다시 복교했다. 그 후 졸업할 때까지 그는 특히 일본인 선생들로부터 문제아로 취급되어 졸업도 겨우 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학교 생활에서는 큰 변화 과정을 겪었지만 음악에 대한 열의는 계속 이어져 같은 교회에 있던 김형준의 소개로 세브란스 치과의사의 부인이며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였던 부츠 여사로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꾸준히 바이올린 레슨을 받아 이후 경성중앙관현악단에 바이올린 주자로도 참여했다.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독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계정식을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바이올린의 기초를 보다 본격적으로 다질 수 있었고, 계정식이 주도하는 현악4중주단에서 제2바이올린을 맡기도 했었다. 집안의 반대로 음악을 공부하는 데 어려움을 겪다가 현제명으로부터 연희전문의 입학 권유를 받자 연희전문 문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다니던 경성의전과의 운동시합에서 이긴 후 너무 기분이 좋아 밴드부 학생들과 함께 술을 마신 것이 탄로나 모든 책임을 지고 무기정학을 받게 되었다. 그에게 일본 생활은 일종의 방랑기였으나, 2년 후에 다시 귀국하여 연희전문에 복교하면서 경성중앙방송국관현악단에 자리를 얻었는가 하면 빅터레코드사의 전속악단에 바이올린 반주로 취직해서 스스로 학비를 벌 수 있게 되었다. 결국 그는 남들보다 2년이나 늦게 연희전문을 졸업했지만 학교에서도 채플 시간이면 바이올린 독주를 하는 등 음악인으로서의 활동을 쉬지 않고 계속했다. 김생려의 연전 시절은 마침 현제명이 미국에서 돌아와 연전음악부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시기였으며, 이때 김성태, 정희석, 이인범, 황재경 등은 그와 함께 음악부에서 활약했던 음악인들이다. 연전을 졸업한 후 경성방송국의 관현악단과 빅터레코드의 반주로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그러던 중, 미국에 있던 홍난파가 귀국해 경성방송관현악단을 확대하게 되자 악장직으로 들어가게 된 김생려는 홍난파와 음악적인 친분을 맺으며 열심히 일을 했다. 한편 이 시기에 김성태와도 친분이 두터워, 그의 집에 가서 화성학과 작곡법을 배우기도 했다. 얼마 후 홍난파가 병석에 눕게 되자 매일같이 홍파동 홍선생의 집을 방문하면서 홍난파 대신 방송국 일을 보는 가운데 홍난파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이때 홍난파가 그에게 한 충고는 일생의 좌우명이 되었는데 “자네가 꽃이 되려고 한다면 음악을 그만두고, 한 알의 씨앗이 되어 후대에 꽃을 피우게 하겠다고 한다면 음악을 계속하게”라고 하였다. 이 말은 그 후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큰 힘이 되었고 잊을 수 없는 귀한 길잡이가 되었다. 홍난파가 세상을 떠나자 김생려는 관현악단의 책임자가 되어 계정식을 지휘자로 초빙하는 한편 계속해서 연주 활동을 해나갔다. 그러나 방송국 측에서 일본인 지휘자를 초빙, 계정식을 몰아내려 하자 김생려를 중심으로 한국인 단원들은 완강히 반대에 나섰다. 그러나 결국 뜻이 좌절되자 그는 민간오케스트라를 만들기 위해 사표를 내고 1943년 후생실내악단을 만들어 전국을 돌며 순회공연을 했다. 특히 후생실내악단 창단에 함께 참여한 소프라노 김천애는 순회공연에서 가는 곳마다 <봉선화>를 불러 나라잃은 설움에 신음하던 청중들의 울분을 달래기도 했고, 이 때문에 왜경으로부터 감시를 받기도 했다. 1944년 만주 신경까지 간 후생실내악단은 그곳에서 신경교향악단에 모두 입단해 눌러앉게 되었는데 1945년 광복 직전에 현제명으로부터 다시 후생악단을 하자는 제의에 귀국해서 후생악단을 재정비하는 가운데 광복을 맞게 되었다. 광복 후 현제명이 김생려에게 새로운 오케스트라를 조직하도록 부탁해오자 김생려는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1945년 가을에 50여 명의 단원을 모집, 계정식을 지휘자로 한 고려교향악단을 창단했으니 광복 후 한국의 첫 오케스트라가 탄생된 것이었다. 이후 그는 여기서 나와 다시 서울교향악단을 창단해 악장직과 대표직을 맡아 김성태의 지휘로 1948년 창단 무대를 가졌다. 