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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수 (본명:정용훈, 1909.7.28~2003.11.3 )

예술가
정광수 (본명:정용훈, 1909.7.28~2003.11.3 )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64.12.24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 인정 2003.11.3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 사망해제
학력(계보)
1925.~1930. 김창환에게 5년간 창악 사사 1932.~1934. 전남 장흥 보림사 삼성암에서 2년간 독공으로 판소리 연마에 정진 1936.~1938. 유성준에게 2년간 창악 사사
생애(약력)
1930.6.1 전남 목포 예기권번 창악교사로 2년간 재직 1934.7.1 전남 순천 예기권번 창악교사로 2년간 재직 1957.6.5 전남 광주 서동 민속예술학원에서 창악강사로 재임명되어 후진 양성 1980.1.2 (사)판소리보존연구회 제4대 이사장에 선임 1983.10.20 국민문화훈장 서훈 1999.4.11 KBS 국악한마당 출연(KBS 별관) 1999.5. 종로구민회관 공연(종로구민회관) 2000.4. 국립국악원 개원50주년 기념공연 2000.5. KBS 국악한마당(KBS 별관) 2000.10. 종로구 국악로대축제공연(종묘공원) 2000.10. 전국판소리경연대회 참가(광주) 2001.5. 안숙선의 소리마당출연(KTV) 2000.11. 방일영문화재단 문화상 수상(조선일보사) 2001.8. KBS 국악한마당 출연(KBS별관) 2001.10. 광주문화방송 ‘얼씨구학당’ 출연 2002.9. 공개행사 발표공연(국립국악원)
리뷰
“충과 지략이 담긴 수궁가는 오늘의 시대에서 큰 교훈을” 판소리는 우리 겨레의 정통음악 예술의 한 양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판소리는 서민의 애환이 담겼고, 생활이 표현되어 있으며, 저항과 해학이 깔려있는 그들의 사상과 감정을 대변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판소리에 담겨 있는 그들의 희망과 삶의 이야기는 그들에게 있어 오늘과 내일의 등불이요, 또 오늘의 샘물이 되었던 것이다. 60여 년 동안을 오직 민족 전통음악 소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져 살아온 인간문화재가 있다. 수궁가의 정광수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의 수궁가 예능보유자 정광수(79)씨는 17세의 소년시절 조선왕조 고종때 김창환 명창의 문하생으로 입문함으로써 판소리계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나주에서 5년 동안을 김창환 명창에게서 판소리의 수강을 받았다. 판소리에 몰두하기 시작한 그는 다시 경남 진주로 내려가 당시 예기권번 즉 기생학교의 선생으로 있는 유성준씨에게서 적벽가를 2년 동안 수업했다. 유성준씨는 유명한 장자백씨의 수제자이기도 하다. 정씨는 판소리의 공부를 여기서 머물지 않았다. 그는 이어 서울로 올라가 익선동에 자리잡고 있던 조선성악연구회의 문을 두드렸다. 조선성악연구회는 당시의 5명창이 다 모여 있었다. 정씨는 그곳에서 근대의 명창 이동백씨를 만나게 됐다. 이동백씨(1867~1950)는 충남 비인출신으로 45세 때 원각사에 입사 연흥사, 광무대, 협율사에 참가하였고, 송만갑, 정정열씨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했다. 특히 춘향가와 적벽가에 뛰어났다. 그는 이씨로부터 적벽가 중에서 삼고초려를 배우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수련을 끝낸 정씨는 드디어 동일창극단에 입단 우리나라 판소리계의 첫 무대에 서게 됐다. 그는 이 동일창극단의 설립단원으로 각지를 순회공연을 가졌다. 그가 동일 창극단을 따라 평양을 거쳐 신의주에서 공연을 하던 중 8ㆍ15를 맞았는데 이 창극단은 그때 해산을 했다. 정씨는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나의 일생 중 가장 전성기라고 한다면 동일창극단 시절이었다. 그때 나이가 30대로써 건강과 의욕이 왕성하였으며 주연급 스타생활을 했기 때문에 잊지 못할 추억의 시절이었다.”라고 말했다. 8ㆍ15해방이 되자 그는 다시 그리운 고향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전남 광주에 내려가 예기권번학교의 창악강사 생활을 했다. 1951년 그는 광주지방의 유지, 예술가, 관현악단 등과 제휴하여 광주국악원을 창립하여 국악의 장려 보급선양에 온 힘을 쏟았다. 나라에서는 그의 판소리 정진에 대한 가치와 존재를 높이 평가 1964년 12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한 것이다. 이때가 어쩌면 그의 일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웠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당시 소관부처였던 문교부는 중요무형문화재를 보존하는데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키 위하여 <제4회 중요무형문화재 발표공연>을 개최하였다. 1965년 1월 17일 중앙국립 극장에서 가진 이 공연은 제1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보태평>과 <정대악> 제2부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 <양주별산대놀이> 제3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의 순서로 진행됐다. 