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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관(Revizor)

작품명
검찰관(Revizor)
작가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Nikolai Vasil'evich Gogol)
구분
유럽권
작가소개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Nikolai Vasil'evich Gogo1, 1809~1852) 러시아의 작가. 우크라이나 출생. 182l년 네진고등학교에 입학. 졸업 후 페테르부르크(現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하급관리로 지내면서 배우를 지망했고, 미술학교에도 다녔다. 그 사이에 우크라이나인의 생활을 취재한 소설집 <디카니카 근교야화(近郊夜話)>(1831~32)를 발표하여 명성을 얻었으며, 이것이 인연이 되어 푸슈킨과도 알게 되었다. 1834년 페테르부르크대학의 세계사 담당 조교수가 되었으나 1935년에 그만두고, 작품집 <아라베스크>(1835), <미르고로드>(1835)를 출판하였다. <아라베스크>에는 <초상화(肖像畵)>, <광인일기(狂人日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작품이나 이어 쓴 <코>(1835)에는 불안, 환상, 현실과 초자연의 혼합 등이 나타나 마치 만년의 그의 정신세계를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또한 희극에도 손을 대어 <검찰관>(1836)을 완성, 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극장과 모스크바에서 상연했으나, 관료주의의 부패를 통렬히 비난하였다는 이유로 반대자들의 공격을 받고 1836년 러시아를 떠났다. 이후 1848년까지 러시아에 두 차례 돌아갔던 것 외에는 스위스와 파리, 로마 등지에서 살았다. 그 뒤 1841년에는 단편인 <외투>(1842)와 장편 <죽은 넋>의 제1부를 완성하고, 제2부를 모스크바에서 완성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정신적 고뇌와 사상적 동요 속에서 착란상태에 빠져 자살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서정적 경향의 것과 현실, 특히 농노제와 관료주의의 부패에 대한 비판과 조소를 퍼붓는 경향의 것이 있는데 <디카니카 근교야화>와 <미르고로드>는 전자에 속하고, <검찰관>, <외투>, <죽은 넋> 등은 후자에 속한다. 푸슈킨과 더불어 러시아 근대 문학의 개척자로서 비판적 리얼리즘의 전통을 확립하였고, 19세기 러시아문학 발전의 기초를 닦았다. 위대한 희극 <검찰관>은 니콜라이 1세 때의 부패한 관료제도를 무자비하게 풍자하고 있다. 어느 지방도시의 관리들이 잘 차려 입은 건달을 암행검찰관으로 잘못 알고 심한 행정폐해를 감추기 위해 뇌물과 연회를 베풀어 그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려 애쓴다. 가짜 검찰관이 떠나고 성공했다고 좋아하는 사이에 그들을 공포에 휩싸이게 만든 진짜 검찰관의 도착소식이 알려진다. 이처럼 고발성을 띤, 이른바 ‘눈물을 통한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은 황제의 특별명령으로 1836년 4월 19일 초연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보수적인 언론과 관리들에게 크게 비난 받았고, 고골리는 로마로 피신, 1842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이탈리아는 어느 정도 가부장적인 엄격한 기질과 성향을 가진 그에게 매우 매력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곧 로마에서 작업하고 있던 종교화가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와 친해졌다. 여행 중인 러시아 귀족들도 만났으며 가톨릭으로 개종한 망명귀족 지나이다 볼콘스키와도 자주 만나 그녀의 모임에서 종교적 주제로 많은 토론을 하기도 했다. 그의 최대 걸작 〈죽은 넋〉도 이곳에서 썼다.
내용
전 5막으로 된 희극(喜劇)이다. 무대는 변경의 소도시이며 극은 “검찰관이 이곳에 오게 된 것입니다”라는 시장(市長)의 말로 시작된다. 이때 우연히 노자가 떨어져 꼼짝 못하게 된 청년 프레스타코프가 이 도시에 찾아온다. 청년은 자신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비밀로 파견된 검찰관으로 생각하고 있는 늙은 여우 시장과 심리극을 전개하게 된다. 또한 직권을 앞세워 사리사욕을 채우기에만 전념한 판사, 자선병원의 감독, 학무(學務) 감독 등과도 대면하게 된다. 한편 끝없는 거짓말로 시장 부인을 설득하고 외동딸인 마리아와 결혼까지 하고 공포에 떨고 있는 무리들로부터 거꾸로 뇌물을 잔뜩 받아 가지고 프레스타코프는 이 도시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 후 우체국장의 연락으로 가짜였다는 것이 밝혀져 모두 원통해 하고 있는데, 진짜 검찰관이 도착했다는 전달을 받고는 모두들 표정이 돌처럼 굳어져 버린다. ‘자기의 얼굴이 비뚤어졌는데 거울을 책망한들 무엇하랴’라는 속담을 제사(題詞)로 사용한 <검찰관>은 특수한 상황을 매개로 한 러시아 사회의 전형적인 희서(戱書)이며, 제정러시아의 기반 자체에 가해진 통렬한 타격이었다. 또 특수한 것으로부터 일반적인 것을 이끌어내는 고골리의 수법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보편성을 얻고 있는 작품으로, 러시아 근대 연극은 바로 고골리의 이 <검찰관>에서 시작되었다.
