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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풍모방 놀이마당 ’79

작품명
원풍모방 놀이마당 ’79
구분
1970년대
작품소개
원풍모방 노동조합은 1970년대 후반 대표적인 민주노조 중의 하나였다. 노조 내의 탈춤반 활동도 모범적인 것으로 평가되는데, 이는 당시 대학 탈춤반 학생과 졸업생들의 지원, 연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노동운동의 성장에 따라 생기는 노동자계급의 예술문화를 만들려는 욕구와 대학을 중심으로 한 탈춤부흥운동, 마당극 운동의 실천적인 현장지향성이 결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공연대본으로는, 1979년 봄 노동절 행사의 놀이마당, 1980년 3월 10일 노동절 행사의 놀이마당, 1981년 11월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에서 공연된 조선방직 노동쟁의, 1984년 3월 10일 한국노협 주최 노동절 행사의 놀이마당 등이 남아 있다. ‘놀이마당’으로 이름 붙은 이들 대본은 구조와 부분적인 대사가 같아 한 작품이 상황에 따라 변형되어 공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구조는 봉산탈춤 제6과장 양반과장의 구조를 그대로 빌어와 탈춤에서의 양반, 말뚝이를 체험적인 사장, 노동자로 바꾸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식인과 결합하여 만든 초기 작품인 만큼 관념을 경유한 의인화이긴 하나 대학생, 지식인들의 작품들과는 달리 노동자적 생활감각이 짙게 배어 있다. (……) 1979년 4월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초청으로 이루어진 (……) 공연상황을 살펴보면, 1부 기념식이 끝나고 난 후 고사와 함께 공연이 시작되었고, 공연이 끝난 후엔 옥상 시멘트 바닥 위에서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서로 어깨를 부둥켜안고 빙빙 돌며 뒤풀이를 가졌다. <민족극 대본선 3 – 노동연극 편>, 민족극연구회 엮음, 풀빛, 1991
작품내용
[1. 놀이마당] 노동자가 등장하여 어용지부장과 논쟁을 벌이다가 매만 맞는다. 어용지부장은 양반 잔치에 가버리고 다른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못 배우고 돈이 없기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때 억울하게 죽은 노동자 귀신인 병신 1, 2, 3이 등장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연을 들려준다. 이를 들은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힘을 모으기로 한다. 한편 양반들과 사장들은 한자리에 모여 술잔치를 벌이며 노동자들을 비난하고 비웃는다. [2. 양반과 노동자 대립논쟁] 노동자와 양반이 한자리에 모여 임금인상 논쟁을 벌인다. 노동자들이 부당한 작업환경과 생계유지도 안 되는 임금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자 양반들은 공장 운영이 어렵다며 소비절약과 국산품 애용을 강요한다. 노동자들은 새로운 노조를 만들겠다고 하고 양반들은 그들을 무력으로 탄압한다. 노동자들은 군무를 추며 양반들과 싸워 승리하고 자연스럽게 뒤풀이로 넘어간다.
출연/스태프
스태프 작/공동창작 연출/공동연출
공연단체
원풍모방 노동조합 1980년 5월 말, 광주민중항쟁의 희생자들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인 사람들이 있었다.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있는 원풍모방 노동조합의 노조원들이었다. 노조원 1,700 명은 4백70만 원을 모아 6월 초 광주의 대주교 윤공희에게 직접 전달했다. 당시의 공포 분위기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풍모방 노조는 70년대에 활동한 민주노조 가운데서도 가히 전설적인 노조였다. 원풍노조는 전국에 비상사태가 선포돼 단체행동이 일절 금지된 72년, 파업농성을 통해 10년간의 어용노조를 청산하고 민주노조를 출범시켰다. 회사가 부도위기에 처한 74년에는 노조가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한국전쟁 이후 초유의 사례를 만들며 회사 정상화에 기여했으며 80년 봄에는 ‘한국노총 민주화와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전국궐기대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7이렇게 1970년대 최강의 민주노조였던 원풍노조도 5공화국의 노동계 탄압을 이겨내지 못하고 82년 해체되고 말았다. 원풍모방의 최후를 두고 노동계 인사들은 이렇게 한탄했다. “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의 마지막 깃발이 내리는구나!”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더 강한 80년대 노동운동이 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죽을 수 없다/ 한맺힌 우리의 가슴들은/ 땅끝까지 퍼져나갈 희망이 되어/ 꺾여도 짓밟혀도 죽을 수 없다/ 고귀한 생명의 뿌리를 뻗기 위해/ 흩어져 서 있는 자리 자리마다에서/ 힘차게 피어날 의지가 되어야 한다.” (원풍모방 노조원 장남수, ‘9·27 2주년에’) 참고: ‘실록민주화운동: 원풍모방 노동자들’, <경향신문>, 2004.3.14
비평
(……) 한편 80년 초의 같은 무렵 수도권 인근 공장노조들에서는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문화잔치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70년대 말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동일방직 사건과 YH여공 신민당사 농성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의 노동운동은 주로 섬유, 봉제, 가발 등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들의 몫이었다. 그러한 정황에서 초창기 탈패 일부는 민중과의 만남을 위해 농촌과 노동현장을 찾아나섰고 공장노조들에 연극반, 탈춤반 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아가며 살아가던 여성근로자들에게 탈춤은 무엇보다도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문화적 기능을 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원형 보급단계를 얼른 지나 80년대 초에는 벌써 여성노동자들 스스로 탈춤에다 자기네 현실을 직접 담아내는 노동자놀이판이 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의 노동자놀이판 중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서울 대림동에 있는 원풍모방에서 80년 3월 노동절 기념식날 노조원들이 꾸민 탈판이 있다. 먼저 노동자 세상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고 이어 공연이 진행되었는데 이는 일종의 창작 탈춤으로 보아 무방하리라 생각된다. 주로 옛 탈춤의 말뚝이 마당을 원용하여 어용지부장을 공격하고 사장 족속을 풍자하고, 그리고는 노동자와 사장의 대립을 논쟁화시킴으로써 간략하면서도 집약적인 효과를 얻어냈던 것이다. 옛 탈춤에서 양반과 말뚝이의 대립이 현대의 창작탈춤에서 사장과 노동자의 관계로 대체된 것은 매우 적절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공연이 노동자들 자신의 힘으로 꾸려짐으로써 현실감과 현장감이 매우 증폭되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듯 탈춤 또는 마당극은 노동자들 스스로 자기 현실을 표현함에 있어 매우 유용한 양식임이 드러나고 있었고 만일 당시의 사회상황이 계속 민주화의 방향으로 나아갔더라면 노동자 문화는 더 일찍 만개했을지도 모르겠다. (……) - ‘80년대 연희운동의 전개-마당극·마당굿·민족극을 중심으로’, 임진택, <창작과 비평> 69호, 창작과비평사, 1990.가을
관련도서
<민족극 대본선 3 – 노동연극 편>, 민족극연구회 엮음, 풀빛, 1991 <창작과 비평> 69호, 창작과비평사, 1990.가을
연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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