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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진 (1916.7.12~2003.7.8)

예술가
박동진 (1916.7.12~2003.7.8)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73.11.11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 인정 2003.7.8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 사망해제
학력(계보)
1922.1.1 한문수학 1934. 김창진에게 심청가 사사 1934. 조선성악연구회 판소리 전공, 정정열에게 판소리 춘향가 사사 1935. 유성준에게 판소리 수궁가 사사 1936. 조학진에게 판소리 적벽가 사사 1936. 박지용에게 판소리 흥보가 사사
생애(약력)
1937. 중앙국립창극단장 취임 1962. 국립국악원 국악사 취임 1967. 대만 초청공연 1968. 판소리 흥보가 완창 5시간 1969. 판소리 춘향가 완창 8시간 1970. 판소리 심청가 완창 6시간, 파월 한국군 위문공연, 판소리 변강쇠타령 완창 5시간 1971. 판소리 적벽가 완창 7시간 1972. 판소리 수궁가 완창 5시간, 성서 판소리 창작 4시간 공연 1972. 판소리 배비장 타령 발표 1973. 판소리 이순신장군일대기 창작 발표, 변강쇠타령 발표회 1974. 숙영낭자전 판소리 발표 1974. 성웅이순신장군 판소리 4시간 취입 1975. 판소리 구약성서 요셉 발표회 1977. 판소리 옹고집 발표 공연 1978. 창작 판소리 예수그리스도 신약성서 1980. 신학대학 장로교회 강사 1980. 국악협회 이사 취임, 국립국악원 지도위원, 전북대학교 국악 강사 1980.1. 국민문화 은관훈장 서훈 1981. 미국 순회 국악공연 1982. 은관 문화훈장 서훈 1982. 미국 로스엔젤레스 성서 판소리 발표 공연 1989.1. 서울특별시 문화대상(음악부문) 수상 1989. 판소리 5마당 디스크 취입
리뷰
판소리, 박동진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천하제일의 소리꾼’이라고 부른다. 갓 쓰고 도포입고 쥘부채를 쥐고 무대에 서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성음에 재기 넘치는 아니리와 발림으로 관중을 휘어잡으며 울리고 웃기는데 단연 명창중의 명창이다. 한국 판소리의 거인으로 불리는 박동진(74)옹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의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이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벌써 소리판에서 은퇴하여 제자나 가르치고 있을 나이인데도 ‘옹(翁)’이란 칭호와 어울리지 않을 만큼 당당한 현역이다. 젊은이들도 감히 해내기 어려운 3~4시간의 완창을 거뜬히, 그것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우렁차게 해낸다. 무대에서 3~4시간씩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버티는 왕성한 체력은 물론이고 듣기에 지루하지 않도록 극적인 변화를 주어가며 자그마한 책 한권의 분량의 가사를 외우고 있는 총기 또한 놀랄만하다. 어쩌면 노인네가 저럴까 싶다. 박동진옹은 1916년 7월 12일에 충남 공주군 장기면 무릉리 지금의 공주시 무릉동에서 5남매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할아버지가 남의 빚보증을 잘못 서주는 바람에 백석지기의 살림이 거덜나 외가인 충남 대덕군 진잠면 교촌리(지금의 대전 유성구 교촌동)에서 어렵사리 살아가는 처지에 학교엔 갈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아홉살되던 해에 그곳 면장으로 있던 송일호씨가 ‘너는 재주가 좋으니 학교에 다녀라’해서 진잠보통학교(그때는 2년제)에 들어가 두 번이나 월반을 하여 2년만에 졸업했다. 