그 후 서울교향악단은 독일인 자코비가 상임지휘자로 취임, 많은 연주회를 했으나 그가 갑자기 독일로 돌아가게 됨에 따라 대구 공연부터 김생려가 지휘를 맡게 되었고, 이때부터 그의 지휘 편력이 시작되었다. 당시 서울교향악단의 인기가 대단해 연주회가 있는 날이면 청중들로 유리창이 깨어지는 등 대단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이처럼 여러 가지 난관을 무릅쓰고 서울교향악단을 키워낸 그였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오케스트라 운동에 대한 희망을 접고, 3개월을 공산 치하에서 숨어지내다가 9·28 서울 수복을 맞게 되었다. 수복 후 그는 음악인들을 모아 해군에 요청, 해군정훈음악대를 창단해 지휘자로 취임했고, 전쟁 중이었지만 해군정훈음악대는 당시 유일한 음악단체로서 음악인들에게는 일자리를 주었고 음악 애호가들에게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 후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김생려는 본격적인 지휘자로 활동하며 레오나드 번스타인과 유진 오먼디를 사사, 보스톤심포니와 필라델피아필을 지휘하기도 했다. 귀국한 후 1957년 11월 서울시립교향악단을 창단, 상임지휘자에 취임했다. 본격적인 교향악단 운동에 큰 희망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이어서 터진 4·19 학생혁명과 5·16 군사쿠데타의 소용돌이는 교향악단에도 영향을 미쳐 일부 단원들과 퇴직 단원들의 고소로 1961년, 반강제로 서울시향을 물러나게 되었다.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서울시향을 물러나기는 했지만 김생려는 상임지휘자로 있는 동안 서울시향을 이끌고 동남아 순회공연 등 국내외 무대에서 크게 활동했으며 이 땅에 오케스트라 운동의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공연
1947년 서울교향악단 창단, 악장 겸 지휘자 1957년 서울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1961년 예그린악단 창단 1962년 아리랑민족예술단 창단 1964년 아리랑민족예술단 미국순회공연 1976년~1992년 미국 남캘리포니아필하모니 상임지휘자 1995년 서울시립교향악단 창립 50주년 특별연주회서 애국가 연주
리뷰
1999년 7월 재단법인화하면서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서울시교향악단’(이하 서울시향)으로 이름을 바꿨다. 서울시향은 이미 일제시대부터 그 움직임이 있어오다가 8·15 광복과 함께 생겨난 고려교향악단이 시발점이 된다. 1945년 9월 15일 계정식, 현제명, 김성태를 중심으로 고려교향악단을 탄생시키고 그 해 10월 수도극장에서 계정식의 지휘로 창단연주회를 가졌다. 당시 연주곡은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운명>. 이후 서울교향악단을 거쳐 6·25 전쟁기의 해군정훈음악대는 1954년 해군교향악단으로 개칭했고, 1957년 8월 1일 서울특별시에 의해 단장 김생려, 단원 82명으로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 창단하게 된다. 초대 상임지휘자 김생려 이후 김만복, 원경수, 정재동, 박은성에 이어 공백기를 거친 뒤 1999년부터 정치용씨가 상임지휘자 겸 단장으로 활동했고, 지난해 5월 상임지휘자로 마크 에름레르를 영입했다. 그동안 서울시향의 연주실적을 보면 고려교향악단, 서울교향악단 정기연주회 50여 회와 해군교향악단, 서울시립교향악단 정기연주회 600회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정기연주회 외에도 2,800여 회의 특별연주회를 가지고 있다. 정기연주회를 통해 거쳐간 지휘자는 50여 명, 협연자는 800여 명에 이른다. - ‘고려교향악단에서 서울시향까지 55년 발자취’, <주간동아>, 2001년 273호
관련도서
<한국예술총집>, 대한민국예술원, 1998 <기억하고 싶은 선구자>, 한상우, 지식산업사, 2003
연계정보
-서울시교향악단
관련사이트
대한민국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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