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황도붕기풍어제

작품/자료명
황도붕기풍어제
지정여부
강대형
구분
무속의례
흐름
황도 붕기풍어제는 충남 태안군 안면읍 황도리에서 마을의 평화와 풍어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지내는 제이다. 원래는 일년에 두 번 즉 정원의 정월제와 8월 신곡맞이제를 지냈는데 신곡맞이제가 없어지고 정월제만 거행하게 되었다. 현재 황도 붕기풍어제는 음력 정월 초이튿날부터 초사흗날까지 거행되는데, 예전에는 하루가 더 소요되어 초나흗날 파제를 한다. 제의는 당굿을 포함하는 당굿형 제의와 굿이 아닌 비손 만이 덧붙여지는 제의인 당제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해마다 당제를 올리고, 3년 혹은 5년 마다 비정기적으로 당굿을 행했다. 그러나 1983년부터는 큰무당 김금화씨를 초빙하여 당굿을 크게 하고있다. 제의의 초기형태가 어떠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1960년 경까지만 해도 이 마을을 지켜주는 단골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아, 그 당시까지는 비손이나 굿이 혼합된 형태의 제의가 거행되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단골이 소멸하고 마을 내에 비손을 담당할 존재가 없어지자 다른 지역에서 무속인을 초빙하거나 마을 내에서 자체적으로 당주와 선주가 중심이 되어 제를 진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사실은 마을 노인들의 증언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데, 이전에는 안면읍 중장리에 거주하는 단골이 있었고 그 사람은 여러 명의 무인(巫人)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해마다 두 차례씩 수고비를 받으러 왔으며, 대개, 6월 보리걷이가 끝날 즈음과 10월 가을걷이가 끝날 즈음으로, 무녀가 직접 수레를 끌고 와서 거두어 갔다. 마을 사람들은 호당 보리와 쌀을 각기 한 말씩을 내어 수고비를 주었다. 이러한 현상은 1960년경까지는 지속되었으나 이 후 단골의 자손들이 부끄럽다 하여 그만두고 서울 등의 외지로 이주해 감으로써 이 마을의 단골도 사라졌다. 단골이 있을 당시에는 그가 당제의 비손을 맡았으며, 굿을 할 때는 인근의 다른 무당을 초빙해서 굿을 크게 했다고 전한다. 이 때 무당들은 안면도와 서산 등지에서 왔다고 하는데, 황도에 곧 다른 무녀가 이주해와 당의 관리인으로 당제에서 비손을 맡았다. 현존하는 당의 유래에 대해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형성과 그 시기가 같을 것이라고만 할 뿐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1973년에 이 마을을 조사한 고 박계홍 교수에 의하면 ‘섬의 입도주(入島主)는 나주(羅州) 정씨(鄭氏)와 해주(海州) 오씨(吳氏)로, 정씨는 큰 마을에, 오씨는 은거지에 각기 당을 세우고 제를 거행해 왔다. 그러던 중 60여년 전인 1936년 경에 은거지의 오씨 당이 허물어지자 다시 당을 세우지 않고 정씨 당에서 함께 제를 지내게 되었다. 현존하는 당이 바로 정씨 당으로, 그 집은 30여 년전인 1966년 경에 개축하여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황도리 마을의 노인들은 이와는 상반된 이야기를 들려 주었는데, ‘당산 위의 당집은 이 마을의 하나뿐인 당으로 중년에 오래되어 저절로 허물어졌기에 다시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했으며, 그때 본래의 당 모습과 좌향(左向)이 바뀌지 않도록 주의했다. 은거지에 당이 있었다면 어른들로부터 들었을 것인데 전혀 듣지를 못했다.’ 라고 하였다. 황도리는 인근에서도 당제에 대한 믿음이 가장 강하다고 한다. 이러한 점은 주민들의 자긍심으로도 작용하고 있으며,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면서 제의의 단절이 없었던 것도 특징이다. 일제 강점기에 당제에 대한 핍박이 있었으나 이때에도 당제는 어김없이 치러졌다. 밀도살이 금지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소를 희생물로 하던 제의 역시 존속되었다.
황도리 당신과 제주의 조건
당제에 모셔지는 신은 진대 서낭이라 하여 뱀을 주신으로 하고 있다. 뱀을 주신으로 모시게 된 것은 임경업장군의 간지가 뱀띠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대 서낭 외에 군왕님, 삼불제석, 성조대신, 용왕각시, 동서남북 이십사방 잡귀축출장군, 산신 등도 모셔져 있다. 당제를 주관하는 제주 혹은 당주는 12월 15일 경에 대동계에서 선정하는데 상주가 아닌 사람, 집안에 임신한 여인이 없는 사람, 제사 무렵 부인에게 월경이 없을 사람, 집안의 식구수가 적고 생활이 깨끗한 사람, 제일에 생기복덕이 닿는 사람 등등의 조건에 맞아야만 선출될 수 있었다.
제의의 절차 및 제물
제의의 절차는 음력 정월 2일 오전에 황우를 도살하고, 오후에 피고사를 지내며, 피고사가 끝난 뒤에는 당에 올라 뱃기 세우기를 한다. 뱃기 세우기를 한 뒤 굿을 하고, 1월 2일에서 3일로 넘어가는 시간에 당제를 지낸다. 당제를 지내고 난 뒤 다시 굿을 하고 제숙분베를 한 뒤 1월 3일 새벽에 뱃고사와 성주제, 당맞이를 차례로 지내고 나서 1월 3일 오후에 모든 제사가 끝난다. 제를 모두 끝내면 모든 선주와 선원, 기타 마을 사람들이 제주댁에 모여있다가 제주를 맞이한다. 제주가 도착하면 수고하였다는 인사를 나눈 뒤 음복을 하며 한바탕 논다. 이 놀이는 밤늦도록 계속 되다가 밤이 이슥해져서야 당제에 관한 경과보고와 경비 보고, 마을회의를 하게 된다. 마을회의가 끝나면 황도리의 풍어제도 모두 끝나게 된다.
전승자 정보
황도붕기풍어놀이는 보유자인 강대형을 비롯하여 황도리 마을 사람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연계정보
· 재구성 <한국민속대사전1>, 한국민속대사전 편찬위원회편, 민족문화사, 1991 <황도붕기풍어제>, 태안군·태안문화원·공주대박물관, 1996
관련도서
<월산임동권교수회갑기념 민속학논총>, 하효길, 1986, '황도대동제의 형태와 그 변화양상' <서산민속지>, 서산문화원, 1987 <한국민속대사전1>, 한국민속대사전 편찬위원회, 민족문화사, 1991 <황도붕기풍어제>, 태안군·태안문화원·공주대박물관, 1996
관련사이트
문화재청
관련사이트
안면도닷컴_안면도 문화
관련사이트
서해안풍어제보존회
관련멀티미디어(전체0건)
이미지 0건