그리고 2년 동안 별로 하는 일이 없다가 다시 송면장의 도움으로 대전중학에 가게 되었다. 그 당시 대전중학은 일본학교로 조선사람은 한 학년에 한 둘밖에 뽑지 않았는데 당당 일등으로 합격했다. 70이 넘은 지금에도 판소리 다섯 마당을 줄줄이 외는 것을 보면 그때의 총기를 미루어 알만하다. 송면장의 도움으로 대전중학에 잘 다니던 그는 3학년때 면장의 타계로 학비를 댈 수 없게 되었을 무렵 이동백, 송만갑, 이화중선, 이중선 등이 ‘협률사(協律社)’를 조직하여 대전에 가설무대를 설치하고는 소리와 춤판을 벌였다. 이때 그는 소리에 홀려버리고 말았다. ‘저것은 사람이 하는게 아니고 신선이 하는 거다’ 싶었다. 그래서 학교를 작파하고 열흘 동안을 매일같이 구경 다녔다. 워낙 총명한지라 열흘만에 <만고강산>과 <추월은 만연한데>의 가사와 곡을 외워버렸다. 그는 그때 주워들은 풍월로 ‘소리잘하는 애’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동에 환갑잔치에 불려가서 소리를 했더니 이동백씨의 고수로 있던 타동근씨가 ‘목소리는 그만하면 됐고, 소리공부를 하면 대성하겠다마는....’ 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열 여섯살의 박동진 소년은 그의 부친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소리공부를 하겠다고 간청했으나, 대전중학을 나오면 장래가 보장되는 터에 허락할 리가 없었다. 그는 그 길로 줄행랑을 놓아 타동근씨의 소개로 청양의 손병우씨의 모든 것을 익혔다. 그래서 그는 작은 선생의 곁을 떠나 큰 선생을 찾아 나서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잠시 옆길로 새게 된다. 그의 명성이 자자해지자 사방에서 부르는 것이었다. 공주, 유성, 김천, 대구 등지의 요릿집에 불려가 손님방에서 소리도 하고 기생선생 노릇도 하게 되었다. 이러기를 2년 남짓, 그러는 동안에 420원이라는 큰 돈을 벌었다. 그 때 면장의 월급이 12원이었으니까 대단한 돈이었다. 그 돈을 가지고 고향 진잠으로 금의환향하여 큰집도 사고 논밭도 사고 소도 사서 집안을 일으켜 놓았다. 집안을 일으켜 놓은 소년은 꿈에 그리던 큰선생을 찾아 나섰다. 먼저 대구에 있는 박기홍씨를 찾았다. 그에게서 <흥보가>를 배웠는데 몇 번 배우니까 그냥 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곧이어 황학진씨로 부터 <적벽가>를 배웠다. 여기서도 그는 남들이 몇 년 걸려 배우는 것을 몇 달만에 해냈다. 그는 이때 전수 받은 적벽가로 훗날 판소리의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소리를 위해 태어나셨는가 봅니다. 아니요, 일구월심 소리밖에 몰랐으니까. 소리 못하면 죽고 만다는 생각밖에 안했지요. 스물 한살이 되던 해 겨울에 서울로 올라와 정정열씨를 찾아가 <춘향가>를 배웠다. 이 때도 6개월만에 <춘향가>를 배웠을 뿐 아니라 책 한권 분량의 가사를 하루만에 외워 선생을 놀라게 하였다. 그 후로 성준씨로부터 <수궁가>를 배우고 김창진씨로 부터 <심청가>를 배워 판소리 다섯 마당을 모두 석권하였다. 그리고는 창극단을 따라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일제를 마감하고 해방 후에는 진잠의 뒷산에 움막을 짓고 똥물을 먹어가면서 득음의 백일공부에 몰입하였다. 백일공부를 마친 그는 ‘조선창극단’을 조직하여 전국 순회공연을 갖는 한편 ‘여성국극단’을 따라 햇님달님의 악사 노릇을 하고 바보온달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5·l6후 ‘국립국악원’에 시험을 치러 국악사로 취직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인 판소리수업을 시작을 했다. 