정광수씨는 제3부 <판소리 춘향가>에 김소희, 박녹주, 박초월, 김여란, 김연수씨 등과 공연하였는데 그는 광한루장면을 담당했다. 그런데 오늘 현재 당시 공연했던 6명중 생존자는 자신과 김태희씨 등 2명뿐이고 나머지 4명은 타계했다. 그는 이때를 전후하여 서울에 머물면서 본격적인 판소리 세계에 정진, 제4대 판소리보존연구회의 이사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3년 동안 이직에 봉사하다가 후임 이사장직을 조상현씨에게 인계한 것이다. 정씨는 62년간을 오직 판소리를 위해 마음과 몸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그는 1909년 7월 28일 전남 나주군 공산면 복용리에서 출생, 나주공림보통학교를 졸업, 4년 동안 서숙한 것 이외는 오늘날까지 판소리 한길을 달려왔다. 그는 현재 부인과 1남 2녀를 두고 있다. - 판소리를 하는 보람과 긍지는 무엇인지 “판소리를 하는 이를 재인이라고 한다. 나는 무엇보다 판소리에 몸을 담으면서 특히 수궁가의 가사내용이 절대적으로 우화적인데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즉 충신의 도리를 다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믿음과 애국이 요청되고 있지 않은가.” - 소리를 잘 내는데 어떤 비법이나 일화 같은 것이 없는지 “나의 경우는 김창환 명창에게 5년 동안 판소리를 배울 때 가장 고통스러웠다. 그것은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런 과정이 성악하는 사람들에게 꼭 거쳐야 할 과정이다. 송흥록 명창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그가 10년 동안 동굴 속에서 소리를 수업하다가 밖에 나왔는데 그때 한 스님의 염불소리가 들렸다. 송명창은 그 스님의 소리 흉내를 내려 했으나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다. 그는 석벽위에 올라가서 그 백발 스님에게 큰 절을 하면서 소리의 비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했다. 백발 스님은 말하기를 ‘네가 올 줄 알았다. 열심히 공부를 하였지만 지금의 상태로는 아직 모자란다. 2~3년간을 더 수업해야한다.’고 타이르는 것이었다. 송명창은 이 스님의 말을 쫓아 다시 동굴 속에 들어가 3년 동안 열심히 수련을 쌓았다. 3년 후 동굴밖에 나오니 그때 역시 백발스님의 염불소리가 산 계곡에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송명창은 이때 그 소리에 맞춰 했는데 이번에는 똑같은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송명창의 경우와 같이 어떤 사람은 폭포소리에 소리를 내다가 각혈을 하여 소리를 뚫는 경우도 있다. 하여간 소리를 제대로 내는데 큰 수련이 있어야 한다.” - 오늘날의 판소리계에 남기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경창대회에서 1등을 하면 그것으로 다 된 것처럼 만족하는데, 이것은 큰 유감이다. 오히려 수상을 계기로 더욱 판소리에 정진을 해야 한다. 명창이 되기란 쉬운 것이 아니다. 특히 이수생이나 후보생들은 자신의 판소리 공부의 현재에 만족하지 말고 더욱 더 잘 하고 더 배워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를 해주기 바란다.” - 당면하고 있는 우리 전통문화예술계의 문제점이 있다면 “그동안 국고의 지원 등으로 국립창극단 등이 많이 발전하고 전통 예술인들의 생활보장도 신장되었지만 아직 부족하다. 서울의 무대도 그렇겠지만 지방의 경우는 공연장의 부족현상이 심해 창극계의 발전에 큰 지장을 받고 있다. 정부당국은 우리 창극의 부흥을 위하여 배전의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며 창극계는 한국적인 창극의 정립을 위해 보다 노력해야 할 것이다. 창극이 어디까지나 판소리를 그 전제로 하지 않는 한 한국의 창극은 존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 느껴야 할 것이다.” - 판소리가 우리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판소리의 다섯 마당 중 즉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등이 있는데, 이것은 삼강오륜의 오륜과 같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다섯 가지의 인륜 1. 군신사이의 의리 2. 부자사이의 친애 3. 부부사이의 분별 4. 장유사이의 차서 5. 붕우사이의 신의 가 있어야 하는 데 판소리의 다섯 마당은 그 희극적 우설 속에서 우리에게 오륜을 깨닫게 해준다. 때문에 판소리는 우리 사회를 정화시켜주는 하나의 소리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문화재시대를 연다’의 두 번째의 주인공 정광수씨 그는 진실한 겨레의 얼에서 창조된 예술은 마치 한 겨레가 멸망되지 않음과 같이 그 예술도 그 민족과 더불어 영원히 계승될 것이라는 진리를 알고 오늘도 2층 조그만 방 한 칸을 빌어 후배들에게 판소리를 지도해 주고 있다. <월간 문화재>, 1987년 11월 1일, 제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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