국내공연연보
1932년 극예술연구회 / 조선극장 / 홍해성 연출 1945년 극단 Chunsun 1963년 동인극장 1963년 청포도극회 / 함현진 연출 1967년 6월 동인극장 / 함현진 연출 1971년 11월 21일~23일 서울연극학교 / 드라마센터 / 오태석 연출 1988년 11월 24일~11월 29일 극단 춘추 / 문예회관대극장 / 문고헌 연출 1991년 11월 6일~12일 국립극단 / 국립극장 / 김철리 연출
예술가
홍해성(洪海星 , 1893~1957) 본명은 재원(在遠). 1920년 김우진, 조명희와 함께 극예술협회를 조직했고, 1921년 동우회순회연극단으로 <김영일의 사(死)>를 연출하여 데뷔했다.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법과를 자퇴하고 본격적인 연극수업을 위해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를 수료했다. 일본 신극의 선구자 오사나이 가오루[小山內薰]의 제자가 되었고 그의 소개로 일본 스키지[築地] 소극장 전속배우로 신극을 배웠다. 1929년 윤백남, 박승희 등과 경성소극장을 조직했으나 곧 해산되었다. 1930년 10월 신흥극장 조직에 참여하여 <모란등기(牡丹燈記)>를 연출했다가 실패했으나 같은 해 12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벚꽃동산>을 연출하여 성공했다. 1931년 극예술연구회의 창립에 선배격으로 참가해 극단 공연평을 담당했고, 극예술연구회 직속 실험무대의 제1회 공연작품인 <검찰관>을 비롯해 제2·6·9회 공연의 연출을 맡았다. 1936년부터는 동양극장에 연출담당으로 들어가 활동했으며, 1956년 국립극단의 <신앙과 고향>을 연출했다. 그 밖의 연출작품은 극예술연구회의 <바보>(1933), 연극사(演劇舍)의 <개화전야(開化前夜)>, <신라의 달>, <항구의 비가>(1933), 동양극장의 <승방비곡(僧房悲曲)>(1937), <어머니의 힘>(1939) 등이다.
리뷰
역(譯)이 좀더 “조선(朝鮮)말”이었으면…(함대훈(咸大勳) 역) “뚱뚱한 얼굴을 가진 자(者)” 같은 것은 “그 얼굴 뚱뚱한 자” “낫짝이 뚱뚱한 놈”으로 하면 조선(朝鮮)말이 된다. 백성들이 검찰관(檢察官)에게 호소하는 장면이 도리어 웃음꺼리가 된 것, 절을 많이 하고 “예 그럿습니다”의 합창(合唱)이 잦은 데 실패(失敗). 실수(失手)로 시장(市長)의 딸이 두 번이나 우는데 마지막에 자기(自己) 허혼자(許婚者)가 부랑자(浮浪者)임이 폭로(暴露)될 때 쓸어지지 않고 태연자약했었다. 좀 지루한 감이 있었던 것은 각본자체(脚本自體)때문. ‘극예술연구회공연(劇藝術硏究會公演) <검찰관(檢察官)> 관극기(觀劇記)’, <신동아(新東亞)>, 1932년 6월 1일
관련도서
<검찰관>, 고골리 저, 이동현 역, 서문당, 1975 <검찰관>, 니꼴라이 고골 저, 조주관 역, 민음사, 2005 <검찰관/외투>, 고골리 저, 이영미 역, 혜원출판사, 1996 <고골: 환상과 현실의 영원한 방랑자>, 정명자, 건국대학교출판부, 1995 <러시아 문학의 이해: 푸시킨과 고골>, 한국슬라브학회 편, 민음사, 1993
관련사이트
국립극장
관련사이트
목화레퍼토리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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