새벽 6시면 집을 나서 연습실에서 두 세시간씩 소리연습을 했으며 20년이 넘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가 본격적으로 소리를 시작한지 5년째 되던 1968년에 그에게 커다란 문이 열렸다. ‘국립국악원’ 주최로 5시간에 걸쳐 <흥보가>를 완창하였던 것이다. 국내신문의 대서특필은 물론 AP, UPI의 전파를 타고 해외토픽으로 나갔다. 박(朴)옹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듬해인 1969년에는 <춘향가>에 도전하여 장장 8시간에 걸쳐 고수를 5명이나 바꿔가면서 완창했다. 완창의 길을 열어놓은 박(朴)옹은 종횡무진으로 독주하며 소리판을 이끌어왔다. 1970년엔 <심청가> 6시간과 <변강쇠 타령> 5시간, 1971년엔 <적벽가> 7시간, 1972년에는 <수궁가> 5시간과 <배비장타령> 5시간을 완창하고 <예수전>, <팔려간 요셉> 등 4시간짜리 성경판소리를 창작하여 창작판소리의 가능성도 열어 놓았다. 1973년에 판소리의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박(朴)옹은 소리의 정진에 더욱 채찍을 하여 그 해 판소리 <이순신장군 일대기> 창작, 9시간 40분에 걸쳐 열창함으로써 전대미문의 대기록을 세우고 이어 1974년에 <숙영낭자전>(3시간)과 <창부타령>(3시간), 1975년에 <강릉매화전>(4시간), 1976년에 <무숙이타령>(4시간), 1977년에 <옹고집>(3시간)을 연달아 완창해서 국악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니까 박(朴)옹은 지금의 판소리 다섯 마당은 물론 사멸되어 없어졌던 열 두 마당을 완성해서 완창했으며 게다가 <치악산> 등의 창작판소리까지 합하여 열 여섯 마당의 판소리를 열창하여 전무후무할 소리꾼이 된 것이다. 이렇게 천하 제일의 소리꾼이 된 박옹은 80년대 이후에도 쉬지 않고 초청공연, 발표공연, 해외공연 등으로 영일없는 나날을 보내며 판소리중흥에 큰 몫을 하고 있다. 이러한 공로로 박(朴)옹은 정부로부터 국민훈장도 수여 받은바 있으며 서울특별시를 비롯한 각종 기관과 단체로부터 문화상과 공로상 등을 수없이 받았다 . 74세의 고령도 잊은 듯 지금도 전북대의 강의가랴, 각급 기관의 초청강연과 공연, 계속되는 소리공연 등 젊은이들을 뺨치는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런 바쁜 와중에도 매일 세 시간씩의 연습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있다. 지금도 매일 연습을 하신다면서요. “그럼요. 요즈음도 하루에 두시간에서 세시간 정도 꼭 연습하지요. 오늘은 적벽가의 삼고초려에서 어느 대목까지 한다 하면 꼭 해냅니다. 왜 매일 연습을 해야하느냐? 내 머리속엔 판소리의 가사가 180시간 정도의 분량이 들어 있는데 이걸 연습하지 않으면 가사를 잊어버린다 이겁니다. 그리고 매일 소리를 안하면 성대유지가 안돼, 소리가 째지고 듣기 싫어지거든” 이제 제자나 가르치며 좀 편히 사셔야지요. “제자나 가르쳐요? 내 공부도 다 하지 못했는데. 평생을 연구해도 끝이 없는 게 소리지요. 그러니 남 가르칠 틈이 있나요. 좀 쉬라고요? 숨이 꼴딱 넘어가는 그날까지 내가 할 일을 해야지. 판소리 열두 마당의 오선보와 대사집도 내야하고 할 일이 태산같은디. 그리고 무대에서 소리하다가 죽는 게 내 소원이지요.” 내년이면 박(朴)옹이 소리에 입문한지 꼭 60년이 된다. 더욱 강건하시어 이 나라 소리의 중흥에 기여해주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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